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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맹포토 Oct 10. 2023

구름과 안개, 고요함

사진으로 한국 수묵화를 오마주 하다

이번엔 살짝 시간을 되감아보겠다. 한국에선 여름의 끝자락에 다다를 즈음 어김없이 찾아오는 게 바로 태풍의 계절. 가을이 시작될 즈음의 산은 훌륭한 아침 안개를 선사하므로, 이 특별한 시기와 특별한 시간에 찍은 사진들을 보여드리려고 한다. 첫 번째는 아침 안갯속에서, 그다음은 태풍 시기에 찍은 것이다. 


사진 1. 아침 기온이 낮아지기 시작하면, 강이나 호수에서 다량의 안개가 피어 나온다. 나 같은 사진작가에게는 이 손에 잡히지도 않는, 떠다니는 장막을 포착할 수 있는 최적의 기간. 단 하나의 문제는 주로 이른 아침에만 볼 수 있다는 것이고, 사실 언제 나타날지 예상하기 힘들기도 하다. 결국 희망과 함께 나 자신을 일으켜서 일단 촬영 장소로 나가야만 한다. 


운이 좋다면, 일출 전에 안개가 형성될 것이다. 안개는 멀리 떨어진 모든 것을 감춰버림으로써, 남은 풍경을 더 신비롭게 만든다. 또 산마루 위아래로 춤추면서 풍경의 부분 부분을 숨겼다 드러냈다 한다. 그냥 봤을 땐 지나칠 수 있었던 부분도, 이 안개가 만들어낸 자연의 프레임에 따라 사진의 주제가 되곤 한다. 은은하고 조용한 피사체들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자연을, 나는 사랑한다. 


사진 2. 이 나무들은 안개 배경이 아니었다면 전혀 눈에 띄지 않았을 친구들이다. 천천히 색깔을 바꿔가는 엷은 안개에 풍경이 완전히 싸여있고, 아주 간단한 구성을 만들어졌다. 


시간이 흐르면, 회색 안개는 핑크빛 커튼으로 바뀌어 간다. 색의 변화는 처음에 아주 작은 부분에서만 눈에 띄다, 재빠르게 하늘의 절반을 채워버린다. 일출이 다가온다. 확실하게 어디서부터 나타날지 알아내기는 어렵지만, 마법 같은 엷은 안개의 중간 어디쯤일 것이다. 당연히 나는 카메라를 그 앞에 갖다 대고, 행운을 빌면서 그 지점이 나의 프레임에 담기기를 기대한다. 


사진 3. 이건 아무래도 내가 지금껏 찍은 일출 사진 중 가장 깔끔하다. 어떤 방해요소도 없이 주제가 되는 피사체만이 보이는 마법.


요기 있지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것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마치 나의 행성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행성의 일출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 두 세계 사이, 텅 빈 엷은 안개만이 자리를 잡고 있다. 태양은 너무나 멀게 보이고, 나는 내 바로 앞에 펼쳐진 단순한 아름다움에 사로잡히느라 얼굴을 내리쬐는 햇빛의 따사로움조차 거의 느낄 수가 없다. 이윽고, 모든 게 움직임 없이 공중에 떠있는 완전한 고요함의 순간. 


그러나 이 순간은 따스하고도 특별한 질감을 지닌 안개만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곧 태양의 열기는 엷은 안개를 소멸시키고, 경이로운 순간도 자취를 감춘다. 고요하고도 꿈만 같은 이 아침의 분위기를 마지막으로 담아낼 마지막 찬스다.

 

사진 4. 마지막으로 남은 고요한 아침의 모습,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엷은 안개의 마지막 파도가 아침 햇빛을 그대로 받아 빛나고 있다.


마법이 사라졌다. 이제 내려가서 아침 식사를 할 시간, 좋은 식사를 할 자격이 있는 날이다. 먹으면서도 나는 아침의 꿈만 같던 안개 풍경에 푹 빠져있을 테지만.


사진 5. 도시가 무거운 안갯속에 갇혀있는 동안, 아주 적은 인류는 엄청난 임대료(혹은 매매가)의 값어치를 하는 풍경을 얻는다. 


아침의 안개는 확실히 장엄하다. 그런데 여름 비는 또 다른 경이로운 힘을 가졌다. 습한 서울의 여름에는 비구름 안에 있는 것만이, 안개를 찾는 유일한 방법이다. 구름들이 걷히기 시작할 때까지 이곳에 머무르는 것, 여름이 내게 주는 가장 시적인 경험이다.


