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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싸이코박 닥터 Nov 04. 2022

얼떨결에 간 의대

프랑스 대학생활

프랑스 의대


그림과 수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건축을 하고 싶었지만, 건축엔 미래가 없다고 해서, 부모님과 수녀님의 충고 따라서 의대를 갔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과학 바까로레아 (수능) 학위를 가지면 의대 일 학년에 등록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의대가 큰 도시마다 있어 모나코에서 가까운 의대에 입학했습니다.


대학생활 하면서, 천주교 의대생들의 모임에서, 그리고 베이비 시팅 하면서 가족 같은 친구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몬스터 같은 아이들을 돌봐야 했습니다.

어느 가을날, 산에서 산책하자고 해놓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단풍잎으로 나를 공격하고 묻었던 세명의 남자아이들. 

눈치가 빠르고, 삶에 큰 기쁨이 넘치는 세 소년.

그중 금발 곱슬머리와 파란 눈을 가진 막내를 우리 엄마가 많이 이뻐하셨습니다.

 

그 가족들과 너무 힘든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늙은 어머니(나랑 10살 차이니 그때 대학생인 나에겐 무조건 늙음.) 내가 여러 번 거절했지만 (공부도 하랴, 파티 다니랴, 너무 바빠서... ) 그래도 계속 물어봤습니다. 

솔직하고 오픈 마인드를 가진 그녀.

왜 그렇게 많이 연락했는지 알게 됐습니다.

베이비 시터들을 고문하는 것을 즐기는 가족. 

또한,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얼마나 심기가 불편했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는, 완전히 현명하고, 비판적이며 놀랍습니다. ', 좋은 점만 있네?' 

이해하셨겠지만 아이러니입니다. 

사실은 이 가족을 많이 사랑합니다.


나는 대부분의 프랑스 일 학년 의대 학생들처럼, 이학년 첫 번째 도전은 떨어지고, 두 번째로 도전했을 때 성공했습니다. 

그것도 약 3000 명 모든 참가자 중 17 위를 차지했습니다.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그때는 얼마나 행복하고 자랑스러웠었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의대 일 학년 'P1'


P1... P1을 말하자면?

이 P1 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 엄청난 경쟁압박감, 학생들 사이에 경쟁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의대 일 학년생들은 맨날 공부만 했습니다.

간단합니다. 먹거나 자는 시간 빼고는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를 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저녁에는 다음날 공부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잠을 잘 자려고 수면제를 복용하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게 당연한 거 일지도 모르겠지만 프랑스에서는 의대 일 학년 공부 힘든 거 알아줍니다.

공부밖에 몰랐습니다!

우리에게는 사회생활이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은자 같이 살았습니다.


당시 뉴메류스 클로주스 (numerus clausus)로 제한된 수의 학생들만 의대 이학년으로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일 학년 끝날 때의 시험 순위에 따라 의학, 치과 또는 산파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의대가 가장 인기가 있었습니다. 


운 좋게도, 나는 친구가 많았습니다.

나는 만남의 은총이 항상 나를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행운아.


내가 머물렀던 기숙사에서는 나를 포함해 네 명의 의대생들이 있었습니다.

옷 입는 게 남자 같아도 아름다운 금발머리 친구 '모모'.

갈색 머리 매우 재미있는 친구 '꼬꼬'.

 매력적인 긴 곱슬 금발머리 친구 '씨씨'. 


우리는 그 기숙사에서 가장 똑똑한  명의 소녀였습니다.

그리고 씨씨가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있던 친구들 덕분에 우리는 의대에서 즐거운 여자 친구 밴드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P1의 어둠 속에서 나의 햇빛의 광선이었습니다. 


매주마다, 우리는 두 그룹으로 나눠 다른 그룹의 소녀들이 조금 더 오래 잘 수 있도록 번갈아 가며 자리를 맡았습니다.

강의 시작 전에 미리 와서 줄을 서야 했고, 강의실 문이 열리면  강의를 잘 들을 수 있도록 앞 벤치에 가방을 던질 - 한국 전철에서 아주머니들이 자리 맡으려고 가방 던지는 것처럼- 필요가 있었습니다.


강의실 문이 열리자 마자 다들 계단을 뛰어내려 갑니다. 

아, 이 P1, 얼마나 잔인한 세상이었는지...


 대학에서 나는 내 결혼 증인들이 된 가장 친한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긴 머리카락과 파란 눈을 가지고 삶에 행복이 넘치는 작은 금발 소녀 '안느'. 

녹색 눈을 가지고 항상 다른 사람을 챙기고 키가 큰 금발 소녀 '아델'.


그리고 나는 대학 친구들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학 친구들 하나하나만 소개하는 것으로도 소설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P1이 어려웠던 만큼, 우리끼리 뭉쳐 이겨내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프랑스에 가족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항상 애지중지를 받았고, 초대를 받았으며, 친구들과, 그들의 가족과 함께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었습니다.

나는 그 좋은 순간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때 친구 가족모임에 함께 가고(옥에 티를 찾으세요! 나 혼자 검은 눈동자), 반지의 제왕 놀이를 하고, 겨울 때 주말에 미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얼음 같은 손으로 친구의 목을 공격하며 놀았던... 

안느야, 아델아, 너무 좋았지, 그렇지?

난 너무 좋았어.



베스트 친구


-여자 베스트 친구-


의대 2학년에 통과해야 한다는 압박이 없어지면서, 의대생들의 사목 (천주교 청년 교리 모임 같은 곳)에 등록했습니다.

