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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i Jan 28. 2024

고려-거란 전쟁 <3>

제1차 전쟁 - 위대한 협상

 서희가 거란 진영에 도착하여 통역자를 시켜 거란측 인사에게 회담의 의전 절차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손녕이 대뜸 “내가 큰 나라 조정의 높은 사람이니 네가 마땅히 밖에서 절을 하고 들어와라”며 생짜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기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자 서희는 “신하가 군주에게 절을 올리는 것은 예의지만, 양국의 대신이 서로 만나는데 어떻게 그와 똑같이 하겠는가”라며 받아쳤습니다. ‘네가 황제도 아닌데 너에게 절을 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소손녕은 계속 절을 받기를 고집하며 서희를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서희는 화를 내며 관사로 돌아가 드러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소손녕은 그냥 서희를 자신의 막사 안으로 들여 서로 맞절을 하고 예법에 맞게 동서로 앉아 회담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의전을 둘러싼 기싸움이었지만, 더 깊게 보면 본격적인 협상을 앞두고 상대의 상태를 탐색해보는 전초전이기도 했습니다. 서희의 입장에서 보면, 만약 거란군이 기어코 남하하여 고려를 정복할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소손녕이 이와 같이 의전을 두고 입씨름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를 강하게 항의한 서희를 그냥 둘 리도 없으니 결국 거란군이 전쟁의 지속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셈이었습니다. 반면 소손녕의 입장에서도, 고려가 거란에게 항복할 의도로 사신이 왔다면 서희처럼 고자세를 취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고려가 항전 또는 적어도 대등한 협상을 하려는 의지가 굳건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소손녕의 요구


 회담이 시작되고 소손녕이 서희에게 거란의 입장 내지는 요구사항을 말했습니다. 첫 번째로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 거란의 소유가 되었는데 그 고구려 땅을 고려가 침범해 왔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국호에서부터 알 수 있는데, 소손녕이 뜬금없이 고구려 계승을 운운하니 조금 어이가 없게 되는 대목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로는 소손녕이 이를 ‘페이크 카드(fake card)’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소손녕도 당연히 고려라는 이름 자체가 고구려 그 자체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즉, 고려에게 있어 고구려는 정통성이고 건국의 근거입니다. 이러한 고구려 계승 자체를 부정하고 ‘너희는 사실 신라에서 나온 나라잖아’라고 뒤흔들어 버림으로써, 그 다음으로 테이블에 꺼낼 두 번째 메인 카드에서 고려의 협상력을 약화시키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소손녕이 ‘고구려’를 다른 의미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는 만주 지방에서 유일 패권을 행사했던 최초의 국가입니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한 것도, 바로 고구려가 만주를 통일한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즉, 고구려는 만주의 패권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는 나라였고, 만주를 지배하게 된 거란은 바로 그런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마치 실존했던 로마 제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가 ‘로마 황제’의 대관을 받은 것을 연상케 합니다.      


 어쨌든 뒤이어 소손녕은 두 번째 요구사항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건너 송을 섬기기 때문에 이렇게 출병해 온 것이다. 땅을 떼어 바치고 조빙(朝聘)에 힘쓴다면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고려가 거란과 인접해 있으면서 거란을 배척하고 송나라를 섬기는 것이 이 전쟁의 이유이며, 송과의 밀착관계를 끊고 거란과 사대관계를 맺으라는 것이 거란의 ‘진짜 목적’입니다.      


 거란은 태종 이후로 중화 왕조를 지향해 왔습니다. 즉, 거란의 지위를 중화적 세계관에 따른 천자국으로 두고자 했으며, 그렇기에 송나라와는 군사적 대립 뿐만 아니라 조공국을 확보하려는 외교 전쟁도 벌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송나라 태종이 고려에게 거란에 대한 협공을 제안할 정도로 송-고려의 연합은 거란에게 위협이 되는 외교관계였습니다.      


 지난번 글에서도 적었지만, 거란의 대전략은 한반도를 굴복시키고 중원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당시 거란과 송은 ‘어느 쪽도 상대를 정복하지 못하는 세력균형’(Wittfogel의 표현)의 관계였습니다. 게다가 동쪽에서는 고려, 서쪽에서는 탕구트 족의 서하(西夏)가 거란-송 대립의 균형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란이 중원으로 들어가 중화제국이 되기 위해서는 이 균형추를 거란 쪽으로 가져와야만 했던 것입니다.      


