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기억 속에 무기력하게 내리는 11월의 눈물
앨범: November Rain
발매: 2014.10.29.
작곡: 잔나비
작사: 잔나비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ZsuX9aSst-4
숨 쉴 수가 없어
움직일 수조차 없어
비가 온다 그날처럼
나 울 수도 없고
웃어볼 수조차 없어
비가 온다 눈이 되지 못한 채
기억 속에 노벰버 레인
살며시 두 눈가에 맺힌다 또 맺힌다
들려오는 빗소리에
감춰둔 기억마저 젖는다 오 젖는다
잊혀질 수 없어
기억은 계절을 흘러
비가 된다 눈이 되지 못한 채
기억 속에 노벰버 레인
살며시 두 눈가에 맺힌다 또 맺힌다
들려오는 빗소리에
감춰둔 기억마저 젖는다 오 젖는다
기억 속에 노벰버 레인
또 다시 두 눈가에 맺힐 땐 또 맺힐 땐
들려오는 빗소리도
따스한 추억으로 흐르길 또 흐르길
거리거리 수놓았던
낙엽이 회색빛에 물들면 또 물들면
하염없이 흐르는 비
그대로 눈이 되어 내려라 오 내려라
겨울, 고요한 아침
커튼, 그 새로 흩날리는 설레임
(겨울이 오길)
다시 흰 눈을 기다리는 철없는 아이처럼 따스한
(겨울이 오길)
이 곡을 듣고 또 들었다. 들으면서 드는 느낌은 이 노래를 부르는 잔나비가 11월 비가 오는 어느 날 참 많이도 우울했구나 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우울했으면 가을보다 생활하기가 더 힘든 추운 겨울을 기다리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사람의 감정을 가라앉게 만드는 11월 가을, 거기다 비까지 내린다. 그런 고독함과 우울함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는 곡이 아닐까라는 것이 나의 단순한 결론이었다.
이런 결론을 내리고 이 곡을 다시 들었다. 그런데 이 곡을 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발견하지 못한 뭔가가 더 있다는 생각이 나의 뇌리를 떠나질 않았다. 그것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무엇 때문에 잔나비는 이렇게 우울한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그러다 네이버 검색을 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이 곡을 듣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또 어떻게들 이 곡을 해석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이 곡이 담긴 앨범을 소개하는 사이트를 찾았다. “타이틀곡 November Rain은 어린 시절부터 동고동락하며 지내 온 멤버들의 고등학교 시절 겪은 지인의 죽음을 기억하며 만든 곡이다. 그날 내렸던 11월의 비처럼 차가운 기억들이 곧 눈이 되어서 따스하게 내릴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곡이다”라는 이 곡에 대한 설명을 담겨 있었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잔나비의 우울함은 단순히 낙엽 떨어진 가을의 우울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인의 ‘죽음’이었다. 자연 현상에 따른 우울함이 아닌, 지인의 죽음으로 인해 느끼게 된 우울함이었다. 물론 죽음도 자연 현상에 따른 결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연적 죽음이 아닌 사고로 인한 죽음도 있다. 자연 현상이든 사고이든 그 원인에 상관없이 우리에게 죽음은 너무나 무서운 사건이다. 그런 죽음이 잔나비의 지인에게 닥친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원초적으로 우울함을 가장 많이 느끼는 계절인 11월 가을에 말이다. 그리고 그 우울함을 더 우울하게 만들어주는 비까지 내린다.
잔나비는 숨을 쉬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인간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속성인 ‘호흡’과 ‘움직임’이 잔나비의 것이 아니었다. 인간과 포유류 동물을 포함해 파충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의 뇌에는 뇌간(brain stem)과 기저핵(basal ganglia)이라는 부위가 있다. 이런 부위는 주로 호흡, 심박수, 그리고 기본적인 신체 기능을 조절하고, 또한 기본적인 생존 본능에도 관여한다. 지금 잔나비는 이 부위가 망가진 상태이다. 호흡의 멈춤과 움직임의 결핍은 곧 죽음이다. 즉, 잔나비는 지금 죽음의 몸 상태이다. 이런 몸 상태에서 비가 온다.
잔나비는 웃지도 못하고 울 수도 없는 심리 상태이다. 파충류를 제외한 모든 포유류 동물과 인간을 포함한 영장류 동물의 뇌에는 변연계(limbic system)가 있다. 이 뇌 부위는 감정을 처리하고, 기억을 형성하며, 감정과 관련된 신체 기능을 조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지금 잔나비는 울고 웃는 감정 표현을 할 수가 없는 심리 상태이다. 이런 심리 상태에서 비가 온다. 비가 눈이 되지 못한 채 내리는 것을 잔나비는 아쉬워한다.
