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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정수 Feb 09. 2024

글과 말이 잔치가 되면 안 된다

(부제; 스스로 '육위일체'를 이루어라!)


 글이 글 잔치가 되면 안 되고, 말이 말 잔치가 되어도 안 된다!     


 우리는 살아가며, 어떤 형태로든 참으로 많은 글을 쓰고, 많은 말을 하고, 많은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런데, 글이 글 잔치가 되면 안 될 것이고, 말이 말 잔치가 되어서도 결코 안 될 것이다.     


 그러려면, ‘언중유골’이라고 했던가?

 글과 말의 뼛속까지 잘 이해를 해 보는 것이 좋겠다.

 그 글과 말의 느낌과 암시하는 복선까지도 제대로 이해하려 해 보면 좋겠다.

 네 손에 꽉 잡힌 듯, 네 뇌리에 꽂힌 듯, 미래가 훤히 내다보이듯, 확실한 의미와 암시를 잘 알아채려 해 보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언행일치’라고 했던가?

 아니, ‘지행합일’이라고 했던가?

 가히, 그 앞뒤에 ‘위선’이 없어야 하겠다.

 또한, ‘실천궁행’이라고 했던가?

 행동과 실천이 잘 뒤따라, 당신의 글과 말의 완결을 제대로 지을 수 있어야 하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글이나 말은 또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바로 마음과 생각으로부터 온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글과 말이 반듯하려면, 근본적으로 사람의 마음과 생각부터 반듯해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글과 말과 행동이 시간상으로 일관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어제 쓴 글이 다르고, 오늘 쓴 글이 또 다르다면, 그래서 의미상 혹은 주장하는바, 서로 통하지 못하고 상충하 기만한다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한다는 말인가?     


 어제 한 말이 다르고, 오늘 한 말이 또 다르다면, 과연 그의 말을 어떻게 보아야 한다는 말인가?

 누군가가 어제는 이래야 한다고 하다가, 오늘은 저래야 한다고 한다면, 과연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어제 한 행동과 오늘 한 행동이 도무지 의미상 일치되지를 못하고, 따로따로 해석된다면, 도대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당신이 진정 제대로 된 성품, 품격과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른바, 마음과 생각과 글과 말과 행동, 그리고 시간(일관성)까지 의미상 모두 “육위일체”가 되어야 마땅하겠다.  

   

 물론 세상일이라는 것이, 워낙 복잡다단하기에 짝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일이나 문제에 대해, 조건을 달리하거나, 관점을 달리하거나, 작전이나 전략 등이 바뀌었다는 전제하에서는, 얼마든지 자기 입장이 변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동일한 건에 대해, 자기가 표현하는 글이나 말마저도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그 어떤 일이나 문제를 대하는 태도나 심리, 맥락, 사상 혹은 자기 철학 등이 확 변하는 경우는 없어야 하겠다.

 그래서 당신의 친구들이 당신의 인품에 대해 의심마저 들게 하여서는 결코 안 되겠다.    


“화려한 글 잔치, 말 잔치를 하지 말아라!”(그림;.nytimes.com/wirecutter/reviews)



 우리가 항상 마음과 생각을 반듯하고 정직하게 하여야, 글과 말이 논리적이고 명료해서 매우 산뜻할 수 있을 것이며, 글과 말이 이렇게 논리적이고 명료하다면, 결국 행동 또한 반듯하고 일관성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거꾸로, 행동이 엉터리에 가깝거나 일관성이 없다면, 분명히 그의 글이나 말이 ‘어불성설’에 가깝거나, 매우 앞뒤가 맞지 않을 것이며, 과연 그의 글과 말이 그러하다면, 그의 마음이나 생각 또한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온통 혼동의 상태이기 쉬울 것이니, 반드시 여러 스스로의 학습과 명상, 각성 등을 통해 자기 마음과 생각을 차분히 다시 재정립해 보아야 하겠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엉터리 마음은 엉뚱한 결과를 낳고,

 반듯하지 못한 생각은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낳고,

 명료하지 못한 글은 앞뒤가 맞지 않아, 온통 난맥상과 난립상을 낳고,

 허튼 말은 매우 어지러운 난국 혹은 파국을 낳게 될 수 있으며,

 언행 불일치의 행동 또한, 일관성 없는 삶의 부조화를 자처하게 될 것이 매우 자명하다고 하겠다.     


 흔히 많이 인용하는 속담 중에 “바느질할 때, 바늘을 바늘허리에 매어서는 결코 바느질할 수가 없고, 반드시 바늘귀에 실을 넣고 바느질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매우 큰 일까지, 그 논리적 순서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즉, 어떠한 일에 임해서도, 항상 자기 마음가짐이나 생각부터 올바르게 하고, 그다음이 글과 말로 논리 있게 표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시종일관 좋은 실천이 뒤따라야, 마음먹은 작은 하나라도 완결 지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야, 그가 행하는 대부분의 글과 말에서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고, 타인에게 감정적인 어필도 잘할 수 있을 것이고, 이성적 혹은 감성인 내용 전달도 잘 되어, 결국 자신의 고귀한 마음과 생각이 자기 삶의 여정 속에 제대로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만약 자기 알량한 욕심이나 잇속으로, 어떤 일의 결과만을 잘 만들어내기 위해서, 별생각 없이 혹은 꿍꿍이 속마음으로 무슨 일을 꾸미려 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글이나 말과 행동은 그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고, 결국은 상호 모순이 점점 커져서, 그 결과도 나쁘게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글과 말을 아무리 유창하고 멋지게 한다고 하여도, 그것만으로는 결코 일의 완결 혹은 완성을 의미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느 아주 작은 일에 대한 완결 혹은 완성이라는 말조차도, 항상 스스로 언행일치가 잘 되어 글이나 말이 실천으로 잘 옮겨졌고, 그 실천이 시간상으로 일관성까지 잘 갖추었고, 타인들의 뇌리 속에 ‘당신=OK’라는 느낌을 확실히 줄 수 있을 때나 사용 가능한 용어일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우리에게 제법 많이 알려진 이야기 중, 그 비근한 예를 한번 찾아보자.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아주 이상하고도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세상은 자기와 같이 잘난 영웅들과 못난 자들로 양분되어 있고, 자기는 전자에 속하니, 자기보다 못나고 약해 빠진 인간들을 얼마든지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무자비하게 죽이고, 그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된 그 노파의 이복 여동생마저도 죽여버린다.