서희의 반박과 역제안


 서희는 이러한 거란의 전략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소손녕은 봉산군 전투 승리 직후, “우리(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다 차지하였는데, 지금 너희 나라(고려)가 변경지역을 침탈하였기 때문에 토벌하러 온 것이다. 우리가 사방을 통일하였는데 아직도 복속하지 않는 나라는 반드시 소탕시킬 것이니 속히 항복하여 오래 머무르지 않도록 하라”며 고려 조정에 자신의 요구사항을 먼저 밝힌 바가 있습니다. <고려사절요> 성종 12년 10월 기록에 따르면 서희는 이 문서를 받고 성종에게 “화친을 할 기미가 보입니다”라고 보고하였습니다. 당시는 안융진 전투의 승리가 있기 전이지만, 서희는 거란이 무엇을 원하며 어떤 상태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서희는 소손녕의 주장을 하나하나 반박했습니다. “우리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이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다. 국경 문제를 논하자면 거란의 동경(요양부. 지금의 요령성 심양)도 우리 땅인데 어째서 우리가 침범했다고 하는가? 게다가 압록강 안팎은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이 그 땅을 훔쳐 살면서 교활하게 거짓말을 하며 길을 막고 있으니 우리가 거란으로 가는 것은 바다를 건너 송으로 가는 것보다 어렵다. 따라서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 옛 영토를 돌려주어 성을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해준다면 어찌 조빙을 잘 하지 않겠는가? 장군께서 내 말을 거란 천자께 전해드리면 천자께서 어찌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서희는 소손녕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서 그 허점을 파고들었습니다. 즉, ‘거란이 고구려의 계승자라 주장하나, 우리 국호만 보아도 고구려의 후예임이 명백하고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은 우리가 도읍으로 하고 있으니(서경이 고려의 수도는 아니었으나 서경을 개경에 준하여 제2수도로 삼고 있었으므로) 고구려의 정통성이 우리 고려에 있음은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오히려 네가 문제삼는 정통성을 따진다면 너희가 우리 옛 땅을 점거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소손녕의 정통성 주장을 논박하였는데, 정통성 문제야 어차피 처음부터 명분의 이야기이지 실리적인 이야기는 아니었으므로 소손녕도 이를 더 문제삼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서희가 이야기한 거란의 동경은 바로 소손녕이 동경유수로 다스리던 곳인 만큼 괜히 이 주제에 대해 잘못 이야기하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꼴이었습니다.      


 나아가 서희는 소손녕이 “어째서 가까운 거란에 조빙하지 않고 굳이 먼 송나라에 조빙하는가”라는 말 자체에서 힌트를 얻어 역제안을 합니다. 고려가 송에 조빙하려면 비록 바닷길이 험하긴 하지만 위협세력이 없는 해로를 통해 가면 되는데, 거란에 조빙하려면 적대세력인 여진이 이를 가로막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란과 고려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여진을 몰아내고 고려와 거란의 경계를 맞닿게 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제안하였습니다.      


 이것은 실제의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고려의 지배력은 청천강 유역까지밖에 이르지 못했고, 거란의 지배력은 요동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양국 사이에는 공백지가 있었습니다. 서희는 이 점을 파고들어 양국이 압록강을 경계로 땅을 나누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경계가 맞닿게 되면 조빙을 하겠다는 뜻과 함께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당시 강동6주가 이미 실질적으로 고려의 지배력이 미치고 있던 곳이고 서희의 협상은 단지 이를 인정 받은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사대의 평화


 이로써 고려는 거란에 무조건적인 항복을 하거나 땅을 떼어주기는커녕 거란의 인정 하에 영토를 넓힐 수 있게 되었고, 거란도 고려의 조빙을 받아 거란의 천자국 체제를 공고히 하는 한편 압록강 유역을 지배할 외교적 명분과 지지도 얻게 되었습니다. 서희나 소손녕이나 충분히 만족할 결과를 얻은 것입니다.      

(물론 장기적으로 거란은 이 협상의 결과로 인해 훗날 고려를 정복하지 못하게 되니 이는 소손녕의 결정적인 실수였습니다.)


 <고려사> 서희 열전에 따르면 소손녕은 이 회담에 크게 만족하여 서희를 7일간 머무르게 하여 연회를 열고, 서희가 돌아갈 때에는 낙타 10마리, 말 100필, 양 1000마리, 비단 500필을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소손녕 개인으로서도, 이 전쟁은 소손녕이 동부전선의 사령관으로서 담당한 전쟁일 뿐 거란 황제가 국책 사업으로 일으킨 전쟁은 아니었음에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것이었습니다.      


 서희는 그 이듬해인 994년에 거란과의 약속대로 청천강과 압록강 사이의 지역에서 여진을 토벌하고 그 유명한 ‘강동 6성’을 쌓았습니다. 지금의 평안북도에 해당하는 청천강과 압록강 사이 지역은 동쪽이 첩첩산중으로 막혀있고 서쪽 해안을 따라 평지와 도로가 있는 일종의 회랑 지역으로, 대군이 남하할 경우의 루트가 매우 한정된 곳입니다. 즉 방어하는 측에서는 그 길을 잘 막으면 적이 남하하지 못하고, 설령 남하하더라도 뒤가 끊기기 쉬운 전략적 이점이 있습니다. 이 강동 6성은 고려-거란 전쟁 내내 거란군과 맞서 싸우는 전장이자 항전의 거점이 되었으며, 이후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북방 세력의 공격을 막는 방어선 역할을 해냈습니다. 서희의 전략적 판단이 천년의 역사를 바꾼 것입니다.      