신부님을 만나 얼마나 많은 의대 생이 있는지 물어봤더니, 내가 모임에 올 때 직접 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알고 보니, 의대생은 없었습니다. 

어쨌든 내가 등록한 첫 해에는, 내가 유일한 의대생이었습니다.


그곳에 파란 눈을 가진 금발 소녀 에르미온을 만났습니다.

재치 있고 훌륭한 감각을 가졌으며 역동적이고 지능적인 그녀.

우린 잘 통했습니다.

그녀와 함께 얼마나 웃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나의 요구가 심한 적도 있었습니다.

내가 시험공부한다는 핑계로, 그녀는 의대도 아니고 시험도 없는데 우리 둘만이 새해 첫날지내자고 한 적도 있습니다.

나는 파티는커녕 공부만 했는데, 그녀는 그렇게 하자고 했었습니다.


마침내 일요일에 미사를 혼자가 아니고 나를 이해하며 동일한 가톨릭 개념을 가진 친구와 함께 갈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성당에는 사람도 드물고 거의 머리 하얀 할머니 할아버지밖에 없었기에 우리 둘이 젊음을 가져왔다고 신부님께 감사받았습니다. 

그 신부님은 우리를 볼 때마다 "아, 학생 공동체!"라고 미소를 지며 부르셨습니다.

둘밖에 없는 '공동체' 웃겼습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단둘이 보냈습니다.

그래서 에르미온이 그녀의 남편을 만났을 때, 매우 힘들었습니다.

사실 내가 먼저 남편을 만나고 에르미온이 뒤에 그녀의 남편을 만났어야 하는 건데...

하룻밤 사이에 나는 다시 혼자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또한, 내 주변에는 나를 제외한 모든 친구들이 남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힘들었습니다.

다시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나를 버릴 수 없었습니다.

나도 그녀를 버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 친구가 될 운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


에르미온이 남자친구 생기고, 나는 본당의 신부님과 더 가까워졌습니다.  

'학생 공동체'라 부르던 신부님이 아니라 보디아에서 지내시다 오신 새로운 신부님이셨습니다. 

70살 연세에 흰색 콧수염이 있는 흰 머리카락과 흰 수염.

그가 항상 샌들을 신고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마치 산타 클로스 같은 신부님.


처음 만났을 때 신부님은 나에게 캄보디아 언어로 말을 했습니다.

나를 캄보디아 여자로 착각하다니... 분노했습니다.


사실 나도 헷갈릴 때 많지만 프랑스인이 나를 중국인으로 착각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을 혼동할 수 있니?  말도 안 돼! 넌 스웨덴 사람 아니니? "

프랑스에서도 같은 유럽이라도 나라 못 알아보면 열받아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 신부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여전히 어렵습니다.

정말 친하게 지냈는데 하룻밤 사이에 남남이 되었습니다.

내 남편을 만나 소개 한 이후로 그 신부님은 나와 연락을 끊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런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나에게 무엇을 기대했었나?

내가 수녀님 또는 봉헌된 처녀가 되기를 기대한 것 인가?

내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를 실망시켰나?'... 


결혼하기 전에 동거하면 죄라고 하셨습니다.

'죄'... 사랑해서 같이 사는 게 죄입니까?

뒤에서 비난하고 흉보는 게 죄입니까?

솔직히 요새 누가 지킵니까?

한국에선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사고'  결혼을 서둘러 했습니까?

그리고 그게 무슨 사고입니까!  

위선적이라고도 생각됩니다.


프랑스에서는 결혼비가 많이 들어 결혼 안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유럽에선 '나쁜 짓' 하신 신부님들도 요새는 다큐멘터리, 영화, 신문 기사에 나옵니다.

그분들도 사람들에게 결혼하기 전에 동거하면 '죄'라고 하셨을까요?


한국 드라마 '우영우 변호사'2회에선 부모님들이 하란 결혼 팽개치고 거기다 자긴 동성이랑 결혼한다 할 때 정말 후련했습니다.

3회 땐 자폐 자세히 설명해 주고 한국에 공부 압박감 스트레스 그리고 부모님의 처음에 잘못된 생각을 보여주니까 후련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이제 마인드를 바꿨으면 합니다.


나는 내가 결혼한다고 얘기했을 때 같이 잘 지내던 남자 친구들이 연락을 끊어 실망을 했습니다.

내가 그들을 결혼에 초대했는데도 결혼식에 오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너무 순진한 건가?' 

하지만 베스트 남자 친구가 있어, 그 친구로서 남자와 여자일지라도 친구로 남을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신부님은 미사 때 나에게 독서를 하라고 요청했고 무엇보다도 내가 노래 지휘하기를 원했습니다.

나는 음치는 아니지만 목소리가 작고 음이 높이 안 올라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격려와 지원 덕분에 잠시 동안 본당 식구들에게 노래 지휘를 하면서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오르간 연주자는 너무 뛰어나서 내 목소리에 맞게 음표를 낮출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쉬웠습니다.


신부님과 함께, 산책도 많이 하고 바다도 놀라갔었습니다. 그분은  생일마다 아름다운 책들을 주셨고, 내가 신앙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을 때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노란(카레)  요리해 주신적도 있고, 매우 나쁜 냄새가 나지만 맛이 좋은 이국적인 과일 인 '두리안' 맛도 보여주셨고, 운전 훈련도 시키기 위해 운전대도 건네주셨었습니다.


엄마가 프랑스에 오셨을 때, 신부님이 여행을 계획하셔서 엄마는 아름다운 여행 하시고 기뻐하셨었습니다.

그는 친할아버지와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룻밤 사이에 연락 두절된 생각 하면 쓴 맛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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