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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정원 Oct 23. 2022

아이를 갖기 위해

네가 우리에게 와주기까지

나는 뭐든지 느렸다. 생일이 12월이라서 그런지 엄마도 키우는 내내 답답했었다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결혼도 늦었다. 평생 짝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는지, 아니면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나려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아이 갖는 것도 늦어졌다. 처음 1~2년은 아이를 가질 생각조차 안 했었는데 더 이상 늦어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시험관 아기 준비에 돌입했다.
나는 우리나라에 이런 제도가 있는지도 몰랐고 난임부부가 생각보다 많다는 점에 더 놀랐다.
비교기 과 선생님의 권유로 대구에 있는 시험관 아기 전문병원을 찾아갔다. 선생님이 지금이라도 잘 오셨다고 해주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때부터 배란일에 맞춰 배에 배란유도제 주사기를 놓고 약도 엄청 많이 먹었던 것 같다. 지금에서 사람들이 주사맞기 너무 힘들지 않았냐고 물어보지만 나는 생각보다 주사 맞는 것이 딱히 힘들지는 않았다.  그렇게 첫 시험관 아기가 성공인 줄 알았다. 첫 시도에 성공했다고 너무 방심한 탓일까? 다음 검진일에서 (질) 초음파 검사를 했더니 아기 심장이 안 뛴다고 했다.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다. 하필이면 그날 친구와 약속이 있었는데 친구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무슨 일 있냐’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고 했다.
가족 말고는 시험관 아기 준비한다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기에 체해서 그런 다보다고 얼버무렸다. 사실, 뱃속의 아기 심장이 뛰지 않는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의 오진일 거라 생각하고 서울에 있는 병원 본원을 찾아가서 다시 검진을 받았다. 역시 내 판단이 틀렸다.
청천벽력.
이날은 남편도 같이 갔었는데 검진 후 둘이 아무 말없이 집으로 돌아오며
‘아이 없으면 어때. 우리끼리 행복하게 살자. 라며 서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남은 숙제가 있었다. 계류유산으로 태아가 자궁 내에 잔류하고 있기 때문에 소파술을 받아야 했다. 대구까지 가서 수술을 받으려면 기차 타고 가는 내내 울음이 그칠 것 같지 않아 서울에 있는 다른 병원에 예약했다.
드디어 수술 날이다. 나름대로 씩씩해지려고 노력했는데도 당일이 되니 너무 떨렸다.
“자 이제 잠이 들 거예요. 하나, 둘, 셋”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분 깨어나실게요”라고 하는 간호사의 말이 귓가에 희미하게 들렸다.
수면마취에서 깨어보니 침대에 누운 채 차가운 수술방에서 회복실로 옮겨지는 중이었다.
‘아! 끝났구나. 잘 가, 아가야, 잠시라도 나를 엄마로 만들어줘서 고마워’라고 마음속으로 되내었다.
출산한 거랑 똑같다며 시어머니가 미역국이랑 이것저것 먹을 것을 챙겨다 주셨다.
감사한 마음으로 미역국을 싹싹 긁어먹고 컨디션을 회복했다.
참고로 나의 시어머니는 3녀 1남의 어머니이자 시부모님을 평생 모시고 살다가 이제야 조금 삶의 여유를 찾으신 분이다. 나는 시집살이 너무해서 너는 시킬 생각 없다고 하신다.
그렇게 나는 한차례 실패를 더 하고 세 번째 시험관 아기 임신에 성공했다.
드디어, 아기 심장박동이 뛰는지 확인하러 가는 검진 날, 너무 떨려서 내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초음파로 검진을 시작하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선생님이
“여기, 심장이 잘 뛰네요”라고 말해주는 순간 내 눈에서 눈물이 또륵 흘러내렸다.
양가 집안에 너무 말하고 싶었지만 임신 12주 차까지 기다려 아이 심장이 뛰는 것을 보고 말하고 싶었다. 드디어 두 집안에 말하니 양가 부모님께서 모두 ‘수고했다. 고생했다’라고 말해주셔서 또다시 눈물을 쏟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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