강동 6성


 서희는 과거 송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는 등 당시의 국제정세를 잘 읽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단순히 국제정세의 큰 흐름을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서희는 실용적인 협상의 기술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싸워야 할 때’와 ‘협상해야 할 때’를 잘 알았고, 상대의 카드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을 끄집어낼 줄 알았습니다. 군사적 안목도 뛰어나서, 압록강-청천강 사이 지역의 기능과 이점을 잘 알고 적합한 방어선을 구축해 냈습니다. 그렇기에 위대한 관료 한 명이 전쟁의 참화를 국익으로 바꾸고, 향후 30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구도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종은 약속대로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조빙을 하였고, 거란도 성종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는 등 양국 사이에는 ‘사대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성종은 거란이 언제든 다시 공격해올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송과의 관계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성종은 강동 6성을 쌓는 외에도 이승건과 하공진을 차례로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로 임명하여 압록강 도하를 관리하게 하였으며, 청소년들을 거란에 보내 거란어를 익히게 하여 거란에 대한 정보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송에 사신을 보내어 거란에 보복할 계획임을 알리고 공동 작전을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997년, 고려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조카인 목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서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1차 전쟁을 이끈 두 인물이 연이어 퇴장하고, 고려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는 밝지만은 않았습니다.      




여담     


 서희는 국가의 위기를 훌륭히 극복하고 국익을 만들어낸 공을 대대로 인정받았습니다. 996년에 서희가 병이 들어 요양을 가자 성종이 직접 문병을 가는가 하면, 998년 서희가 세상을 떠나자 당시 왕인 목종이 직접 나서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습니다. 현종 때에 서희는 성종의 배향공신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조선왕조에서도 서희를 고려의 공신으로 인정하여 고려 왕의 제사에 함께 모시도록 하였습니다(조선왕조실록 단종 즉위년 12월 13일).      


 반면 소손녕의 최후는 조금 비참합니다. <요사>에 따르면 소손녕의 이름은 ‘소항덕’이고 손녕은 자(字)입니다. 소항덕은 승천태후의 딸이자 거란 성종의 남매인 월국공주와 혼인한 황실의 부마였으며 많은 군공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고려와의 전쟁 3년 뒤인 996년에 부인인 월국공주가 병이 들자 승천태후가 궁녀를 보내 시중을 들게 했는데 소항덕이 그만 그 궁녀와 간통하고 말았습니다. 공주가 이를 알고 분노한 끝에 숨을 거두자 승천태후는 분노하여 소항덕을 사사(賜死), 즉 사약을 내려 죽였습니다. 그러나 황실의 부마였고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죽은 뒤 난릉군왕으로 추증하여 그 명예를 지켜주었습니다. 


또 다른 여담     


 박상현(2010)의 논문은 서희의 협상을 게임이론에 입각하여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따르면 안융진 전투 이전까지는 소손녕에게 이 게임은 ‘교착게임(Deadlock Game)’, 즉 협력보다는 대결이 선호되는 구조였던 반면 고려는 ‘겁쟁이 게임(chicken game)’, 즉 대결을 선택하면 최악의 파국이 예상되는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안융진 전투의 승리로 고려와 소손녕이 모두 협력할 때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으로 옮겨왔고, 협상이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융진 전투의 승리가 가져온 변화이자, 이러한 변화를 감지하고 협상할 때와 항전할 때를 구분한 서희의 전략적 사고로 인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흥미가 있으신 분들은 논문을 한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박상현, 전략적 사고의 관점에서 본 서희의 강동6주 협상, 한국정치학회보, 44권 3호(2010), 139-158면).     


 굳이 게임이론이 아니더라도 서희의 판단과 협상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는 현대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듯 합니다. 조선왕조가 편찬한 <고려사>는 이례적으로 서희와 소손녕의 기싸움까지 상세하게 묘사하며 서희의 협상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만큼 이 협상이 중요하고 위대한 협상이었음을 후대에서도 인정한 것이라 보여집니다. <동사강목>을 쓴 안정복도 이 협상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적었습니다.    

  

일단 싸워 보고 화친을 요구해야 화친이 이루어질 수 있다. 만약 적을 두려워하여 한갓 화친만을 주장한다면, 적은 농락과 능멸을 못할 짓 없이 할 것이다. 이때 만약 대도수의 승첩과 서희의 불굴의 의지가 없었더라면 화친은 필시 이루어지지 않고 적의 무한한 요구를 채우기에 갖은 곤란을 겪었을 것이니, 후세의 귀감이 될 만하다.




참고 자료

 - <고려사>, <고려사절요>, <요사>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역본

(https://db.history.go.kr/)

 - <동사강목>, <조선왕조실록> :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 박상현, 전략적 사고의 관점에서 본 서희의 강동6주 협상, 한국정치학회보, 44권 3호(2010), 139-158면

 - 김아네스, 고려시대 북방민족과의 전쟁사론, 남도문화연구, 26호(2014), 169-20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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