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선 사람들만나서 인사할 때,마주 보면서 오른쪽 뺨을 서로 대면서 뽀뽀,왼쪽 뺨에 뽀뽀, 두 번에 뽀뽀를 해야 합니다.
벨기에에선 세 번도 합니다.
그래서 프랑스에 처음 왔을 때 사람들 만나기 너무 싫었습니다. 뽀뽀하기 싫어서. 뺨대기 싫어서.
한국에선 그냥 멀리서 손으로 인사하거나 고개를 숙이면 되는데 말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 우리는 더 이상 서로 뽀뽀 안 하게 돼서오히려 나에겐편했습니다.
프랑스인 남편은 뽀뽀하는 거,악수하는 게 그리웠답니다.
프랑스 의대에 이학년 합격하면 한 달 동안 간호사일 실습합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내가 사람들을 만지는 것이꺼려지고내게 매우 불편하다는 것을 조금 깨닫습니다.
의대5학년 때환자 진찰 실습 평가가 있었습니다.
교수 의사님이 나보고 진찰할 땐 환자를 제대로 만져야 한다고 말하셨을 때사람 만지는 게 나한테는 불편하구나라는 것을 제대로 깨닫습니다.
하지만 나는 의대를계속 다녔습니다.
다른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게 무언지 몰랐습니다.
그때 생각을 더 많이 했었으면,방사선학과, 정신과 등, 사람들을 만지지 않는 전공도 있었는데, 나는 최선을 다하는 내 주위에 의대 친구들처럼, 다른 의대 학생들처럼 하고 싶었고, 그냥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나는 정신과를 무서워했었습니다.
정신과 하면 떠오르는 게,카미솔 재킷,격리 방등.
카미솔이나 격리 방없이 다른 정신 의학 분야에서 오은영 박사님처럼 일할 수도 있었는 걸 안타깝게 생각을못했었습니다.
인턴(전문이 배우는 과정)
-한국에선 레지던트?-
ECN ('ÉpreuveClassante Nationale', 전문 분야를 선택하는 국가 순위 시험)이 끝난 후 나는 의료 종양학, 암학을 선택합니다.
암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고 응원해주고 싶었습니다. 아모르 도시 대학병원에 암 소화과를 선택합니다.
초보 인턴으로, 나는 이론과 실습을 연관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윗 의사들이 잘 동행해주지도 않고, 혼자환자 진찰 해야 했습니다.
췌장암을 앓고있는 젊은 환자들이 몇 개월도 안되어서 죽는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암 환자가 원하는 치유를 못 줄 때,무력감을 받아들일 수가없었습니다.
그래서 힘들었습니다.
나에게 고통이었습니다.
나와 동시에 시작한 내 친구 인턴은 환자가 심각할수록 신났었는데 나는 정 반대로 환자가 심각할수록 우울증이 커졌습니다.
응급실에나이트 서는 것도질렸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실제 응급사태 - 뇌 마비, 간 마비 등등-가 아니며 가짜 응급-늙고, 혼자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아무 데도 갈 데 없는 사람들을 위한 자리배치에 관한 것-이 많았습니다.
가장 긴급하고, 가장 어렵고, 가장 복잡한 병자들을 우리 같은 초보 인턴에 맡기고, 간단한 외상학만맡는윗 의사들과도 있었습니다.
너무 어이없고 혼자임을 또 느꼈습니다.
프랑스 인턴들은 6개월마다 과를 바꿉니다.
6개월 후 나는 폐과에서 계속해보며 암 의사계속해보려고인내하지만 결국엔 마찬가지로 몸 아픈 사람들을 보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전문 분야를 바꾸기로 결정합니다.
몸 아픈 사람들을 직접 안 보고 동료들 의사와 환자들을 전화나 회의로 상의하는 임상병리과를 선택합니다.
소화과 실습 끝날 무렵에, 나는 더 이상 심각한 환자를 보지 않고 외래 환자만 보며 나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고 우울증도 나아졌습니다.
그 무렵에 남편을 만났습니다.
우리는'사랑'수도원에서 만났습니다.
천주교 젊은이 모임에서 주말피정을 그 수도원에서 마련했었습니다.
나는 원래일했었어야 하는 주말이었는데 동료 인턴 중 한 명이 자기 여동생의 파티한다고 주말을 바꿔달라고 요청했었습니다. 그래서 바꾼 주말.
그 덕에 내가 사랑 수도원에 갈 수 있었습니다.
남편과의 만남은진짜 우연이였습니다.
남편은 미소를 지으며 늦게 도착했습니다.
그가 늦는걸 그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늦었건 시간이 맞았던 그의 미소에 사랑에 빠졌습니다.
남편 덕분에폭식증이 멈춥니다.
사랑받는 느낌, 나를 아름답게 봐주는 마음 덕분 이어서 그런지, 나는 더 이상 먹고 구토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때 그를 제외하고 내가 폭식증이라고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는나를 사랑하는 남편을 가진 아내, 그리고 4 명의 아름다운 소녀의 엄마 가 됐습니다.
가족 과로
나는 '가족 과로'를 했습니다.
일하면서 어린애들 네 명 키우며 힘들어 죽을 뻔했습니다.
남편은늦게 퇴근했습니다.
자신도일에 과로했습니다.
그는 여가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남편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리앙은초등학교 선생님입니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이렇게 잡일이 많았는지 몰랐습니다.
학교 수업시간만 생각하고 여유롭다 생각했었는데, 수업 전에 수업 준비, 수업 후에 공책 수정 시험 채첨, 게다가 '문제' 아이들 서류 준비 - 프랑스에선 무조건 서류가 많고 오래 걸립니다. - 또 학부모 모임 등등 끝이 없더군요.
돈도 못 법니다.
아마 선진국에서 프랑스 교사들이 돈을 제일 못 받을 겁니다.
의지가 없고 사랑의 소명이 아니면 못 합니다.
그래서 나는 교사들을 존경합니다.
정부에서도 몰라라 하는 바침과 희생.
애들이 미래인데, 교육에 투자를 해야 하는데, 프랑스 정치 많이 답답합니다.
도리앙은학생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인기 있는 교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에 불만족하고다른 직업을 찾기 위해 휴직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그 덕분에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생깁니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다나 혼자 등에 업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아이들의 관리, 아이들 활동을 위한 택시 하기 (수영, 음악 등등)- 큰 애들 세명 데리고 왔다 갔다 힘듭니다 - , 식사 준비 (메뉴판 짜기, 장보기, 아이들과 함께 식사 시간 하기, 희로애락을 다 받아주기) 및 심지어 경제적으로 다 내가업은 것처럼 느끼면서 삶의 무게에 또 한 번 쓰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