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이 단념의 미학을 느끼길 바라며!
앨범: 잔나비 소곡집 Ⅱ: 초록을거머쥔우리는
발매: 2022.05.10.
작곡: 최정훈
작사: 최정훈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4kZYcU0Fyeg
이 밤 누구의 사랑이 되어
춤을 추는가요?
찬 겨울 다 가고서야
무리를 지어낸 마음들
내 사랑 그 애는 또 누구의 사랑이 되어
피고 또 피었던데
찬 계절이 제 몫인 듯
고갤 떨구는 내 마음
음 나의 사랑은
나를 떠나지 말아주오
한바탕 어지러운 이 봄날엔
저물어만 갈텐데
단념, 그 일은 어려운 일도 아녜요
나는 아주 잘해서
이토록 무던한 내가
좋아질 때도 있어요
음 나의 사랑은
나를 떠나지 말아주오
한바탕 어지러운 이 봄날엔
저물어만 갈텐데
봄은 마지막 계절이 되어
끝이 나야 해요
저 피어난 꽃을 보면 그냥 내 마음이 그래요
이 곡은 제목부터 뭔가 특이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닌 ‘여름 가을 겨울 봄’이라니! 아니, ‘여름가을겨울 봄’이라니! ‘여름가을겨울’이 마치 한 단어처럼 붙어 있고, ‘봄’만 독립해 앞의 세 계절과 거리를 두고 있다. 여기에는 아주 특별한 이유가 있는 듯 보였다. 흔히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나온다고 한다. 여러 가수들이 출연하는 음악 공연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가수가 맨 마지막에 나오면서 멋지게 대미를 장식하듯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이 맨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듯이, 잔나비는 다른 계절이 아닌 ‘봄’에 이 자리를 내어주었다. 봄 외의 나머지 계절인 여름, 가을, 겨울은 평범한 띄어쓰기 패턴을 따르지 않고 ‘여름가을겨울’에서 보듯이 한 단어처럼 뭉쳐져 있으니 읽기도 불편하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무슨 단어인지 알기도 어렵다. 어쩌면 이 세 계절을 구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일부러 띄어쓰기 패턴을 무시한 것이 아닐까! 이 곡에서 중요한 것은 봄이다. 나머지 계절은 관심 밖에 있으므로 각 특징을 별도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오직 봄만 독립해 있으니 봄의 특징을 중점적으로 보려고 한다.
이 곡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나’와 ‘내 사랑 그 애’이다. 나는 내 사랑 그 애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이 밤’ 내 사랑은 ‘누구의 사랑이 되어 춤을 추는가?’라고 묻는다. 또 이어서 ‘내 사랑 그 애는 또 누구의 사랑이 되어 피고 또 피었던데’라고 혼잣말을 한다. 내 사랑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춤을 추면서 사랑에 빠져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잔나비의 곡이 아닌 다른 대중가요였다면 이렇게 단순하게 해석하겠지만, 잔나비는 그 이상을 노래 속에 가지고 있는 듯하다.
1연에 등장하는 같이 추는 ‘춤’과 2연에 등장하는 피어나는 ‘봄’은 구조상 동일시되고 있다. ‘춤은 봄이다’ 또는 ‘봄은 춤이다’라는 은유가 보인다. 춤을 이해하고 싶어서 봄이라는 대상을 가져와 둘을 비교하든, 봄을 이해하고 싶어서 춤이라는 대상을 가져와 둘을 비교하든, ‘춤=봄’이라는 방정식이 나온다.
인간에게는 고유수용감각(proprioception)이 있다. 이는 시각적 단서에 의존하지 않고도 내 신체 부위의 위치와 움직임, 방향을 지각할 수 있게 해주는 감각이다. 공간에서 내 몸의 위치와 여러 신체 부위의 상대적인 위치에 대한 인식을 제공하는 것이 고유수용감각인 것이다. 또 다른 감각으로 내수용감각(interoception)이 있다. 이는 내 몸의 내부 감각과 생리적 상태를 지각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감각이다. 이 두 감각이 서로 다른 감각이지만 모두 내 몸에 대한 감각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한 사람의 몸에 관한 감각 외에, 나와 타자의 관계에 관한 감각도 있다. 그것은 육체수용감각(corporoception)이다. 이 감각은 내 몸을 타자 몸을 통해 상대적으로 지각하는 능력이다. 예를 들어, 두 남녀 무용수의 발레는 이러한 육체수용감각을 가장 잘 보여준다. 이 둘이 펼쳐 보이는 동작은 내 몸과 타자 몸의 만남이자 어울림이다. 이러한 동작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까지 보여주기도 하므로 이들의 멋진 동작을 보면서 사람들은 기립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이들의 멋진 안무는 우리의 이성과 논리를 초월하는 것이므로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 춤이란 바로 나와 타자의 합리적 이성을 초월하는 행위이다. 결과적으로 춤이란 보는 이들에게는 감탄을 자아내고 예술적으로는 아름다움을 창조해 낸다.
