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것에도 메이지 않는 홀연한 무비공의 마음을 가져라!
어느 날 경허 스님이 전염병이 창궐하는 천안 지역을 지나다가 갑자기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꼈다. 문득 “그동안 생사를 벗어나는 방법을 중생들에게 많이 설교하고 가르쳤지만, 내가 직접 막상 죽어가는 사람을 보니 스스로 겁먹고 있음을 느끼겠고, 정작 나 자신은 생사의 문제에 허덕이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라고 생각되어진 것이다.
이후 스님은 동학사에 돌아와서 모든 대중에게 그동안 내가 설법한 소리는 모두 허튼소리라고 고백을 한 뒤, 문을 걸어 잠그고 도(道)와 참선에만 정진했다.
어느 날 사미(어린 승려)가 마을에 내려갔다가 어떤 다른 스님으로부터 무비공(無鼻孔; 콧구멍이 없다)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고 경허 스님께 돌아와서 여쭈었다. 경허 스님이 이 소리를 듣자마자 확철대오(크게 깨달음)를 하고, 아래의 시를 읊었다고 한다.
“홀연히 무비공(콧구멍 없다)이라는 말을 듣고,
비로소 삼천세계가 다 내 집임을 문득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누가 태평가를 부르는구나!
~ (후략)”
위의 시는 정확하게 딱 정해진 해석이 아직 없는 것 같다. 즉, 해석하는 사람마다 모두 뉘앙스가 다른 것 같으니, 내 나름대로, 기존 해석들을 참조하여 위 시를 해석해 본다면, 우선 무비공(콧구멍 없다)은 곧 “콧구멍 없는 소는 코뚜레에 매이어 구속되는 일이 없을 것이니, 그 몸이 자유로워진다.”라는 의미로 생각해볼 수 있으므로, “홀연히 무비공(몸과 마음이 모두 죽음과 세상 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짐)을 알게 되어 비로소 삼천세계(세상천지)가 모두 내 집과 같이 느껴진다. 이제 도(道)를 알게 되니 6월 연암산 아랫길에서 태평가를 부르고 싶을 정도로 기쁘구나!”라고 해석을 한번 해볼 수 있겠다.
위의 시에서도 보듯이, 세상에는 인간을 구속하는 여러 틀(관습, 제도, 규율, 법, 우상, 타인의 눈치 등)이 있다. 각 개인이 이것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사실 그러려면 공자와 같은 현인이 되어야 한다. 공자는 고희(칠순)에 뜻대로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이치에 어긋남이 없었다(從心이라고 함)고 말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기존의 틀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고 하여도, 의지적으로 노력하고 실천을 한다면, 최소한 기존의 틀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나름 자기 방식대로의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요즘 귀농하여 농촌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자신만의 방식대로 시도해보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 중에서 일부는 나름 성공하여 유튜브 등에 성공 사례를 올리기도 하는 것을 보았다. 앞으로의 시대는 과거와 달리 연봉을 많이 준다고 회사에 얽매이거나, 대우가 좋다고 해서 하기 싫은 일에 끝까지 종사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하고픈 생활을 위해서 과감히 도전해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이는 예전처럼 사회적 관습 등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그야말로 개성과 자아를 중시하는 삶을 쫓는 좋은 방식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 보통은 남이 하는 방식대로 쫓아서, 남들과 거의 비슷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이것을 이른바 ‘추종본능’이라고도 한다. 남의 눈치를 보아가며 손해 보지 않고 뒤처지지 않는 수준에서 나의 기회를 항상 엿보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보다는, 경허스님의 ‘무비공’의 삶에서 살펴보았듯이, 자신만의 자유롭고 개성 있는 삶의 방식, 기존의 사회적 틀에 구애받지 않고 홀연히 심적으로 꽂히는 뭔가에 과감히 도전해보는 삶의 방식, 자신의 사회적 진정한 가치를 발견해내고 그것에 과감히 도전하고 실행해보는 삶의 방식 등이 더욱 소중하고 필요하다고 한번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