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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우리 오래가자! 중간에 헤어지기 없기야!"

by 김듀키 Mar 1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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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지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은 중개사도, 할아버지도 아니다. 이 집이 정말 문제가 있는 집이 아닐까, 의심하고 경계를 하면서도 어느새 이 집과의 계약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나 자신이었다. 그래, 나도 이 더위에, 서울의 월세에, 지쳤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싶어졌다.




할아버지가 도장을 가지러 집에 올라간 사이, 계약이 확정된 탓인지 중개사는 부쩍 친근하게 말을 붙여왔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말을 바꿀 수도 있으니, 본인이 계약서에 확실히 월세와 관리비 조건을 써주겠다, 자기 말 듣고 와보길 잘하지 않았냐며 수다를 떨어댔다.


“할아버지 엄청 정정해 보이시죠?”


“네. 허리도 꼿꼿하시고.”


“연세 들으면 깜짝 놀라실걸요? 올해 아흔넷이세요.”


우와, 소리가 절로 나왔다. 단순히 허리가 굽지 않아서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생명력 넘치는 얼굴과 태도가 믿기지 않았다. 아흔넷이라는 연세와 매치가 되지 않았다.


“저 연세에 저렇게 건강한 것도 복인데, 공무원 생활만 30년 넘게 하셔서 연금도 따박따박 나오지, 부동산은 어떻고요. 완전 대박을 치셨지. 이 건물이 얼만지 아세요?”


“글쎄요… 한 10억쯤 하나요?”


“진짜 서울 집값 모르시네. 이 건물이요, 자그마치!”


“50억!”


어느새 도장을 가지고 내려온 할아버지가 다섯 손가락을 펴 보이며 해맑게 50억이라고 말씀하신다. 내 얼굴이 낯익다고 하셨는데, 건물값을 들으니 이 세계에서는 낯을 익힐 계기가 없는 분 같다. 저런 부자가 내 곁에 있는 것은 ‘집주인님’ 일 때 말고는 없지 않을까?


“어르신, 이 집터를 평당 3만 원에 사신 거죠?”


“응, 맞아.”


“친구분이 권유해서 산 거 맞죠? 진짜 그 친구가 귀인이다! 그때는 지하철도 없고 여기 죄~ 풀밖에 없는 땅이었잖아요.”


“그렇지. 그땐 풀이 이 무릎까지 오고 말이야. 지금 지하철 다니는 곳은 개울이 흘러서 뭔 이런 땅에 지하철이 들어오냐고~ 안 믿었다고. 그때 걔 말 듣고 지하철 바로 앞에 땅을 샀으면 진짜 부자 됐을 건데!”


부동산으로 계약서를 쓰러 가며 들은 ‘평당 3만 원짜리 땅이 50억짜리 건물이 된 기적’은 놀랍지도 않았다. 역시 인맥 만만세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아무런 기적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동안, 나는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내가 내 인생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 여기게 됐으니까. 누군가에게 내 빽이 되어달라고 구걸조차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내 인생 최대 빌런이라고.


“이야~ 이름 좋다! 명진명… 가만있자, 이거 한자가 밝을 명에 보배 진, 볼 명 맞나?”


“아, 예예.”


한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요즘은 많지 않다 보니, 할아버지가 읽어 내려가는 내 이름 뜻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밝고 진귀한 것을 어두운 데서도 보라고 온 집안 어른들이 모여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지어주신 이름.


다른 사람도 그런진 모르겠지만 나에게 이름은, 나에게 없는 것이다. 어릴 때 옆집 살던 지혜란 아이가 지혜란 이름이 무색하게 지혜롭지는 못했던 것처럼. 나도 그렇다. 밝고 진귀한 것을 발견하기는커녕, 코 앞에 절벽이 있는지 없는지 더듬거려도 알지 못하는 깜깜함을 살고 있다.


“명군~ 우리 오래가자! 중간에 헤어지기 없기야!”


할아버지는 이제 막 시작한 연인처럼, 이별은 감히 끼어들지도 못할 설렘 가득한 얼굴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거기에 내 지장까지 더해지니, 이젠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계약금이 아무리 작아도, 소중해서 날릴 순 없으니까.


그때까지도 나는 소박한 기적만을 바랐다. 제발, 천장의 그 커피색 물 자국이 누수가 아니게 해주세요, 2년의 계약 기간을 버티지 못하고 도망가고 싶은 집만 아니게 해주세요.


밝고 진귀한 빛이 바로 내 코 앞에서 새어 나오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렇게 소박한 소망만을 되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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