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녀님은 내가 불어를 모르기 때문에 프랑스인들보다 두 배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부모님과는 멀리 떨어짐, 모르는 문화,수녀님의 엄격하심... 아주 많이 힘들었습니다.
내가 친 딸도 아닌데, 나를 돌봐야 하는 큰 책임을 가지셨으니 수녀님도 압박감을 받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엄격하셨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오후 6 시 이전에 집에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친구와 오후 5 시에 저녁을 먹었고 오후 6 시에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TV는 특정 시간에만 허용되었습니다.
많이 외로웠습니다.
내 또래의 애들이 가족과 함께 지내고 음식 준비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을 때, 나는 점심과 저녁 식사를 혼자 준비하고 혼자 먹었습니다.
친구 집에서 잠을 자려면 친구의 어머니가 대모 수녀님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친구 중에 이쁘고, 재미있고, 관대함이 넘치는 몸매를 자랑하는 이태리인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의 엄마는 작고 둥글둥글하며꿈같이 맛있는 라자냐를 만드는 훌륭한 요리사였습니다.
그 친구 집에 놀러 가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한 번은 그 친구 엄마가대모 수녀님께 전화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알로 (여보세요) 수녀님"이라고 말하는 대신 "알라 (여보 세야), 수녀님"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 나랑 친구랑 그 어머니랑 한바탕 웃음바다가 된 적도 있습니다.
나는 특히 수학에서 아주 좋은 성적을 받았었습니다.
20점 만점에 19.5로 반에서 일등 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거의 항상일등이었습니다.
근데수녀님께 내 이런 점수를 보여드리면, 수녀님이하시던 말,
" 왜 20점을 못 받았니? 20점 받을 수 있지 않았니?"
나쁘게 말하지 않고, 평범한 어조로 말하셨지만, 그것이 나에겐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머리가 어깨에 떨어졌습니다.
인정받지 못하고, 축하받지 못하고, 슬퍼서, 내 방으로 혼자 우울해하며 돌아온 적이 많았습니다.
그것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눈물이 나고 목도 막힙니다.
그때 나는 폭식증을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그 한번 인정받지 못함 때문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같습니다.
사춘기였기도 하고 정상적인 체중에도 불구하고 뚱뚱하다고 생각도 했었습니다.
학교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많은 압박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 나라를 떠난 외국인이었고, 나는 내가 '열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절대적으로 성공해야 했습니다.
나는 IMF와 아빠의 파산에도 불구하고 학업을 위해 돈을 지불 한 부모님을 위해 성공해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