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번역 체험기
나는 넓게는 인지과학과 좁게는 인지언어학을 전공한다. 현재까지 전공 관련 책과 최근에는 일반 독자도 읽을 수 있는 인문학책을 포함해 모두 60권 이상을 번역했다. 이 글에서는 내가 어떻게 번역을 시작했는지, 그 번역이란 것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앞으로의 번역이 어떤 모습일지 등 번역과 관련된 내 생각과 이런 내 생각에 자극을 준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박사과정에 입학한 뒤 군 복무 때문에 바로 휴학을 했다. 해군사관학교 영어 교관으로 3년간 근무하는 것이 나의 군 복무였다. 때는 1995년 7월이었다. 그 당시 사관학교 생도에게 영어 교육도 하면서 내가 관심을 두고 있던 인지과학과 인지언어학 책도 꾸준히 읽으면서 평범한 교관 생활을 하면서 지냈다.
그런 시간을 1년 반 정도 지냈을 무렵 내 인생에서 획기적인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국어학 전공이신 임지룡 교수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석사과정 때부터 학회에서 그분의 강연을 들으면서 깊은 인상을 받은 나는, 학과는 다르지만 개인적으로 교수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곤 했다. 한 번은 내가 인지언어학을 공부하면서 정리한 조잡한 내 논문들을 모아 어설프게 만든 논문집을 교수님께 드린 적도 있었다. 전화상으로 교수님은 1996년에 출간된 프리드리히 웅거러와 한스-요르그 슈미트(Friedrich Ungerer & Hans-Jörg Schmid)의 An Introduction to Cognitive Linguistics을 같이 강독하면서 공동번역을 하자는 제안을 하셨다. 난 너무 좋아 긍정의 답변을 드렸고, 바로 그 주에 교수님 연구실로 찾아가 강독과 번역을 동시에 진행했다. 그렇게 1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의 첫 번역서가 1998년 8월에 출간되었다. 이 번역서는 다음 해 문화관광부(현 세종도서) 우수도서로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 이후로 임지룡 교수님과 공동번역을 주로 했으며, 단독 번역도 간간이 진행했다. 1998년 첫 번역서 출간 이후 2023년 현재까지 61권의 번역서를 출간했다. 이는 해마다 평균 2, 3권의 번역서를 출간한 셈이다.
그렇다면 왜 나는 이렇게 번역에 목숨을 걸고 살았던 것일까? 사실 내 이름으로 책이 나오는 것이 좋았던 것이 첫 번째 이유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듯이, 책으로 내 이름을 남기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 이 이유는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일종의 겉멋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번역을 통해 그 책의 내용을 완전히 내 것으로 소화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번역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 책 내용은 당연히 잊힌다. 책 한 권을 번역하고 그 책의 진가를 내용을 완전히 ‘느끼는’ 시점은 최종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기 직전이다. 그때 “아아!”하는 감탄사가 나오면서 저자의 뜻이 명확해지는 순간을 느끼게 된다. 한 번은 석사과정 때 박사과정 선배 한 분이 논문을 읽으면서 그 논문 전체를 번역하는 것을 보았다. 그 당시 내가 책이나 논문을 읽는 방식은 보통 사람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논문을 읽으면서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긋고 핵심 내용을 옆에 노트하는 식이었다. 그 선배에게 그냥 읽으면서 요약하면 되지 뭘 그렇게 하나하나 번역을 다 하나고 궁금한 듯이 물었다. 그 선배는 “넌 머리가 좋은 모양이구나. 난 머리가 나빠 하나하나 온전히 번역해 두지 않으면 안 되거든”이라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때 난 번역에 대해 첫 번째 충격을 받았다. 우리말도 읽고 나면 바로 앞에 읽은 내용이 기억이 잘 나지 않을 때가 많은데, 영어 자료는 그 망각의 속도가 더 심할 것이다. 인간의 기억은 그 용량이 무궁무진하지 않고 제한되어 있다. 그러니 글로 옮겨놓지 않으면 그 내용이 바로 사라지는 일이 벌어진다.
세 번째 이유는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일정 수준 도움을 주고 싶다는 것이다. 특히 나의 인지언어학 번역서는 영문학과가 아닌 국문과와 기타 외국어를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더 도움이 되었다. 국어학과에서 개최하는 학술대회에 특강 요청이 있어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국어학 전공 교수님께서 나에게 참 고마운 분이라고 자기 제자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나의 번역서가 국어학 전공자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내 생각에 불을 붙인 사람은 동양철학을 공부하는 도올 김용옥 교수이다.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는데, 한 기자가 김용옥 교수의 연구실에 찾아와 인터뷰하는 장면이 있었다. 연구실 한쪽에 큰 책장이 있었고, 책장에 책이 꼭꼭 채워져 있었다. 기자는 그 책장 속의 책을 가리키며, “다음 작품 구상을 위해 참고하는 책들인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김용옥 교수는 입가에 미소를 살짝 보이면서 “그 책의 저자와 역자가 누구인지 자세히 보세요”라고 대답했다. 기자가 고개를 숙여 보니 그 많은 책이 모두 ‘김용옥 지음’ 또는 ‘김용옥 옮김’이라고 적혀 있었다. 놀란 기자는 김용옥 교수에게 번역에 관해 물었고, 그는 자신이 철학자나 교수라기보다는 “I am a translator(나는 번역가이다)”라는 말로 그 질문에 답을 시작했다. 그는 어려운 동양고전을 자기만 읽을 것이 아니라, 시장에 있는 일반 사람들도 읽고 좋은 감동과 지식을 얻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읽기도 힘든 동양고전을 어떻게 해서든 우리말도 옮기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김용옥 교수는 동양철학이라는 학문을 학문의 상아탑인 대학 내가 아닌 그 탑 밖의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진정한 학문은 그 분야를 전공하는 사람들만의 것이 아닌, 일반 대중들의 것이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번역 철학이었다. 이런 김용옥 교수의 번역 철학에 난 감동을 받았고, 나 자신이 번역에 몰두하는 일에 대한 정당성을 그로부터 확보할 수 있었다. 최근 나의 번역 주제는 순수한 전공이 아니라, 그 전공과 관련이 있으면서 일반 독자들도 관심을 갖고 읽을 수 있는 어느 정도 대중성이 있는 책들이다. 이런 책들로 대중들과 호흡하고 싶은 욕구가 나에게 생겼다.