빗속의 여름. 갑작스레 모든 것이 회색이고, 기대도 하지 못했던 먼 발치의 능선이 엷은 안갯속 거대한 구멍으로 자취를 드러낸다. 하늘의 가차 없는 춤동작을 보며, 나는 1열에 자리를 잡았다. 길을 따라 움직일 필요조차 없이 여기 머물러서 구름이 변하는 모습과, 구름이 가리키는 것들을 지켜보면 된다. 


사진 6. 구름이 춤추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


다음은 이번 주제에서 도시를 담은 마지막 사진이다. 이런 풍경을 포착하긴 정말 어렵다. 


사진 7. 이렇게나 깨끗하고 낮은 구름이 만들어낸 천정을 만나는 일은 정말 드물다. 전설과 같은 남산타워는 구름 떼에 잡아먹힌 채로 모습을 드러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결과는 안갯속 첨탑이 마치 이미 잊힌 올림푸스처럼 도시 공중에 떠 있는 흔치 않은 모습.


남산타워가 산 꼭대기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인공 구조물은 아니다. 기상 관측소와 군사 시설이 전국 각지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보통 이들은 내가 자연과 함께 사색하는 걸 망치기도 해서, 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주 가끔, 이렇게 주요 피사체로 사용될 때가 있다.

 

사진 8. 이 사진은 마치 다른 행성에서 찍힌 듯하다. 이 안테나는 인류의 식민지인 프록시마 센타우리 b(태양계에서 지구와 가장 가까운 항성)에서 매 시간별 리포트를 지구로 보내주고 있는 게 아닐까. 흰 구름들에 맞서는 구조물의 대비가 정말 흥미롭다. 


사진 9. 프록시마 센타우리 b에서, 용감한 수리공이 안테나를 고치러 가는 길...


그러나, 나는 사진 속에서 사람의 구조물에 의존하기보다는 안갯속 산등성이 모습을 담아내는 게 훨씬 재밌다. 다음 사진은 첩첩산중 이어진 산을 찍은 것인데, 모습을 드러낸 산등성이들이 비구름에 길을 잃은 섬 같아 보인다. 


사진 10. 이 사진의 너무나 평화로운 느낌이 마음에 든다. 구름들이 테두리를 지니고는 있지만 아직 시작과 끝이 확실하게 보이진 않는다. 눈에 보이지만 확실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 능선을 더 돋보이게 해주는 존재다. 이 가벼운 면사포가 눈에는 순수한 즐거움을, 마음에는 평화를 선물한다. 

현실의 나는, 사진 찍는 내내 비에 두들겨 맞았다. 고요함과는 정반대의 상황!


다음 사진은 명확히 예술적 의도로 찍은 것이다. 한국의 수묵화를 보면, 작품의 구성에 안개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구름은 주제를 잘 보이는 곳에 놓고, 다른 모든 것을 숨겨 버린다. 이는 우리가 지금까지도 사진 작업에서 쓰는 요령이기도 하다. 여기, 옛 한국 수묵화에 대한 오마주라 할 수 있는 나의 결과물이다. 


사진 11. 옛 수묵화와는 달리, 내가 사진을 찍던 날에는 주요한 절벽이나 바위의 형체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래쪽 구름이 하늘과 연결되며 프레임을 만들어냈고, 능선 일부와 멀리 안테나를 동그랗게 둘러쌌다. 다도실에 놓인 병풍에도 이 사진이 어울릴 것만 같다. 당시 얼마나 바람이 많이 부는 고통스러운 날씨였는지, 무질서하게 구부러진 구름이 말해주고 있기도 하다. 언제나 깊이 빠져있고 싶은 풍경이다.  


아침 안개의 고요한 분위기와 함께 여름의 갑작스런 비를 보여드린 이번 글은, 작게나마 철학적인 말과 함께 마무리하고자 한다. 사진작가의 인생이란, 폭풍우 안에서 기류와 싸우며 평화로운 지역-나에게는 의미-을 찾아 날아다니는 새와 견주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진 12. 당신의 인생도 그러한가요? 우리 모두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인생 속에서 순수한 희망과 용기만으로 항해하는 자그마한 먼지가 아닐까요?


신비로운 구름과 안개의 세상에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유튜브 채널에서는 더 실감 나게 영상으로 저의 풍경사진 촬영 여정에 함께 하실 수 있어요. 인스타그램에도 더 많은 한국의 풍경 사진이 담겨있으니 많이 많이 들러서 감상해 주세요! 홈페이지 호맹포토의 Blog에는 다양한 풍경사진 촬영기가 영어와 프랑스어로도 작성되어 있습니다.


한국 자연사진 촬영에 대한 질문은 언제든지 아래쪽 댓글을 통해서 해주시고, 제 글도 공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여행에서 또 뵐게요.

아 비앙또! (À bientôt! : “또 만나요!”를 뜻하는 프랑스어)


*원고 번역 및 편집 : 김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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