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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드라마틱"

by 김듀키 Mar 19. 2025

내가 의아한 소리를 내자 202호가 손으로 쉿! 하라는 손짓을 한다. 그리고 밖에서 잠깐 보자는 제스처를 한다.




202호는 건물을 벗어나고도 거의 지하철역에 다다라서야 걸음을 멈추고 내게 말을 걸었다. 


“어제 이사 오신 거죠?” 


“아, 네. 근데 왜…” 


202호는 나를 흘끗 훑어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주인 할아버지 어떻게 생각하세요?” 


다짜고짜? 


“네? 뭐… 아주 많이 외향적인 분?” 


202호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답답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본다. 솔직히 202호의 질문 의도는 뻔히 간파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피곤한 타입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초면에 대뜸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그쪽도 내 타입은 아닌데?  


“할아버지요, 호구 수집가세요. 이야기 너무 받아주지 마세요. 진짜 매일 찾아오실 거예요.” 


현재 시각 오전 10시. 하루는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는데 아침부터 울고 놀라고 난리도 아니네. 오늘따라 불행이 너무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느낌이다. 오후에 얼마나 행복해지려고 이럴까? 


“여기요, 사람이 1년 이상 사는 걸 못 봤어요. 할아버지 수다에 지쳐서 도망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그렇군요… 말씀 감사합니다.” 


“솔직히 이 근처에, 이런 조건으로 집 얻은 사람들 사정이라는 게, 다 뻔하잖아요. 복비, 이사비 아까워서라도 2년 버텨야 할 텐데, 스트레스 최대한 안 받도록 해야죠.” 


월세 5만 원 dc, 관리비 공짜의 대가는 주인님의 수다를 들어줄 호구를 확보하기 위한 덫이었을까. 그래서 제 인상이 좋다고 하셨나요… 주인님? 내향인의 심장박동이 멈추는 소리가 난다. 


삐 ------ 


앞으로 2년간 주인님과 숨바꼭질을 벌여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벌렁거리지 않았다면, 정말 곧장 이 세상을 하직했을지 모른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이어폰에선 쉴 새 없이 요즘 작곡 중인 트로트가 뽕짝 뽕짝 흘렀지만, 기분 탓인지 전혀 흥겹지가 않았다. 


그렇네. 확실히 곡에 문제가 있었네. 기분이 안 좋아도 마음속에 흥을 일으키는 게 노래인데. 정말 그것만 노리고 만들었는데. 하나도 신나지 않아. 데뷔가 또다시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기분이다. 


우울의 뻘밭에 마음이 푹푹 붙들리는데, 진동이 느껴진다. 아르바이트 반장님의 문자다. 


『그래~ 화이팅~^^』


오늘은 일하러 갈 수 없다고 했던 문자에 대한 답장일 뿐인데. 이 짧은 문자에 정신이 차려진다. 파이팅은 지금 손에 쥐여줘도 낼 수 없는 전투력. 하지만 화이팅이라는 이 다정한 콩글리시는 위화감 하나 없이 나를 응원하는 것 같다. 


그래. 기분에 휘둘리지 말고, 고칠 부분이 떠오를 때까지 듣자. 드라마틱하게 좋은 해결책이 떠오를지 모른다. 


그렇게 나는 카페에 도착할 때까지 최면을 걸듯 ‘드라마틱’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드라마틱한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한여름이 선사하는 갈증에, 음료를 받고 자리에 앉자마자 절반 가까이 쭉쭉 들이켰다.


[딸랑 -]


문소리에 무심결에 고개가 들렸다. 그리고 카페로 들어오는 사람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테이블에 납작 엎드리고 말았다. 2시간 후에 만나기로 한 동훈 형이었다. 


“야 미안하다. 내가 바빠서 어쩔 수 없이 여기로 불렀다.” 


“프로듀서 된 거 자랑하려고 부른 건 아니고?” 


“구멍가게 프로듀서 된 게 뭐 자랑이라고.” 


