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5화 "그 미련도 힘이라고 쳐준다면"

by 김듀키

동훈 형이 유금미의 말을 날름 받아 나를 깊이 찌르려 들었다. 아니, 어쩌면 유금미의 말에 이미 나는 옷 속 깊숙이 감춰두었던 연하디 연한 속살을 베였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이걸 넌 스무 번도 더 했다는 거잖아. 그게 네가 가진 힘이야.”


김금향이 고개를 묵묵히 끄덕였다.


“나 참! 금미 누나, 말이 왜 그렇게 흘러가?”


“이왕 편 김에 내가 부를 곡 하나 만들어봐.”


유금미의 말에 심장이 또 세차게 뛰었다. 한없이 소심한 내게 맞지 않아 늘 나를 힘들게 했던, 지치게 했던 그 박동수. 그러다 첫 곡을 완성했을 땐, 딱 맞다고 느꼈던 그 박동수.


“부담 갖지 말고, 해. 늘 그래왔듯이, 안 될 것 같으면 또 접으면 되니까.”


“좋지, 좋지. 접어도 어차피 또 펼 거니까. 접고, 펴고도 전략이 나쁘지 않네.”


이제야 내가, 내 심장박동수를 따라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나는 33년이라는 시간을, 심장이 터져버리지 않도록, 뛰지 않고 걸어왔다. 달려 나를 지나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걷고, 멈추고, 그러다 괜찮아지면 다시 걷고, 괜찮지 않으면 멈추며, 울면서도 이 트랙을 완전히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 미련도 힘이라고 쳐준다면, 지금부터의 나는, 그 형편없는 능력치를 멈추지 않는 것에 쓸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부터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 속도가 얼마나 느리든, 메달이나 꽃다발 같은 축하를 받지 못하는 순위라 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기로 다짐했다. 도대체가 끝나질 않는 이 트랙의 종료 지점에서 나는 새 경기를 뛰러 갈 것이다. 그때까지 키워 올린 근력으로. 그때 비로소 나는 달릴 수 있을 것이다.








**


동화 작가가 꿈인 저 어느 세계의 나는, 양념이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아 깨끗이 한 후, 무를 하나 집어 들어 입속에 넣고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씹지도 않은 채,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눈알을 굴렸다.


“만선이라…”


“뭐 생각나는 거 있으세요?”


마침내 입속의 무를 옥, 하고 씹은 그는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아주 고전적인 거 있잖아요. 흥부와 놀부.”


“흥부와 놀부요? 그게 왜 만선이에요? 아, 박 타기?”


“네. 중장년 되면 다들 열심히 자기 삶을 꾸려왔고, 박들이 주렁주렁 삶의 지붕에 탐스럽게 매달릴 시기라는 거죠.”








**



동화 작가 지망생인 ‘나’에게서 흥부와 놀부, 박 타기라는 좋은 소스를 얻었지만, 생각보다 창작이 쉽지 않았다. 동훈 형의 저주만 계속 떠올랐다. '저 새끼는 지가 만든 메시지가 아니면 쓰지도 못한다.' 역시 내가 떠올린 주제가 아니라서 그런 걸까?


“자! 여러분, 이번에 모셔볼 가수분은 조금 특별한 분입니다. 저는 살짝 걱정돼요. 여그 엄니, 아부지가 좋아헐랑가 모르겄어!”


오늘은 내가 만든 노래가 처음 무대 위에 오르는 날이다. 전라도 농산물 축제에서 섭외가 들어왔다. 물론, 유금미도 출연한다는 조건의 섭외였다. 사회자의 사투리 너스레에 어르신들의 흥도 한껏 달아올랐다. 대놓고 야유를 하지는 않겠지만, 어설픈 사투리로 노래를 불렀다가는 이 무대가 첫 무대이자, 마지막 무대가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화개장터가 될 가수! 김용명 인사드립니다!”


이 곡의 운명이 또다시 양 갈래로 나뉘어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언제나 단순하게 단 두 갈래 길뿐이지. 희망이냐, 절망이냐…!

keyword
월, 수, 금 연재
이전 24화24화 "질려, 완전 물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