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불비 Oct 13. 2023

<나는 볼 수 없던 이야기>

슬픈 소녀를 위로하는 바람과 시간, 그리고 나

앨범: 로맨스는 별책부록 OST Part 1

발매: 2019.02.03.

작곡: 최정훈, 김도형, 유영현

작사: 최정훈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7z_IVpK5vBc


나는 볼 수 없던 이야기

이젠 그 얘기를 해주실래요

슬픈 표정 짓지 않아요

애써 웃으려도 하지 않을게

흘린 눈물을 닦아내는

그 손이 참 가여워만 보여도

쉽게 건넨 마음은 아닐까

망설이는 내가 나도 참 미운걸     


바람 불어와

서러운 마음을 달래고

시간은 또 흘러서 언젠가는 그 끝에선

새하얀 웃음으로     


멈춰진 것 같던 시간들

그댈 향해 흐르고 있었네요

맘 졸인 시간이 있기에

알 수 있을 거예요 내 맘과 같이     


바람 불어와

서러운 마음을 달래고

시간은 또 흘러서 언젠가는 그 끝에선

새하얀 웃음으로

우 이런 내 위로는 그리 간단치가 않아서

이제야 건넨걸요 내 손 잡아요     


나는 보아요

아련히 옅은 빛을 띄다 싸늘히 식어가도

지친 하루 그 끝에서

찬란한 꿈으로 

출처: https://pixabay.com/illustrations/girl-sad-crying-art-illustration-638061/


슬픈 소녀를 위로하는 바람과 시간, 그리고 나


오래 기억되는 슬픔의 감정


주변을 둘러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웃는 얼굴, 우는 얼굴, 화난 얼굴 등 다양한 표정도 관찰할 수 있다. 인간의 여러 가지 감정을 매우 간단한 이분법에 따라 분류해 보면 ‘웃음과 울음’ 또는 ‘기쁨과 슬픔’이라는 두 가지 감정으로 압축된다. 이분법을 이루는 두 요소는 매우 대조적이지만 동시에 대등하다. 이 두 가지 감정을 느끼는 빈도와 감정이 지속되는 시간 또한 같을까? 두 감정을 느끼는 빈도부터 살펴보자. 우리 삶에서 기쁜 일이 슬픈 일보다 더 많이 일어나거나 반대로 슬픈 일이 기쁜 일보다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기억할 만한 사건에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정들을 제외한다면 사실 우리의 삶은 지루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일상을 뛰어넘는 슬픔이나 기쁨의 자극이 그다지 자주 발생하는 것은 아니므로 대부분이 평범한 기억들 속에 덮여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내 삶에서 유추해보자면 주어진 루틴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삶의 속성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삶의 대부분은 중립적 감정이 우세하다고 본다. 어떤 특별한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야 기쁨과 슬픔의 감정이 뇌리에 기억되는 것으로 보면 아무리 다양한 사건들을 스쳐온 인생이라 할지라도 중요한 몇 가지 사건에서 받았던 감정들만이 인생에서 커다란 굴곡으로 남아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두 감정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지속되는 시간에는 차이가 있다. 기쁨과 슬픔 중에서 어떤 감정이 더 오래 지속될까? 답을 말하기 전에 어떤 감정이 더 오래 지속되어 왔는지 지금까지 각자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 보자. 그렇다. 대체로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 오래 우리의 친구 노릇을 한다. 좋은 일은 금방 망각되지만 슬픈 일은 우리 기억 속에 더 오래 남는다. 기쁨과 슬픔을 가장 잘 상징하는 것이 결혼식과 장례식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함께 하길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므로 특별히 바쁘지 않다면 지인의 결혼식과 장례식에는 꼭 참석하려고 한다. 하지만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때 우리는 결혼식보다는 장례식에 못 간 것을 더 미안하게 생각한다. 왜 그럴까? 슬픔의 감정이 더 오래 남아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슬픈 소녀를 위로하는 바람과 시간


과거 저 먼 곳에 한 소녀가 홀로 던져져 있다. 그 소녀는 많은 일을 겪었고 그 결과 많은 슬픔도 느꼈다. 지금도 소녀의 슬픔은 현재 진행형이다. 소녀가 겪은 슬픈 이야기는 ‘나는 볼 수 없던 이야기’이다. 과거에 소녀가 살았던 시간과 장소는 나의 것과 달라서 이는 불가피하지만 지금 소녀와 나는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에 함께 있다. 소녀에게 ‘이젠 그 얘기를 해달라고’ 내 마음을 건넨다. 소녀의 이야기를 들어도 쉽게 ‘슬픈 표정 짓지 않을 것이고’, 혹 슬픔을 소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써 웃으려도 하지 않겠다’라고 말한다. 소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려 한다. 그 순간 홀로 겪었던 슬픈 일이 다시 그녀를 덮쳐와 ‘눈물’을 자아낸다. 소녀의 ‘가여운 손’이 ‘흘린 눈물을 닦아낸다’. 과거에 흘렸던 눈물이 지금 이곳까지 연결되어 흐르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아프다. 그녀의 슬픔을 너무 가볍게 생각한 것은 아닌가 자신을 반성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나도 ‘쉽게 건넨 마음은 아니었다’. 


소녀는 이야기를 꺼낸다. 슬픔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의미를 가진다. ‘사건’이라는 원인과 ‘슬픔’이라는 결과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현재 나는 그녀의 곁에 머물 수 있다. ‘바람이 불어와 소녀의 서러운 마음을 달래고’, ‘시간은 그녀에게 새하얀 웃음을 준다’. 사람의 슬픔을 위로하는 것은 단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람이라는 자연이 있고, 초자연적 존재인 시간이 있다.


과거의 슬픔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을 보니, 소녀의 시간은 과거에 멈춰져 있으며 현재마저 과거가 되어 ‘그 시간들이 소녀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를 향해 흐르는 시간은 슬픔이 묻어 있는 두 시점의 과거(실재하는 과거와 그때와 연결 선상에 있는 현재라는 가상의 과거)에서 ‘시간은 또 흘러서 언젠가는 그 끝에 도달해 새하얀 웃음’이라는 선물을 그녀에게 선사할 것이다.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고 새로운 현재와 조우하려면 소녀는 시간을 믿으면 된다. 나는 그녀를 위로하는 바람과 시간이라는 거대한 실체 앞에서 내 위로는 보잘것없음을 알지만 ‘이제야 내 손을 소녀에게 건넨다’. 소녀의 ‘지친 하루 그 끝에 찬란한 꿈’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나는 보인다’. 물론 그 찬란한 꿈은 ‘아련히 옅은 빛을 띠다 싸늘히 식어갈 수 있’을지라도. 이제 소녀는 혼자가 아니다. 소녀의 곁에는 내가 서 있다. 그리고 바람과 시간도 우리 곁에 영원히 머물 것이다. 


슬픔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려면 우리는 공감, 연민, 감수성 등을 발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에 견줄 수 없이 영원하고 초자연적인 후원자도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바람’으로 대표되는 자연과 ‘시간’이다. 결국 인간은 거부할 수 없는 자연과 시간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종속이라는 개념은 부정의 뉘앙스를 풍겨서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나의 슬픔을 위로하는 대상이 마침내 자연과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종속’이라는 단어의 안전함에 나를 맡기고 염치없이 신세마저 지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