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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다. 알람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눈을 뜬다. 저녁에 아무리 몸을 피곤하게 만들고 잠에 들어도 알람이 울릴 때까지 버티질 못하고 눈을 뜬다.
24시간 잠들지 않는 시끄러운 지구 속에서 갑자기 모든 소음이 사라진 듯한 느낌. 그 적막에 놀라 잠에서 깬다는 기분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알람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기분은 비참하다. 현실에서 나를 깨워주기를 기다리다 지쳐 결국, 울음을 터뜨린다. 알람이 울리지 않을까 두렵다. 내가, 이 현실에 살고 있지 않을까 두렵다.
어제 이사를 해서, 환경이 낯설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벌써 한 달도 넘게 알람보다 일찍 잠에서 깨고 있다.
그래, 모든 건 결국 스스로 현실이 불안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른세 살이라는 나이가 성공하기엔 늦었다거나, 늙은 것 같다는 불안이 아니다. 마흔에도 예순에도 ‘나’는 해내지 못할 것 같다는 좌절감. 되는 나보다 무얼 해도 되지 않는 내가 익숙하다는 생각을 한 순간부터 나는, 이쯤에서 꿈을 포기하는 게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포기는 너무 오랫동안 바라왔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막상 포기를 떠올렸을 때 들었던 좌절감은 평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토할 것 같은 두려움과 막막함이 잠든 순간까지도 나를 꿈조차 꾸지 못하게 현실로 떠밀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도대체 뭘까?
아침부터 눈물을 쏟은 탓인지 멍하다. 눈동자를 굴려 익숙하지 않은 새집을 둘러본다. 원룸에선 매우 큰 평수지만, 집이 한눈에 담기는 것은 4평이나 9평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옵션으로 있던 장롱을 옮기고 나서야 벽지 무늬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상아빛인 것은 같지만, 무늬는 제각각이다. 도배를 할 때마다 남은 벽지가 아까워 모아뒀다 급할 때마다 땜빵을 해온 모양새다. 조각조각 일치하지 않는 벽지 무늬를 바라보며, 이 집을 거쳐 갔던 삶들이 덕지덕지 발려 있구나, 생각했다.
[삐비비 – 삐비비 – 삐비비비-]
이제야 알람이 울린다. 알람을 끄고 나니 오늘도 어김없이 알바 문자가 도착했다.
[나무산업입니다. 오늘 아르바이트 가능하신 분은 문자 주세요. 필요 인원 20명. 선착순 마감합니다.]
오늘은 아르바이트할 수 없는 날이지만 답장을 한다. 벌써 2년째 단기 알바를 하는 곳이다 보니 언제부턴가 예의상 문자를 남기게 된다. 정규직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작곡에 집중하기 위해 단기 알바를 유지하기로 했다.
약속 시간이 오후라 오전만이라도 아르바이트를 나가겠다고 할까, 고민도 했지만, 동훈 형에게 컨펌받기 전까지 최대한 수정을 해보려고 깔끔하게 출근을 포기했다. 하루 일당을 포기할 만큼 자신 있는 곡은 아니지만, 정성 들이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
“하…”
또 심장이 뛴다. 내 심장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30년이 넘도록 이 박동수에 적응할 수가 없다. 평생을 함께한 ‘내 심장’인데 늘 불편하다. 늘 불쾌하다. 정말 토할 것처럼 뛴다. 병원에 가서 검사도 받아봤지만, 그때마다 엑스레이 검사 결과도 좋고, 청진기로 들리는 심장 소리도 너무 깨끗하다고만 한다. 의사 선생님은 평소에 긴장을 많이 한다면 이해가 가는 박동수라고만 한다.
심장 부위를 주먹으로 퍽퍽 친다. 네가 날 불편하게 한다면, 나도 네가 얼마나 불편한지 알려주겠다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다가 놀라 자빠질 뻔했다.
“엄맠!!!!!”
인자한 미소의 주인 할아버지가 나를 반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군…!!”
“아…! 안녕하세요. 아침부터 어… 어쩐 일이세요?
“응, 어쩐 일은 아니고 집에 올라가다 문소리가 나서 인사나 하려고.”
왠지 믿을 수가 없다. 처음부터 의도를 가지고 쭉 기다린 느낌이 나는데요...? 게다가 주인 할아버지와 굉장히 인상이 비슷한 할아버지가 쌍둥이처럼 서서 나를 훑어보고 있었다. 철저히 의도를 가지고 저를 기다린 냄새가 나는데요…?
“여기가 이번에 201호에 들어왔다는 명진명이?”
“아, 안녕하세요. 명진명입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명군! 여기는 내 친구야. 친구야 우리 명군! 인상 참 좋지?”
“인물은… 우리 201호가 더 나은 것 같은디?”
친구분도 건물주인가 보다. 본인 건물 201호 세입자 인물이 더 낫다고 편드는 걸 보니. 따박따박 월세가 나오는 노년은 어떤 기분일까?
“명군! 옥상에 할아버지가 헬스장을 멋지게 만들어놨걸랑? 아무한테나 개방 안 하는데 명군은 몸 만들고 싶으면 언제든 올라와서 해. 이 할아버지 건강 비결이 운동이야. 참고로 할아버지는 아침 7시, 저녁 6시에 운동을 하니까 이 할아버지 건강 비법을 알고 싶으면 시간 맞춰서 오라고!”
“그래. 우리처럼 건강해지려면 운동은 꾸준히야. 그렇고말고.”
매우 진지한 목소리로 할아버지 친구분이 맞장구를 친다. 네, 덕분에 절대 가면 안 될 시간을 체크했습니다. 아침 7시, 저녁 6시엔 옥상에 가지 말 것.
서울살이 13년으로 깨달은 것. 자주 마주치지 않는 주인님이 좋은 주인님. 집에 문제가 생겼을 때 곧장 전문가를 불러주는 주인님이 좋은 주인님. 같은 건물에 살며, 문제가 생겼을 때 내가 직접 해결해 주겠다는 주인님은 아무리 좋아도 피하고 싶은 주인님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단 한 번도 맥가이버 같은 주인님을 만나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슬프게도 이사 1일 차에 이번 주인님은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똑똑똑-]
“202호! 총각! 벌써 나갔나?”
할아버지는 어느새 옆집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교류를… 좋아… 하는 분인 걸까? 내향형 인간으로서 이게 주인님의 아침 점호면 어쩌지, 두려워진다.
“참, 202호 얼굴 보기가 힘드네. 명군! 출근 잘하고 저녁에 봐. 아참, 퇴근하고 집엔 보통 몇 시쯤에 와?”
“제… 제가! 출퇴근이 불분명해서요… 하하… 항상 제각각이라 확실히 말씀을 드리기가…”
역시, 내향인의 방어력은 생각을 거치지 않는다.
“그래? 어째 우리 건물 사는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출퇴근 시간이 정확하지 않은지. 젊어서 고생이구만! 그럼, 명군 출근 잘해! 할아버지 이만 간다!”
정말 아흔넷이라는 연세가 믿기지 않는다. 할아버지와 친구분은 까치처럼 뒷짐을 지고서 통통통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셨다.
나는 저 나이까지 건강할 수 있을까? 아니, 아흔넷에 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나 있을까?
꼿꼿한 저 허리도 부자라 가능한 것 같다는 자본주의 만만세에 갇혀 밖으로 나가려는데, 소머즈도 듣지 못할 문소리를 내며 202호가 고개를 쏙 내민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