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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싸이코박 닥터 Feb 14. 2023

외국의 꿈

조기 유학

만 14 세의 나이에 프랑스 옆 나라 모나코에 왔습니다.


그때, 한국에서 중학교 첫 해를 마쳤으므로 프랑스에서 4학년을 마친 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나이를 감안할 때, 프랑스에 3 학년에 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불어도 못하고, 프랑스 3학년 말에 국가시험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4학년에 들어갔습니다.



-프랑스에선 학년을 거꾸로 합니다. -


한국에서는 초등학교 6년(프랑스에서는 CP, CE1, CE2, CM1, CM2에서 6 ème까지), 중학교 3년(프랑스에서는 5 ème, 4 ème, 3 ème), 고등학교 3 년(프랑스에서는 2 nde, 1 ère Terminale)이 있습니다.



온 가족이 있는 한국을 떠나 프랑스에 조기유학 왔습니다.

프랑스에서 가족 아무도 없는 '불쌍한' 아이가 됐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놀라워하고, 대견하게 생각합니다.


하긴 부모 없이 혼자인 아이를 상상하면, 불쌍하기도 하도 위로해주고도 싶겠죠? 

그 덕에 프랑스에서 대접 잘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초대도 받고, 대단하다고 칭찬도 많이 받고.


그 당시에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한국사람들은 유학을 위해, 어린 십 대 또는 초등학생이었지만,  자녀를 해외로 보냈습니다.

일반적으로 영어권 국가, 특히 미국으로 많이 떠났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이주한 경우도 있습니다.


종종 혼자 해외로 파견되어 있었던 젊은이들이 향수병, 외로움, 문화적 차이 때문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나에게 그것은 실패로 여겨졌습니다.


한국에서는 초등학교 학생 때부터 성공의 큰 압박을 받습니다.

아이들의 성공을 위해 대부분의 부모들은 이런저런 학원보냅니다.

프랑스에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압박은 다양한 한국 K 드라마 및 / 또는 영화 및 / 또는 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학업에 성공하고, 명문 대학을 나오고 돈 잘 버는 직업을 가지고 부모를 경제적으로 도울 수 있도록 자녀들에게 '투자' 하는 입니다.

글쎄, 이것은 주관적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왜 이렇게 압박이 큰지 한국에 역사를 알아야 이해가 됩니다.

한국을 완전히 파괴한 1950 년대의 전쟁 이후. 

회복하고 한국이 선진국들 사이에 낄 수 있었던 것은, 일을 배로 하고, 특히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라'는 말이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뿌리 박혀 있습니다.



프랑스에선 거의 무료 의료 시스템의 혜택을 받고, 유급 휴가를  받고,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발전된 연금 제도를 누립니다.

그런데 얼마나 운이 좋은 것인지 깨닫지 못하고 불평불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 만날 때마다 한국사람들 보라고 합니다.

내 한국 친구 얘기를 합니다.



나의 베스트.

키가 크고, 잘 생김. 

숙달 몸으로 매혹 적이며, 무엇보다도 유머 감각이 뛰어난 친구.

그 친구를 만나면 항상 재밌습니다.


어느 여름, 친구는 유럽을 방문하기 위해 일주일 간의 휴가를 쓰고, 이틀 동안 나를 만날 겸 관광도 할 겸 프랑스 집에 놀러 왔었습니다.

그 친구는 한국이 밤일 땐 (프랑스에서는 낮) 유럽을 방문할 수 있었지만, 한국에서 일할 시간이 되자 (프랑스에는 ) 상사에게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너 휴가 중인 거 확실하니?"

나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프랑스에서는 상상할 수 없지만 한국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최소한의 휴가를 쓰는 한국 사람들, 아예 휴가를 안 쓰는 한국 사람들도 이해가 갑니다.


한국인은 일 년 내내 일주일에서 23 일의 유급 휴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프랑스에 비해 정말 적습니다.


저녁 6시가 퇴근시간이면, 독일에서는 6시 이후에 퇴근하는 게 자기 일을 제대로 처리 못했다는 증거로 눈살을 찌푸리는데, 한국에선 그 반대로, 6시에 퇴근하면, 열심히 일하지 않고, 진지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정시 퇴근이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여기서 문화의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모나코에서 수녀님이셨던 대모님을 한국에서 만났습니다. 

덕분에 내가 모나코에 올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흰색과 검은색의 수녀님의 의상.

항상 나무묵주를 벨트로 차고 계십니다. 

작은 키, 날씬한 몸, 안경에 수녀님의  엄격함몸에서 느껴집니다.

