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죽이는 방법 41가지 - 여자3

by 전찬준

슬리퍼를 신은 발등이 따꼼해서 가까이 봤더니, 바알간 진드기가 피를 빨고 있다. 그 조그만 벌레가 주는 실제적 고통과 내 시각 사이에는 어딘가 붕뜬데가 있다. 그 틈을 뭉게 버리려는 듯, 나는 엄지로 진드기를 짓이긴다. 그리고 군데군데 불똥이 튀어 구멍이 난 간이 의자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다시 가을 볕을 쬔다. 담 너머로 귤이 차츰 익어가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곧, 다시 귤밭에 일을 하러 나가야한다는 신호다. 귤밭에 일을 나간지도 벌써 5년 째다. 여자를 처음 만나고, 딱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귤을 따는 일이 체험쯤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체험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한두시간이다. 일당을 받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 일을 해야한다. 그리고, 귤밭에 나간 남정네가 귤을 따는 일은 없다. 손빠른 할매들이 귤을 따 놓으면, 귤이 가득 찬 20kg짜리 콘테이너를 수레에 실어 부지런히 귤창고로 옮겨야 한다. 일이 제법 고되다고 다들 생각하는지 귤밭에 나가면 새참 시간이 아침과 점심 사이, 그리고 점심과 일 마무리하는 시간 사이에 두번이다. 섬 할매들과 섞여서 별로 할 이야기도 없고, 그 언어들은 영어보다 알아듣기 어렵기 때문에 멀찌감치 가서 담배를 태우며 휴식을 취한다. 휴식을 취할 때면, 일하는 중에는 느끼지 못하는 숲의 고요가 느껴지고, 잠시 후 여러 새소리가 들려온다. 귤나무 가지 사이에 부리가 내 검지만한 새가 앉아 귤을 파먹고 있다. 그리고 가끔 주변을 살피며, 목마른 비명을 질러댄다. 입을 많이 벌리지 않는데도 그 소리는 꽤 큰 음량으로 내 정신을 깨운다. 쉬는 시간 끝났다 얼른 일해! 귤 따는 일은 겨울일이라, 다들 몸과 얼굴을 꽁꽁 싸멘 채 삼삼 오오 나무에 붙어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면서 일하기 때문에 나는 일꾼들의 얼굴을 확인할 새가 없다. 그저 사람보다 채워진 콘테이너를 부지런히 쫓아다니는 것이 내 일이다. 내가 유일하게 일꾼들의 얼굴을 확인할 때는 일이 다 끝나고 일당을 받을 때다. 그때나 되서야 다들 허리를 펴고, 챙모자도 벗고, 장갑도 벗고, 가위도 손에서 놓는다. 귤밭에 나간지 2년 째부터, 그 여자가 일당을 주기 시작했다. 늘 일당을 주던 인상좋은 노인이, 하긴 그 노인은 담배를 입에 문채 다음 담배에 불을 붙여 검지에 끼워두곤 했다, 건강이 별로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일꾼들 사이에서 들었다. 최씨! 하고 부르는 소리에 달려 갔더니, 얼굴이 바알간 여자가 수고했수다라면서 흰 봉투를 건넸다. 3년 째부터는 딱히 파스값이 들지 않았다.


귤밭이 집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귤밭으로 일꾼들을 실어 나르는 트럭이나 승합차를 타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 그날은 출근길에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 시골길의 포장은 명함만 목수인 자가 만들어놓은 가구처럼 엉성해서,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어느 틈새에 덜컥하고 뒷바퀴가 걸려 튜브가 텨져 버리고 만다. 털레털레 자전거를 끌고 가는데, 일꾼들을 실은 트럭이 지나간다. 일당주는 여자가 운전을 하고 있다. 일이 끝나고, 역시 자전거를 끌고 가는데, 이번에는 뒤에서 빵한다. 돌아보니, 트럭이다. 나는 괜찮다고 손사레를 쳤지만, 공간이 충분하니 자전거를 싣고 얼른 타라고 한다. 더 지체하다가는 할매들의 타박을 들을 것 같아서, 자전거를 싣고, 트럭 한구석에 구겨지듯 앉았다. 덜컹거리며 트럭은 아주 천천히 앞으로 갔다. 할매들은 뭐가 즐거운지 여전히 몇년이 지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떠들며, 다들 깔깔대고 있다. 딱 중학교 때, 영수학원 하교길의 승합차 안 같은 분위기다. 성비는 같았지만, 나는 그때처럼 얼굴이 화끈거리지는 않았다. 나는 나대로 생각에 잠겼다. 해는 어느새 서쪽 수평선에 잠겨 있었고, 주변이 조용해져 고개를 드니, 할매들은 다 떠나고, 우리집 앞에 트럭이 섰다. 여자가 운전석에서 내리더니 자전거 내리는 것을 도와준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예의상이었던 것 같다, 나는 여자가 당연히 아 가봐야 됩니다라고 할 줄 알고, 커피나 한잔 하고 가시지요?라고 말했는데, 여자는 알겠다고 하고 차를 돌담에 바싹 붙였다.


집에 들어와서 여자는 약간 놀란 눈치다. 나도 모자를 벗고 목토시도 벗은 여자의 온전한 얼굴을 처음 대했다. 건강해보였다. 저녁이 가까운데 커피 괜찮냐는 물음에 뭐든 상관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점심 이후에는 커피를 못 마신다. 잠을 반납할 생각이 아니라면 마시지 않는다. 그라인더에 커피를 굵은 소금 크기보다 약간 가늘게 간다. 커피를 갈 때 나는 향이 커피를 마실 때 나는 향보다 훨씬 좋다. 커피를 갈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더 좋은 향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물이 잘 빠지는 드리퍼를 골라잡고, 필터를 뜨거운 물로 적신다. 간 원두를 털어넣고, 손으로 드리퍼 가장자리를 탁탁쳐 커피의 표면을 고르게 한다. 그리고 2분 30초 동안 커피를 정성스레 내린다. 나는 온도계와 타이머를 꼭 사용한다. 이 세상에서 어떤 순간만이라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두가지. 시간과 온도. 여자가 약간 의외라는 듯이, 신기하다는 듯이, 평소에는 보기 힘든 야생동물의 자태를 몰래 엿보듯이 나를 보는 시선이 싫지 않다. 나는 노루가 적을 가까이 두고도 여전히 여유롭게 풀을 뜯듯, 모른 체하고, 커피를 내리는 데 집중한다. 가장자리가 가늘고 양각으로 장미가 그려진 하얀 잔에 커피를 낸다. 여자는 내가 커피를 여자 앞에 내려놓자마자, 얼른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는다. 향은 맡았을까? 나는 잔 위에 비쳐서 일그러지고 펴지기를 반복하는 전구를 멍하니 바라보고, 여자는 나를 바라본다.


으엉, 찌익, 그 때 고양이 녀석이 앞발로 문틀을 긁으며 문을 열어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타이밍에 있어서는 인간보다 고양이가 늘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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