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보듯 엄마를 돌보다
엄마의 말에는 언제나
‘나를 불편하게 하는 배려’가 깔려 있었다.
“이번 주말에 어디 놀러 갈 만한 데 있니?”
엄마는 그렇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말이 사실 “엄마랑 어디 같이 놀러 갈 수 있니?”라는 뜻이라는 걸 나는 안다.
그런데 "주말 같이 놀러 갈 곳 찾아볼게" 하고
대답을 하면 엄마는 이내 말을 바꾼다.
“아니다, 가긴 뭘 가"
"그 동네에 얼마 전에 위험한 일도 있었다더라"
"주말에 날씨도 안 좋대"
"거긴 관광지라 바가지 씌운다더라.”라는
터무니없는 변명을 갑자기 늘어놓으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엄마가 왜 그러는지 다 알면서도,
그 돌려 말하는 방식이 싫었다.
“주말에 어디 놀러 가면 좋겠네”라는 한마디를
굳이 세 번쯤 돌려 말하는 엄마의 말투,
그 안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마음이 숨어 있었다.
‘너무 바쁘지?’,
‘너한테 부담주기 싫은데…’,
‘나도 네가 보고 싶다.’
나는 그 속 마음의 뜻을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싫었다.
싫다고 말할 수 없으니까 더 답답했다.
엄마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그 다정함이,
오히려 내게는 묘한 죄책감처럼 다가왔다.
마치 엄마의 “괜찮다”는 말이
나에게 “그래도 나를 좀 생각해 주면 좋겠다”라는
뜻으로 들리는 것처럼.
그건 자유를 원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단지,
‘사랑을 빚지는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의 배려는 언제나 따뜻했지만,
그 따뜻함 안에는 늘 조용한 양보와 눈치
그리고 체념이 섞여 있었다.
그걸 느낄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내가 아무리 “괜찮아, 엄마가 하고 싶은 거
원하는 거 하자”라고 말해도 엄마는 금세 손사래를 쳤다.
“됐어, 나는 괜찮아. 나중에 네 일 다 끝나면 그때 가자.”
그 말이 항상 묘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엄마의 말에는 ‘나보다 네가 우선이야’라는
다정함이 깔려 있었지만,
그 다정함이 오히려 나를 작게 만들었다.
엄마의 배려는 항상 내가 중심이었고,
그 중심에 있다는 사실이 때로는 부담스러웠다.
나는 몰랐다.
그 불편함이, 사랑을 받는 사람의
미숙함 때문이었다는 걸.
엄마는 사랑을 주는 법을 배운 사람이고,
나는 여전히 사랑받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엄마의 말이 다정할수록,
나는 점점 더 말이 없어졌다.
가족 품을 떠나 사회 구성원이 된 뒤로는
무언갈 받기만 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갚기 힘든 아주 큰 마음을 빚지는 것만 같아서,
그 사랑이 내 안에서 어쩐지 불안하게 울렸다.
그리고 나는 그 불안을 다루는 법도 몰랐다.
그래서 짜증을 냈다.
엄마는 왜 말을 이랬다 저랬다 하나며,
왜 헷갈리게 해서 기분 안 좋게 만드냐며,
엄마에게 많이 날카롭게 꽂혔을 말로
투덜거리며 대화를 끊을 때가 많았다.
엄마는 그때마다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래, 알았어. 집에서 편하게 쉬는 게 좋지.”
그 말 끝의 억눌린 온도를 들으면서도
나는 일부러 모른 척했다.
그게 더 편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건 엄마의 배려가 아니라,
그 배려 속에 담긴 엄마의 외로움이었다는 걸
그땐 차마 마주 볼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회피했다.
메시지를 늦게 읽고, 전화는 미뤘고,
엄마가 던지는 질문에 “응, 괜찮아”로만 답했다.
그렇게 모른 척하며 거리를 두는 게
그때의 나로선 최선이었다.
엄마의 마음을 거절하려던 게 아니라,
그 마음 앞에서 작아지는 내가 두려웠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엄마의 사랑을 피하면서,
내 안에 또 다른 불편함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그건 미안함이자, 죄책감이자,
감당하지 못한 다정함의 무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