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통화였다.
반가운 목소리로 시작했는데,
엄마는 갑자기 날이 서 있었다.
특별한 이유도, 설명도 없이 툭 하고 짜증이 떨어졌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당황했다.
그리고 곧바로 방어했다.
“갑자기 왜 짜증을 내고 그래?”
이해하려 하기보다
억울함을 먼저 꺼냈다.
딸로서의 배려보다
상처받은 나를 먼저 세웠다.
전화를 끊고 나면 늘 같은 생각이 따라온다.
엄마는 나를 얼마나 많이 받아줬을까.
사춘기 시절, 이유 없이 예민하던 날들.
문을 세게 닫고, 말을 끊고, 눈을 피하던 시간들.
그 모든 감정들을 엄마는 거의 매번 삼켜냈다.
나는 왜 아직도
그만큼의 너그러움을 돌려주지 못할까.
왜 여전히 엄마보다 나를 먼저 지키려 할까.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나는 충분히 컸는데,
왜 엄마 앞에서는 여전히 방어적인 아이가 되는 걸까.
아마 관계라는 건
논리보다 오래된 감정이 먼저 작동하는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의 한 마디는
지금의 나만 건드리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나,
이해받고 싶었던 나,
억울했던 나,
말 못 했던 나까지 함께 흔든다.
그래서 나는 어른처럼 말하려다가도
결국 아이처럼 반응해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일지도 모른다.
무심해질 수 없는 사람이라서
여전히 기대가 남아 있어서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출렁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도 이제 나이가 들고
삶의 무게가 예전과 다를 텐데
나는 여전히
“엄마는 강해야 한다”고 어딘가에서 믿고 있었던 건 아닐까.
엄마의 짜증을
엄마의 하루가 아니라
엄마의 태도로 받아버리는 나.
그 사이에서
나는 또 스스로를 책망한다.
“왜 나는 이렇게 이기적일까.”
하지만 조금 솔직해지면
그건 이기심이라기보다
나도 이제 상처받기 싫은 사람이 되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어릴 땐 엄마가 나를 보호했고
지금은 내가 나를 보호한다.
그게 잘못은 아닐 텐데
엄마 앞에서는 그조차 죄처럼 느껴진다.
아마 나는
완벽한 딸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걸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나도 이해받고 싶다.
엄마에게 화를 낼 때마다
사실은 관계를 놓고 싶어서가 아니라
놓치고 싶지 않아서라는 걸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엄마의 딸이고
아직도 완전히 자라지 못한 부분이 있다.
그래도 조금씩은
반응의 온도를 낮추고 싶다.
방어 대신 한 박자 늦춘 질문을 건네고 싶다.
“엄마, 무슨 일 있었어?”
그 한 문장이
내가 자란 만큼의 증거가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나를 먼저 지키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엄마를 덜 사랑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엄마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오래 마음이 남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더 커야하는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