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감시와 견제와 비판의 눈초리보다는 응원과 박수가 앞서야 한다
화백(和白) 제도는 우리 고대 신라에서 나라의 중대사와 규율을 의논하던 귀족 회의 제도이며, 전통적인 공동체 사회의 유제(遺制)로서 나라의 중대 사건이 있어야만 회의를 개최하였고, 회의의 참석자는 보통 백성이 아닌 지도층인 백관(百官)들이었다.
이 회의의 가장 큰 특징은 회의에서 한 사람의 반대라도 있으면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만장일치제’이었다는 점과, 그 회의 장소가 4영지(四靈地)로서 매우 신성한 장소(비공개된 산악)이란 점이다.
아무튼 이러한 제도는 신라 귀족의 단결을 굳게 하고, 국왕과 귀족 간의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 일례로 진지왕은 음란 및 방탕한 정치를 하다가 화백회의를 통해 폐위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제도 또한 협의와 합의를 중시하는 민주적 방식이라 볼 수 있으나,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때는 이러한 방식으로 의견의 일치를 본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한 사람의 방해만 있어도 결론을 낼 수가 없을 것이고, 그 결론을 도출하는 절차 또한 매우 느리게 진행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화백제도를 통해 당시와 같은 삼국의 치열한 대결의 시대에 지도층 의사의 총화를 이룰 수 있었고, 군사, 외교 등에 공동 대응이나 시너지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물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김춘추와 같은 탁월한 외교관, 김유신과 같은 명장, 강수와 같은 문장가 등의 뛰어난 인적 자원이 있었고, 화랑도와 같은 군율(율법)이 있었던 영향도 컸지만, 무엇보다 주효했던 것은 나라 안의 정치적 지도력의 총화, 국력의 단결화 등을 이루어 낸 화백제도였던 것 같다.
물론 화백과 같은 만장일치 제도는 오늘날에 쉽게 적용할 수 있는 제도는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그 시너지가 대단하였던 것 같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등의 기록으로 보면, 이 제도는 왕에 대한 견제력으로도 충분히 작동하였으므로, 그 의미가 오늘날 3권분립을 기초로한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씨름하는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주기도 한다.
우리나라나 선진국들의 오늘날 민주주의는 대부분 다수결의 원칙을 기본으로 작동되어진다. 그러나 다수결이라는 것은 합리적이고 빠른 의사결정 등의 면에서는 좋지만, 많은 단점도 가지고 있다. 지나치게 모든 결정을 다수결의 원칙으로 결정하다 보면, 정치 세력 간 파워(힘)와 숫자의 논리가 지나치게 작동하고, 패거리 정치, 공작정치 등이 횡행할 수 있어, 귀중한 합의정신 문화나, 자칫 민주주의에서 정말 중요시되는 약자에 대한 보호, 소수 집단에 대한 보호 등의 면에서는 많이 소홀해지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수결 원칙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대책을 견실히 마련하는 것이 필요한데, 우리 사회는 아직 이런 부분에서는 많이 부족한 듯하다. 가령, 소수 의견에 대한 충실한 기록 보존과 투명한 공개, 소수 의견의 지분도 어느 정도 보장되는 제도의 보완 등이 필요하다. 즉, 지나친 ‘승자 독식’의 문화는 지양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만장일치나 총의(consensus) 같은 것도 필요한 곳에는 부분적으로라도 도입이 필요하다. 가령 예를 들어, 외교적으로 혹은 대외적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해야 하는 결정이나, 큰 공동체의 공동 이익을 모색한다든지, 비영리단체의 의사결정 등에서는 이러한 방법들이 아주 유용하게 사용될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방법들은 한 명이 회의에 훼방을 놓으면 그 의견은 부결이 되기 때문에 도입하기에 부담이 큰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한 명 혹은 두 명의 반대는 가결로 본다.”라는 등의 절충적 의결 방법으로, 혹은 “총의에 이르지 못한 경우, 건별 정해진 일정 숙의 기간과 합의 조정기간을 거쳐 다수결을 적용한다”라는 등의 보완적 의결 방법으로 충분히 유효하게 적용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법은 분명, 대의적 단합이나 큰 캠페인의 모티브를 제공해주는 제도가 충분히 되어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사회 혹은 시민사회의 제도라는 것은 사회 전반에 따스한 체온이 감돌아야 비로소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제대로 실천되는 선진사회라고 할 것이다. 또한, 신라의 화백제도에서처럼 쓸데없는 국력 소모의 최소화, 진영 논리를 탈피한 양보의 정신, 국민적 힘과 마음의 총화 등을 달성할 수 있는 방향으로 여러 제도가 지속적으로 개선되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신라 통일의 비법은 의외로, 최고의 의결기관이자 단합과 공정의 대명사였던 화백회의에 있었던 것이다!” - Pa sayings
이 화백제도는 진평왕의 후사로 성골 남성이 없자, 덕만공주를 왕으로 추대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임금인 선덕여왕을 탄생시켰으며, 이렇게 선출된 선덕여왕은 또 무관으로는 알천과 김유신을, 문관(외교관)으로는 김춘추를 등용하였고, 전국 각지에 관리들을 파견하여 고아, 노인, 홀로된 자 등 어려운 처지의 백성들을 돕게 하였고, 특히 80미터 높이의 웅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이 탑을 9층으로 만든 뜻은 이웃에 있는 9적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임)을 세워 전국 어디에서도 이를 쳐다볼 수 있게 하고, 국민적 단합을 도모하여 신라 통일의 실질적인 초석을 다질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화백제도의 공적은, 당시의 시각으로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으며, 오늘날 민주주의를 자랑하는 우리들을 참으로 부끄럽게 만든다.
우리가 남북통일을 진정 원하거나, 우리의 어떤 큰 성취를 원하거나, 공동체적 큰 이익을 원한다면, 반드시 이러한 힘과 마음의 총화를 잘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며, 이는 그동안 유난히 고생과 역경이 많았던 우리의 역사라는 인격 속에서 오늘을 책임진 우리에게 주어진 필연적 숙제이기도 할 것이다.
분명 감시와 견제와 비판의 눈초리보다는 응원과 박수가 앞서야 합당할 것이고, 이는 공동체적 혹은 인간적으로도 당연히 추구해야 할 도리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