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를 급하게 하고 나오자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감이 코 앞이다. 어떻게든 커피든, 술이든, 담배에 의지해서 글을 쥐어짜내야한다. 책상 위에 잿떨이가 비워진 적이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머그 잔과 술잔들이 널브러져 있고, 구겨진 종이와, 잉크가 떨어진 만년필 사이에 노트북이 그 얼굴에 빛을 발하고 있다. 하얀 노트북에 더 하얀 화면에 ... 외에는 그 어떤 글씨도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글이 써질 것이다. 같은 상상을 해보지만, 사실 나에게 마감 같은 건 없다. 집안에서는 담배를 피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마감이 있다는 건 돈을 받고 글을 쓴다는 것이다. 나는 글을 쓰고 돈을 받아본 적이 없다. 솔직히 그걸 바라는지도 잘 모르겠다. 매일매일 고양이가 모래 위에 똥을 싸서 정성스레 덮는 것처럼 나는 글을 쓰고, 그 글을 덮기를 반복한다. 코 끝에 로즈마리와 암모니아를 섞은 냄새가 계속 멤도는 걸보니, 고양이 화장실 모래를 갈 때가 됐다.
저 고양이 녀석은 자주 낯선 여자를 물어온다. 우리 집은 골목끝이라 인적이 드문데, 고양이를 따라서 겁도없이 여자들이 온다. 그것은 관광지 삶의 적나라한 단면이다. 사실은 진절머리가 난다. 나는 사실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그게 뭔지는 말할 수 없다. 여름에 선풍기 하나에 의지해 더위를 피하려면, 거의 항상 발가벗고 있어야 한다. 그건 선택이라기 보다는 생존 본능에 가깝다. 그런데, 시도때도 없이 고양이를 따라온 낯선 여자들 때문에 당황스러웠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물론, 상대가 항상 더 당황한다. 내가 벗고 있지 않아도, 여자들은 본인들이 내 집 마당을 무단 침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보면 마치 못볼거라도 본듯이 놀라 도망치듯 마당을 벗어난다. 나는 그게 하도 익숙해서,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나는 수염을 좀 길렀고, 머리도 좀 길렀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두번 정도만 씻고 지낸다.
나도 밥은 먹어야 하기에, 자전거로 삼십분은 달려야 갈 수 있는 식당엘 자주 갔었다. 그 식당의 좋은 점은 혼자가도 눈치를 보지 않고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식당이기도 했다. 식당의 주인은 내 또래의 여자였다. 이 마을에는 또래라는 이유만으로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내가 3개월쯤 그 식당을 꾸준히 가자, 주인은 나에게 뭐라도 하나씩 더주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후식으로 나오는 토마토장아찌가 하나에서 두개에서 세개까지 되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이가 시렸지만, 그것들을 꾸역꾸역 먹었고, 우리는 어느덧 몸을 섞는 사이가 되었다. 내가 그 여자를 사랑했는지는 뒤돌아보면 잘 모르겠다. 우리는 어떤 공감으로, 온기로 섬의 바람을 견디기 위해 서로의 체온을 나눈 사이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느 날 여자가 선을 보러 나가도 되냐고 나한테 물었고, 나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그러라고 했다. 나는 그 때, 내가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기미라도 보일 걸이라고 자주 후회하곤 한다.
여기는 누가봐도 풍경이 좋다. 나는 사람의 밀도가 높은 장소, 시간대는 늘 피해 다닌다. 산책도 주로 어스름한 밤중에 한다. 어스름한 밤중에 외진 등대 같은 데를 올 사람은 거의 없다. 낚시꾼들에게 눈인사 정도만 하면, 나는 나대로 고요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달이 유난히 밝던 어느 밤, 얼마나 밝았던지 나는 걸으면서 고개를 숙이면, 내 발가락 사이의 틈까지 훤히 볼 수 있었다, 머리카락이 길고 구불구불한 어떤 여자가 담배를 물고 방파제에 앉아 있었다. 옆에는 반쯤 비워진 맥주캔이 바람에 간당간당하며, 바위 위에 올려져 있고. 나는 늘 하던 것처럼, 눈인사를 하고 여자와 좀 떨어져, 내가 늘 앉던 자리에 앉아 달이 물 위에 비쳐 흔들리는 모습을 멍하니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저기요, 이 맥주 나랑 나눠 마실래요?라고 했고, 나는 안 될 것이 없었다. 여자의 눈은 깊고 검었다. 보이지 않는 맥주 캔의 바닥 같았다. 반도 남지 않은 맥주 캔은 금새 비워졌고, 우리는 자리를 옮겨 편의점에서 그리고 우리 집에서 맥주를 마셨다. 여자는 여행 중이었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고, 그날 밤 우리집에서 잤다. 우리집에는 빈방이 많았으므로, 밤에는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나, 늦은 아침 내가 여자를 깨우러 갔을 때, 왠지 모르는 끌어당김같은 게 느껴져 그대로 우리는 몸을 섞었다. 그날 아침 오랜만에 식당을 하던 여자가 찾아왔고, 그 이후 나는 식당에 가지 않았다. 여자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그 때 문간에서 흔들리던 여자의 눈빛은 어젯밤 물 위에 흔들리던 달빛 같았다. 차갑고 얇고 금방 쏟아질 것 같은.
그림을 그리는 여자는 갈 때가 딱히 있는 것 같지 않았고, 우리집에는 방이 많았다. 여자는 물감을 사기 시작했고, 아무 종이에나 그림을 그려 우리집 벽에 붙이기 시작했다. 집 곳곳이 여자의 초상화 혹은 하나도 닮지 않은 고양이 사진들로 도배가 됐다. 나는 평소에 그림에는 관심도 없었지만, 하나쯤 나도 그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느 날 여자에게 물었더니, 자신은 아름다운 것만 그린다고 답했다. 나는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림을 그리는 여자가 어떻게 떠나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여자를 만나는 동안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을 가장 많이 해 본 것 같다. 그리고 처음으로 날 사랑하냐는 물음에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정확히 답했다. 어떻게 그렇게 또렷하게 사랑하지 않아 라고 말할 수 있었는지 나도 나 스스로에게 놀랐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나는 나라는 인간에게도 희망이 있구나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여자는 또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