사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번역에 대한 인식에서 큰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학술서 번역서가 교수임용이나 교수 승급을 판단하는 연구실적으로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국내 교수들은 번역에 집중할 이유가 거의 없다. 반면 일본에서는 학술 번역서가 학위논문으로도 인정될 만큼 연구실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 보니 일본에서는 많은 교수가 번역에 집중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인지언어학이라는 최신 책이 영미 학자들에 의해 2023년에 10권이 출간되었다고 하자. 일본에서는 이 10권을 번역하기 위해 10명의 번역자가 참여하여 1년 안에 모두 일본어 번역서가 출간된다. 반면, 국내에서는 번역자가 1명뿐이라서 10권을 번역하는 데 꼬박 10년이 걸린다. 문제는 2023년 한 해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다음 해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일본은 해마다 출간되는 10권을 1년 후에 모두 번역해 낸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2023년에 나온 책 중에 한 권도 제대도 번역해 내지 못한 상황이라 2024년에 나오는 또 10권의 번역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따라서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학술서의 자국어 번역서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봐도 된다. 일본의 인지언어학도들은 자국어로 된 책을 편하게 읽으면서 그 내용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지만, 우리나라의 학도들은 국내 번역서의 부족으로 그 지식이 쌓일 리가 없다. 그래서 국내 인지언어학의 수준은 일본의 수준을 따라갈 수 없는 실정이 되어 버렸다.
구글 번역기와 알파고 등 자동번역기가 지속해서 발전하는 상황에서 ‘번역’과 ‘번역서’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번역기가 발전하고 있다는 현상 자체는 번역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대변한다. 번역이 중요한 것이니 이런 번역기도 그 기능이나 성능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물론 현재로서는 이런 번역기의 결과물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이긴 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런 번역기의 수준이 인간의 지능을 따라잡을지도 모른다. 지난주 친한 동료 교수가 커피를 한 잔 마시러 내 연구실에 왔다. 자리에 앉으면서 하는 첫마디가 ChatGPT 같은 괴물이 나왔고, 번역 알고리즘도 계속 발전되어 나가니,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번역서 출간이 타격을 받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렇다, 이젠 번역서 출간이 타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이 지금 당장 닥친 것은 아니다. 향후 5년 혹은 10년까지는 미세한 영향은 받겠지만 번역서 출간은 꾸준히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 이후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번역서 표지에 ‘구글 번역기 옮김’, ‘알파고 옮김이라고 인쇄되어 나오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이런 번역기의 출현으로 지식을 전달해 줄 신간들이 쏟아져 나와도 이제는 걱정이 없다. 번역기가 번역해 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정말 위험한 일이 있다. 번역기의 성능이 지금 수준이라 수많은 오류를 담고 있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지금처럼 전문가들이 번역기의 결과물에서 그 오류를 찾아 수정하면 되니 말이다. 문제는 번역기의 수준이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서 독자적으로 번역을 척척 해내는 수준이 되는 순간이다. 그때 번역의 수준은 전문가의 검토가 필요 없는 정도일 것이다. 문제는 그 시점이 되면 번역 알고리즘이 의도적으로 오류를 삽입해 우리에게 허위 정보를 전달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서운 점이다. 그래서 번역기의 성능에 상관없이 전문가의 검토는 반드시 필요하다. ‘비의도적 오류’와 ‘의도적 오류’ 모두를 전문가가 찾아내 바로 잡아야 한다. 결국 앞으로 번역서가 출간될 때는 표지에 ‘알파고 옮김, 홍길동 감수’라고 적혀 있어야 한다. 좋은 의미에서 번역 알고리즘과 인간 전문가의 협업이다. 사실은 번역 알고리즘을 이제는 우리 인간 전문가가 체크하고 통제해야 한다. 이때 인간 전문가는 번역 알고리즘의 결과물을 대략 읽는 것이 아니라, 원서와 일대일로 꼼꼼한 대조를 하면서 감수를 해야 한다.
우리 인간이 IT 알고리즘의 도움을 받아 구매 상품을 추천받고, 보고 싶은 영화를 추천받는다. 사실 말이 좋아 도움이지, 실제는 우리 인간이 이런 알고리즘의 통제권 내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번역의 경우는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 우리 인간이 번역 알고리즘을 우리의 통제권 내에 두어야 한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동물을 우리 일상 삶이나 전쟁에서 활용했던 것처럼, 번역 알고리즘을 비롯해 다양한 첨단 알고리즘을 동물 같은 ‘새로운 품종’으로 이용하고 통제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 인간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품종 목록에 로봇을 포함할 수 있도록 우리는 엄청난 지식을 쌓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더욱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