이 곡에서 잔나비는 춤을 봄에 비유했다. 봄은 어떤 계절인가? 겨울과 상대적으로 기온이 온화한 계절인 봄에는 겨우내 잠자고 있던 나무와 식물이 새잎과 화려한 꽃을 피우며 깨어난다. 겨울의 황량하고 눈 덮인 풍경과는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기온이 상승하며 일조량이 증가함에 따라 풀과 나뭇잎이 더욱 짙은 녹색으로 변한다. 봄에는 겨울에 떠났던 철새들이 돌아오고, 다양한 야생동물이 짝짓기를 시작한다. 그래서 새들의 노랫소리를 많이 들을 수 있고 둥지를 짓는 모습도 관찰할 수 있다. 이처럼 봄은 활력과 성장, 그리고 더욱 따뜻하고 화창한 날을 약속하는 계절이다. 자연이 놀라운 변화를 겪는 시기이며, 사람들은 겨울의 추위와 어둠에서 벗어나면서 활기차고 낙관적인 기분을 느끼곤 한다. 봄에 꽃이 피고 동물들이 활동을 시작하는 것은 이런 생명체의 역할뿐만 아니라 따뜻하고 드넓은 대지와의 조화가 있기 때문이다.
‘찬 겨울 다 가고서야’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내어’ 집단적 마음을 형성한다. 찬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만물이 대지를 뚫고 나와 이 세상에서 무리를 지어 어울려야 한다. 그런데 내 사랑은 세상에 나왔지만 어울림이 없다. 봄이지만 봄의 모습에 동화되지 못하고 있다. 내 사랑은 아직도 ‘찬 계절’에 머물러 있다. 이를 지켜보고 있으니 안타까움에 ‘내 마음은 고갤 떨군다’. 지금 이 봄에 나 역시 이 세상에 나와 있는데 내 사랑이 봄에 동화되지 못하고서 나마저 등질 것 같은 걱정이 앞선다. 그래서 나는 내 사랑에게 ‘나를 떠나지 말아주오’라고 마음속으로 외친다. 나의 외침이 내 사랑을 향하지만 내 사랑은 나의 언어를 듣지 못한다. 나는 내 사랑이 들어주길 마음속으로만 간절히 바랄 뿐이다. 모두가 어울려 이리 돌고 저리 돌면서 춤을 추는 것과 같은 ‘한바탕 어지러운 이 봄날’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저물어 간다’. 창조와 아름다움의 이 봄날에 내 사랑이 나를 포함한 타자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조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모습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내 사랑은 왜 타자와 어울리지 못할까? 그 이유는 내 사랑 그 애는 자의식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자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그 애를 둘러싸고 있어서 타자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는 것이다. 내 사랑 그 애는 자기의식과 자아를 버려야 한다. ‘단념’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그 일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나는 계속 부딪혀온 세상의 곤란함 속에서 단념을 배운 지 오래이다. 이미 나는 단념을 ‘아주 잘해서’ ‘이토록 무던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고, 다소는 쓸쓸한 감도 있지만 이러한 ‘내가 좋아’지기까지 한다.
흔히들 사회생활을 잘하려면 집에 간과 쓸개를 다 꺼내놓고 다니라고 말한다. 말도 안 되는 직장 상사의 업무 지시나 주변 사람들이 하는 행동들이 거슬리고 비위가 상하는 일이 생기니 간과 쓸개는 미리 꺼내놓고 나오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난 무던한 존재가 되고 포기할 것은 편하게 포기하고 ‘단념’하게 되기도 한다. 무던한 성격을 갖기 위해 상징적 의미로 간과 쓸개를 비우듯, 내 사랑 그 애도 타인과 무던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자기만의 자아를 던져 버리고 단념을 배웠으면 좋겠다.
4계절 중에서 제일 중요한 ‘봄은 마지막 계절이 되어 끝이 나야 한다’. ‘저 피어난 꽃을 보면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 나는 내 사랑 그 애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는다. 내 사랑이 타인과 어울려 이 활기찬 봄날에 조화를 만들어 낼 수 있기 위해 자의식을 접어두는 단념의 미학을 느끼기를 바란다. 혹여 이런 조언을 했다가는 내 사랑이 더욱더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까 봐 나는 매우 조심스럽다. 어차피 언어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는 듯도 하니 말이다.
이 곡을 잘 나타낸 뮤직비디오에서 내내 가면을 쓰고 있던 ‘내 사랑 그 애’는 마지막 장면에서 가면을 벗어 던진다. 말없이 기다리던 그의 진실한 마음이 드디어 통했던 것일까! 이제 내 사랑 그 애는 일 년의 마지막 계절인 어느 봄날에 나와 춤을 출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피어난 꽃을 보며 그냥 그렇게 욕심 없이 바랬던 내 마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