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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발설 시 처벌은 지구 추방...!"

by 김듀키

내 간곡한 부탁 멘트에 그의 눈알이 금세 경계를 푼 모습을 보였다. 명진명이란 개체는, 그렇게 낯을 가리면서, 그렇게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그렇게 연민이 넘친다.


“작곡… 하세요?”


“네…!”


그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더니, 손을 내밀었다.


“저는 영… 영화감독 지망생이에요.”


“어…아…! 그러시구나. 우와…”


“그런데… 그쪽은 꽤 외향적인 스타일인가 보네요.”


“저… 저요? 그럴 리가요…!”


“창작한 걸 평가해 달라는 용기… 저희 쪽엔 없는… 역… 역량 아닌가요?”


역량이라는 단어에 웃음보가 터졌다. 나뿐 아니라, 그도 웃었다.


“바쁘다는 말… 거짓말이에요. 뭐, 이유는 말 안 해도 아실 거고… 이해하시죠?”


“그럼요.”


또 웃음이 터졌다. 구제 불능의 자질을 두고 이렇게 웃고 떠들 수 있다니. 인생은 역시 살고 볼 일이다.


“곡 들려주세요!”


“아! 아, 네. 여기 헤드폰…”


그에게 헤드폰을 씌워주고 스케치해두었던 몇 가지 버전을 들려주었다. 가사는 녹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불러주었는데, 그럴 때마다 잘 안 들리는지, 그는 미간을 찡그리며 내 입 모양을 읽으려 노력했다.


“어…어떤 것 같아요?”


“음… 뭐라 해야 할까… 이거다! 싶은 곡은 없는 것 같고… 그… 그냥 제 생각엔 그렇다는 거죠. 노래를 너무 작게 들어서 그런지, 가사랑 곡이 잘 붙는지를 모르겠어요.”


“아… 여기 아시겠지만, 방음이 잘 안 돼서, 크게 부를 수가 없어서…”


그가 방음 안 되는 벽을 주먹으로 콩콩 두드려보다 흠칫 놀라 벽지를 매만졌다.


“어? 아…! 이 벽지가 여기 거였구나. 이 단풍 무늬…! 저희 집은 메인 벽지가 세로줄 무늬예요. 이거요, 이거.”


그건 이사한 첫날 봤던 여기저기 땜빵한 듯한 벽지들 가운데 하나였다. 모두 상아색 벽지지만, 엠보싱 처리된 투명한 문양은 전부 제각각이던 그 벽지. 그땐 그게 이 방을 지나쳐간 사람들의 삶이 덕지덕지 발린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건 결국, 수많은 우주 속에 사는 주인 할아버지가 수많은 우주 속의 명진명 방 벽지를 조금씩 공유한 흔적이었다.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우리가 서로의 빈구석을 메꿔주기 위해 함께하게 될 것을 마치 암시라도 하는 것처럼.


“가사랑 곡이 잘 붙는지 모르겠다고 하셨죠? 속 시원하게 노래를 불러드릴 수 있는 곳이 있는데, 같이 가보실래요? 저도 제 세계에선 해본 적 없고, 다른 세계에서 다른 저 덕분에 알게 된 방법이거든요.”


“어… 음… 네!”


그는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내 이야길 들으면서도, 곧장 승낙을 해주었다. 나는 그렇게 또 다른 세계의 나를 노래방이라는 전용 녹음실로 이끌었다.


“어? 명군이네?”


그런데 그와 함께 건물을 나서려던 순간, 뜻밖에 주인 할아버지를 마주쳤다.


“어…어…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보네! 아 옆에도 명군이구나? 딱 보니까 명군이네! 거 주인집은 누굴까? 야, 세입자가 지구 시스템 오류가 같이 나니까 이게 참 상상하는 재미… 읍!”


“할… 할아버지!”


너무 놀란 우리는 동시에 주인 할아버지 입을 틀어막았다. 지구 설계 오류과 박시민씨가 말한 금지조항…! 시스템 오류를 입 밖으로 내선 안 된다…! 발설 시 처벌은 지구 추방…!! 지구에서 공무원 생활만 30년을 하신 분이…! 그 덕에 연금도 왕창 받는 분이…! 나이 구순에 신 밑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싶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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