수녀님은 노래를 잘하시고 기타를 셔서 미사 때마다 성가지휘하십니다. 

때로는 기타가 수녀님을 드는 건지 수녀님이 기타를 드는 건지 헷갈립니다. 


적어도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모나코에 오고 싶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성공하지 못해도 한국에서 프랑스어 교사가 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했었습니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하셨습니다. 

만 14  아이가 혼자 유학 간다니 어떤 부모가 쉽게 동의하셨을 까요?


하지만 너무 고집이 세서 부모님이 동의하셔야 했고, 부모님은 내가 공부를 마치고 당연히 한국에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셨답니다.


되돌아보면, 나는 사회적 압박, 부모님의 싸움과 엄마의 '이래라저래라'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었는지 궁금합니다.


'완벽한 부모는 없다'라고 이자벨 필리오자가 말했듯 엄마도 상처받은 불완벽한 엄마였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엄마는 온 마음을 다해 나를 사랑하며 나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게트와 만남.


프랑스 처음 왔을 때, 바깥쪽은 바삭하고 내부는 매우 부드럽고, 군침이 도는 맛있는 냄새나는 바게트 , 크로와상 및 치즈를 발견.


열심히 먹다 보니 3 개월 만에 10kg를 쪘습니다. 


되돌아보면, 음식은 외로움과 성공의 압박으로부터의 피난처가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여름 방학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 10kg를 찐 모습에 친지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동생은 심지어 나를 '돼지'라고 놀렸습니다.

 한국에서는 뚱뚱한 사람들을 돼지라고 부릅니다.(-프랑스에서 돼지라 부르는 건 야한 얘기 아님 지저분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말은 나에게 충격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고등학교에서는 바칼로레아 (수능) 테스트로 수영이 의무적이었기 때문에 수영을 배워야 했습니다.

한국에서 여름 방학 2 개월을 지내는 동안 수영을 배우면서 5kg를 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수영을 좋아합니다.



수녀님은 내가 불어를 모르기 때문에 프랑스인들보다 두 배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부모님과는 멀리 떨어짐, 모르는 문화, 수녀님의 엄격하심... 아주 많이 힘들었습니다.


내가 딸도 아닌데, 나를 돌봐야 하는 큰 책임을 가지셨으니 수녀님도 압박감을 받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엄격하셨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오후 6 시 이전에 집에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친구와 오후 5 시에 저녁을 먹었고 오후 6 시에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TV는 특정 시간에만 허용되었습니다.


많이 외로웠습니다.  

내 또래의 애들이 가족과 함께 지내고 음식 준비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을 때, 나는 점심과 저녁 식사를 혼자 준비하고 혼자 먹었습니다.




친구 집에서 잠을 자려면 친구의 어머니가 대모 수녀님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친구 중에  이쁘고, 재미있고, 관대함이 넘치는 몸매를 자랑하는 이태리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의 엄마는 작고 둥글둥글하며 꿈같이 맛있는 라자냐를 만드는 훌륭한 요리사였습니다.


그 친구 집에 놀러 가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한 번은 그 친구 엄마가 대모 수녀님께 전화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알로 (여보세요) 수녀님"이라고 말하는 대신 "알라 (여보 세야), 수녀님"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 나랑 친구랑 그 어머니랑 한바탕 웃음바다가 된 적도 있습니다.




나는 특히 수학에서 아주 좋은 성적을 받았었습니다.

20점 만점에 19.5로 반에서 일등 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거의 항상 일등이었습니다.


근데 수녀님께 내 이런 점수를 보여드리면, 수녀님이 하시던 말,

" 왜 20점을 못 받았니? 20점 받을 수 있지 않았니?"


나쁘게 말하지 않고, 평범한 어조로 말하셨지만, 그것이 나에겐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머리가 어깨에 떨어졌습니다.

인정받지 못하고, 축하받지 못하고, 슬퍼서, 내 방으로 혼자 우울해하며 돌아온 적이 많았습니다.

그것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눈물이 나고 목도 막힙니다.




그때 나는 폭식증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그 한번 인정받지 못함 때문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춘기였기도 하고 정상적인 체중에도 불구하고 뚱뚱하다고 생각도 했었습니다.

학교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많은 압박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 나라를 떠난 외국인이었고, 나는 내가 '열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절대적으로 성공해야 했습니다.

나는 IMF와 아빠의 파산에도 불구하고 학업을 위해 돈을 지불 한 부모님을 위해 성공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다시 부모님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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