“자랑하고 싶으니까 여기까지 굳~이 불러서 녹음실 보여준 거 아니냐고. 이 시간과 정성으로 모임에 나오면 될 것을. 쯧.” 


동훈 형은 지인을 만나는 듯했다. 카페 구석 자리에 숨도 못 쉬고 엎드려 있으니, 사정을 알 리 없는 동훈 형은 내 근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화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 


“근데 구멍가게 맞아? 거기 트로트 가수 유금미 기획사라며? 탑이 어떻게 구멍가게에 있냐?” 


“유금미 매니저가 차린 기획사야. 소속 가수도 유금미뿐이다.” 


“1인 기획사야? 이름이 뭔데? 검색 좀 해보자.” 


“큼… 크흠….” 


동훈 형은 쉽게 엔터 명을 꺼내지 못하고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그나저나 지금 일어나 인사를 하지 않으면 화장실도 문제지만, 들키기라도 하면 정말 이상한 그림이 될 텐데… 소심한 얼굴이, 엉덩이가,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다. 2시간 후에나 보기로 한 애가 왜 이 시간에 와 있냐고 물을 텐데, 내 기준에선 참을 수 없이 유난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몸이 굳은 듯 일으켜지지 않는다. 


“기획사 이름이 뭐냐고.” 


“모… 모둠 기획….” 


“모둠? 영어 단어인가? 스펠링이 m, o…”


“아씨, 한글로 모둠!! 새끼야. 모둠회, 모둠전 할 때 모둠!” 


동훈 형은 항상 엔터명을 창피하게 생각했다. 글로벌 시대에 맞춰 영어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러 장르의 가수들이 한 기획사에 담기길 바란 유금미의 매니저 김금향은 ‘모둠’이라는 단어에 꽂혔고, 영어명을 짓게 되더라도 반드시 Mo-doom으로 쓰겠다고 했다. 


“아아, 모둠~” 


“아씨, 촌시러워서 다닐 맛이 안 나. 내가 어떻게든 바꾼다. 진짜.” 


“트로트 기획사에 딱 어울리는데 왜? 구수하니.” 


“트로트 하나 하려고 이런 구멍가게 들어온 게 아니야. 내가 진짜 아이돌 그룹 하나 대박 쳐서 빌보드 간다.” 


“오올, 그럼 너희 기획사에서도 아이돌이 나오는 거야?” 


동훈 형의 입에서 으응인지, 으득인지 아무튼 자신 없이 앓는 소리가 났다. 


그럴 만도. 중소기업에서 그런 기적이 일어나려면 적어도 대표 프로듀서가 스타여야 한다. 그런데 동훈 형 히트곡은 죄다 공동 작곡뿐이고, 단독 작곡 성적은 처참한 수준이다. 


“근데 동훈아, 너 너무 한가해 보여. 오늘 모임은 대체 왜 못 나온다는 거야?” 


“자존감을 높이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날이기 때문이지.” 


“취미로 하는 게 있어?” 


“그… 나 작곡 아카데미 동기가 있는데. 요즘 내가 걔 작곡 데뷔 도와주고 있거든.” 


드라마틱한 순간이 이런 걸까. 어느 날, 뜻밖의 장소에서 내가 있는 줄 모르고 나의 이야기를 하는 누군가를 목격하는 일. 


“오. 이동훈~ 동기 돕는 걸로 요즘 자존감을 높이고 있는 거야?”


나도 모르게 이 공간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순간,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쭉쭉 들이켰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고양이가 되어버렸다. 그 고양이가 방광에 사정없이 꾹꾹이를 한다. 아, 위험하다.  


“그게 말이지… 걔가… 깨닫는 걸 보고 싶어.” 


“뭘?” 


“자기가 뭘 해도 안된다는 걸.” 


드라마틱. 그 순간의 기분은, 소변을 너무 참았을 때 느껴지는 아릿함. 쏟아져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틀어막고 있을 때 느껴지는 마비감을 넘어선 무력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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