 이후 라스콜니코프는 매춘부 출신인 소냐를 알게 되고, 서로 가까이 지내게 된다. 

 처음에는 자수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나, 소냐의 끈질긴 권고로 드디어 경찰서로 가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시베리아 감옥으로 향하게 되며, 거기에서 시간이 제법 많이 흐른 뒤에, 소냐의 눈물겨운 희생적 사랑으로 진정한 속죄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라스콜니코프의 무서운 위선”(그림;.bing.com/images)


         

 이처럼, 라스콜니코프는 아주 엉뚱한 마음을 먹고, 아주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게 됨으로써,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되고 마는 것이겠다.

 즉, 그의 마음과 생각 자체에 문제가 많았으니, 그 행동이나 결과가 가히 좋게 나올 수 없었으리라. 

 결국 그는, 나중에 속죄의 길로 접어들기는 하였으나, 죄 없는 노파와 그녀 여동생의 소중한 목숨은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것이겠다.    

 

 다음 이야기로, 한 여인이 자기 자녀가 단 음식을 너무 좋아해서 걱정이라며, 간디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 아이가 단것을 너무 좋아해서 걱정입니다.

       입속에 이가 거의 다 썩었습니다.

       제발 단것을 좀 먹지 못하도록, 잘 타일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아무리 말해도, 도무지 말을 안 듣습니다요.”     


 간디는 잠시 생각 후, 일주일 뒤에 다시 오라고 한다.

 이에, 다시 일주일 후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온다.

 이때 간디는 이렇게만 말한다. 

    

     “얘야! 단것은 몸에 해로우니, 많이 먹지 않도록 해라”    

 

 이에 여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 이렇게 간단한 말씀이라면, 지난번 왔을 때 말씀해 주셔도 되지 않았나요?”     

 

 이에 간디가 말한다. 

    

     “그때는 나도 설탕과 같은 단것을 즐기고 있었거든요!

       자고로 ‘말의 힘’이라는 것은 자신의 삶과 말이 일치할 때에만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간디는 자기도 실천 못 하는 일을 남에게 하라고 말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 것이다.

 즉, 자기도 단 설탕을 즐기고 있는 마당에, 그 자문을 구하러 찾아온 여인과 아이에게 도저히 “단 것은 몸에 해로우니, 먹지 마세요!”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스스로 ‘육위일체’를 이루어라!”(그림; fullfocusplanner.com)

              

 결론적으로,

 네 안에도, 네 바깥에도,

 ‘육위일체’를 만들어라.

 마음과 생각과 글과 말과 행동, 그리고 시간(일관성)까지 모두 상호 모순이 없도록 “육위일체”를 만들어라.

 모호한 글로 타인을 현혹하지 말아라.

 꾸며낸 말로 타인을 혹세무민 하지 말아라. 

 얕은 수로 타인을 기망하고, 당신 스스로마저도 속이지 말아라!     


 우리 주변을 가만히 둘러보면, 심적으로 많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내공이 얕은 사람일수록, 거짓이나 위선이 많은 사람일수록, 말이 많아지고, 모든 것이 매우 번잡해지며, “육위일체”는커녕, ‘언행일치’조차도 잘 못 한다. 

 이들은, 일관성은 말할 것도 없으며, 도대체 그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그렇다!

 우리가 무엇이든 화려하게 치장하려 하고, 유창하게 말하려 하고, 멋지게 행동하려 하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꼭 챙겨야 할 것이 있다.

 이것이 없으면 그 모든 것이 사상누각일 것이며, 당신의 그 어떤 영화도 그리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바로, 자기 마음가짐에부터 생각, 글, 말, 행동, 일관성까지 모두 하나의 선상에 놓이게 하고, 아주 단출하면서도 조리 있게 정리해 내는 일일 것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로봇, AI, 메타버스, 빅 데이터 등으로 인해, 온갖 복잡한 것들이 많고, 이리저리 혼돈이 많고, 겨우겨우 따라가기조차 힘들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바로, 유창하고 화려한 글이나 말의 잔치가 아닌, 잘나고 대단한 행동의 잔치가 아닌, 아주 단출하면서도 반듯하게 정리된 ‘육위일체’일 것이다.

 그래야, 온통 유혹과 미혹이 많이 넘쳐나도, 아무리 많은 혼돈과 무질서가 몰려오더라도, 과연 흔들림 없는 기세로 자기 생(生)을 잘 관통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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