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엄마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왜 그렇게 사소한 말에도 상처를 받는지,
왜 걱정은 늘 잔소리의 형태로 나오는지,
왜 내 설명은 자꾸 오해로 돌아오는지.
혹시 내가 더 다정하게 말하면 나아질까.
혹시 내가 먼저 사과하면 덜 날카로워질까.
혹시 내가 더 자주 연락하면 덜 서운해할까.
나는 자꾸 방법을 찾았다.
이 관계를 고치는 방법.
심리학 글도 읽어봤다.
노화에 대한 이야기도 찾아봤다.
부모와 성인 자녀 관계에 대한 칼럼도 읽었다.
‘자존감이 낮으면 방어적이 된다.’
‘통제력을 잃는 시기에 예민해질 수 있다.’
‘세대는 다른 언어로 사랑한다.’
문장들은 이해가 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까지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았다.
엄마는 여전히 서운해했고,
나는 여전히 지쳤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애초에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엄마는 엄마의 시대를 살았다.
참는 게 미덕이었고,
버티는 게 사랑이었고,
자식을 위해 자신을 줄이는 게 당연했던 시대.
나는 다른 시대를 산다.
존중받고 싶고,
감정이 안전하길 원하고,
사랑도 건강해야 한다고 배우는 시대.
엄마는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고 말하고,
나는 “그 말이 나를 작게 만든다”고 느낀다.
엄마의 “걱정”은
어쩌면 불안에서 나온 말일 수 있고,
내가 건넨 “조언”은
엄마에게는 능력을 부정당한 느낌일 수 있다.
우리는 같은 단어를 쓰지만
서로 다른 뜻으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
걱정.
존중.
배려.
발음은 같지만
해석은 다르다.
그걸 인정하는 데 오래 걸렸다.
나는 엄마를 완벽히 이해해야만
이 관계가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
그래야 내가 덜 화가 나고,
덜 지치고,
덜 미워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해를 다 하지 못해도
관계는 유지될 수 있다는 걸
조금씩 배우고 있다.
모든 걸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모든 감정을 설득하지 않아도 되고,
모든 오해를 바로잡지 않아도 된다는 걸.
완전히 통역되지 않아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아도,
조금 어긋난 채로
함께 존재할 수도 있다는 걸.
엄마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사랑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제는
엄마를 이해하려 애쓰기 전에
내 마음을 먼저 이해해주기로 했다.
나는 왜 지쳤는지.
나는 왜 화가 났는지.
나는 왜 거리를 두고 싶어졌는지.
그걸 인정하니
조금은 덜 무너졌다.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
그건 포기가 아니라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엄마는 엄마의 언어로,
나는 나의 언어로 사랑한다.
완벽하게 번역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는 것.
어쩌면 가족이라는 건
그 정도의 간격을 안고도
함께 가는 이름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