지인의 죽음이 기억나는 11월의 비 내리는 날이다. ‘살며시 두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또 맺힌다’. 눈물을 닮아줄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눈물도 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비도 내리고 눈물도 흐른다. 하늘도 울고 잔나비도 우는 ‘슬픔의 세계’가 형성되어 버렸다. 잔나비의 슬픔에 하늘도 공감하듯 비를 내려 주는 모습은 인간의 슬픔과 자연의 슬픔이 융합된 모습이다. 빗소리를 듣고 억지로 ‘감춰둔 기억’을 떠올려 그 기억마저 비가 적신다. 잔나비에게 ‘기억’은 비에 젖는 것으로 개념화되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비에 젖는 것은 우리가 입은 옷이나 몸의 일부 혹은 머리카락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잔나비의 개념화에서는 기억도 비에 젖는 대상이 된다. 지인의 죽음에 대한 기억이 11월 가을비에 젖고 있다. 비에 젖은 이 기억은 가볍지 않고 더 무거워진다. 몸이 무거워 활동을 못 하고, 마음이 무거워 우울 상태로 진입하듯이, 무거워진 기억은 더 깊숙이 우리 속에 짓눌려 내려앉아 그 기억을 더욱더 지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지워질 수 없는 기억, 잊혀질 수 없는 기억은 또다시 눈이 되지 못한 채 비가 된다. 다시 한번 잔나비는 비가 눈이 되길 간절히 바라본다.
지인의 죽음에 대한 ‘기억’과 그 죽음을 더욱 환기하는 11월의 빗소리가 너무 힘들다. 그래서 잔나비는 이 ‘빗소리가 따스한 추억으로 흐르길’ 간절히 바란다. ‘기억’과 ‘추억’은 사실 같은 것이다. 영어로는 둘 다 memory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똑같은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해 잔나비가 갖는 마음속 현상인 기억과 추억 중에서 잔나비는 이제 ‘죽음의 추억’을 원하고 있다.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기억은 정적이다. 기억은 제자리에 있고, 내리는 비에 젖는 수동적 대상이다. 비에 젖은 죽음에 대한 기억은 너무 무거워 주체인 나마저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지점까지 다다랐다. 이에 반해 추억은 동적이다. 따스한 추억은 흐르는 활동적 대상이다. 추억에는 움직임이 있다. 지인의 죽음에 힘들어하는 잔나비는 숨을 쉬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잔나비는 이제 움직이고 싶어 유동적 대상인 죽음의 추억을 원하고 있다.
‘거리거리 수놓았던 낙엽이 회색빛에 물들면 하염없이 흐르는 비 그대로 눈이 되어 내려라’라고 소리 내어 외친다. 가을의 상징인 낙엽은 갈색이지만 겨울로 가까이 갈수록 그 색은 회색빛으로 물들게 된다. 가을을 대표하는 11월의 비가 이제는 겨울을 상징하는 눈으로 내리길 잔나비는 큰 소리로 원하고 있다. 잔나비가 겨울 자체를 좋아해서 낙엽의 회색빛과 눈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11월의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잔나비 스스로 이런 슬픔을 극복할 능동적 힘을 갖지 못하다 보니 가을이 대신 자연법칙을 따라 겨울로 흘러가 주길 바라는 것이다.
‘겨울, 고요한 아침’이다. ‘커튼, 그 새로 흩날리는 설레임’이 있다. ‘다시 흰 눈을 기다리는 철없는 아이처럼 따스한 (겨울이 오길)’ 바라고 있다. 겨울은 따스하지 않다. 하지만 ‘차가운 주검’에 비하면 흰 눈 내리는 겨울은 상대적으로 따스한 것이다. 잔나비가 바라는 ‘따스한 겨울’이 그들에게 흘러 들어가 아픈 기억이 ‘따스한 추억’으로 변해 그들 마음속에 존재하기를 나 역시 간절히 바란다.
죽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 중 하나가 죽음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죽는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그래서 죽음이 인간을 규정짓고 특징짓는 속성이 되는 것이다.
이 죽음과 맞서 싸우는 과학기술 운동이 있다. 그것은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이다. 이 운동은 인간의 노화, 고통, 죽음을 최소화하거나 근절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결국 이 운동의 최종 목표는 죽음이 아닌 ‘불멸’이다. 불멸을 위해 크라이오닉스(cryonics; 냉동보존술)도 동원하기까지 한다. 사실 인간이 불멸을 얻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나쁜 것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레이 커즈와일 같은 미래학자는 특이점(singularity)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불멸이 2045년이 되면 달성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실 그날이 올지 안 올지도 잘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고통과 죽음이라는 것이 너무 치명적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이들을 없애기 위한 과학적 노력도 중요하지만, 이런 고통과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의 감정에 공감하는 노력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인간에게는 거울 뉴런이라는 세포가 존재한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공감 능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른바 ‘트랜스휴머니즘’의 과학적 노력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이 ‘거울 뉴런’이 발현된 진정한 ‘휴머니즘’이 동반되어야만 비로소 완성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