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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비 Oct 21. 2022

《Drunk》와의 첫 만남

《Drunk》와의 첫 만남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도올 김용옥 교수의 인터뷰 방송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있었다. 여러 직업을 아우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김용옥 교수에게 기자가 직업에 관해 질문하자 그는 영어로 ‘I am a translator(나는 번역가이다)’라고 대답했다. 교수이자 철학자이자 방송인이지만 자기는 번역가란 것이다. 그러면서 동양철학에서 번역이 왜 중요한지를 피력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려운 동양고전을 자기만 읽을 것이 아니라, 시장에 있는 일반 사람들도 읽고 좋은 감동과 지식을 얻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읽기도 힘든 동양고전을 어떻게 해서든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난 공감과 충격을 동시에 받았고, 그 이후로 번역, 특히 학술 도서의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느끼고 인식하면서 이를 행동으로 옮기고자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 삶을 산 지 2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지금 60권 이상의 번역서가 이 세상에 나왔다. 그 한 권 한 권과의 만남은 날 설레게 했다. 그 설렘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이제 다시 한 권씩 읽고자 한다. 그 책을 장별로 다시 읽으면서 그 장에서 원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그리고 번역가인 내가 그 장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다. 


오늘 읽고자 하는 책은 2022년 9월에 도서출판 고반에서 출간한 《취함의 미학》이다. 번역서라면 당연히 그 책의 원서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먼저 이 책의 원서와의 첫 만남을 이야기해 볼까 한다. 그 원서는 《Drunk: How We Sipped, Danced, And Stumbled Our Way To Civilization》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술 취함: 우리는 어떻게 술을 홀짝홀짝 마시고, 춤추고, 비틀거리며 문명을 향해 나아갔는가” 정도 될 것 같다. 이 책은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UBC) 동양철학 교수인 에드워드 슬링거랜드(Edward Slingerland; 1968~ )가 2021년 6월 1일에 출간한 책이다. 이 책의 출간 일자를 이렇게 정확히 명시하는 것은 내가 이 책을 접한 일자와 비교하기 위함이다. 나는 이 책의 초고를 2020년 10월 20일에 입수했다. 공식 출간일보다 약 7개월 먼저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슬링거랜드 교수가 개인적으로 나에게 이 책의 초고를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슬링거랜드

슬링거랜드 교수와 나의 인연은 그가 2008년에 출간한 《What Science Offers the Humanities: Integrating Body and Culture》(과학이 인문학에 제공하는 것: 마음과 문화의 통합)를 내가 한국어판 《과학과 인문학: 몸과 문화의 통합》(2015)으로 번역해 출간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당시 나는 인지언어학에 심취해 있었다. 인지언어학은 인간이 자신의 몸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정의되는 ‘인지’와 인간성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요소인 ‘언어’가 만났다는 점에서 너무나 인간적인 인문학 분야이다. 즉, 인간을 가장 중심에 두는 학문이다. 인지언어학은 학제적 성향을 띄다 보니 통섭 학문을 하기에 최적의 분야로 평가된다. 


학제성(學際性; interdisciplinarity)을 추구하는 나의 성향과 동양고전 분석에 인지언어학의 패러다임을 적용하던 슬링거랜드 교수의 학문적 성향이 교묘하게 어울려 깊은 울림을 자아냈다. 이런 탓에 나는 자연스럽게 인지과학과 인문학의 통섭을 추구하던 그의 2008년도 책에 관심과 애착이 갔다. 이런 나의 애착을 실현하는 데 ‘2006 올해의 출판인’ 본상 수상자인 장인용 지호출판사 대표가 전폭적인 도움을 주셨다. 지호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이 책의 번역에 착수하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노골적으로 말하면 ‘죽는 줄’ 알았다. 공동번역을 맡아주신 최영호 교수님의 필력이 좋으셔서어 다행히 그 책을 출간할 수 있게 되었다. 힘든 번역 과정 중 몇 차례에 걸쳐 이메일로 질문을 던지면서 슬링거랜드 교수를 많이도 괴롭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둘은 친해지게 되었고, 원저자는 한국어판 출간을 축하하는 서문도 보내주었다. (여담이지만 슬링거랜드 교수는 나보다 한 살 위라 나에게는 형이다.) 


이 책 이후에도 슬링거랜드 교수의 다른 책 2권의 번역도 내가 맡아 한국어판을 출간하게 되어 슬링거랜드 교수와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던 와중 2019년 말에 나는 그에게 지나가는 말로 현재 준비 중인 책이 있냐고 물었다. 그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흔쾌히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그 책의 초고가 나오면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한국시간으로 2020년 10월 20일 오전 5시 14분에 그 초고 파일을 나에게 이메일로 보내주면서 그 약속을 지켰다. 이처럼 2014년에 슬링거랜드 교수와 주고받은 이메일 덕택에 《취함의 미학》의 원서를 공식 출간 일자보다 7개월 먼저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Drunk》라는 책을 국내에서 가장 먼저 읽은 사람은 당연히 번역가인 나다. 아마 전 세계적으로도 이 책의 제작에 참여한 분들을 제외하고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은 일반 독자의 순위에 나는 적어도 3등 안에는 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 세계에서는 내가 1등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이유는, 이 책이 2022년 9월 스페인어판, 이탈리아어판, 한국어판이 동시에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슬링거랜드 교수는 자신의 초고를 통해 어쩌면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 번역자와도 나처럼 소통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 책의 프랑스어판과 중국어판은 2023년에 출간되었고, 러시아어판, 우크라이나어판도 곧 출간 예정이라고 하니, 이 언어권의 번역가들과도 미리 소통했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의 번역가들과도 일찍이 교류했을 것이고, 단지 출판사의 사정상 번역서 출간이 늦어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Drunk의 표지


한국어판(2022)

그날 새벽 흥분한 탓에 나는 일찍이 연구실에 도착해 슬링거랜드 교수가 보내준 이 책의 파일을 열었다. 책 제목부터 쇼킹했다. ‘술취함!’ 왜 술을 홀짝홀짝 마시고 비틀거리며 문명으로 나아갔을까? 그리고 표지는 정 중앙에 흰색 튜닉을 입은 남자가 포도주 잔을 높이 들어 올리고 있는 <안드로스인들의 주신제> 이미지를 그대로 사용했다. 이 그림은 베첼리오 티치아노가 1520년대에 와인의 즐거움과 긍정적인 효과를 기리는 의미에서 그렸다고 한다. 표지를 보니 술의 긍정적 측면을 피력하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명은 농업혁명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문명에 술취함이 끼어든 것이다. 그리고 술은 통념상 인간에게 해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갑자기 술을 칭송하는 듯한 이미지를 책 표지로 사용한 것이다. 슬링거랜드 교수는 과연 이 책으로 술취함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책과의 첫 만남은 이렇게 호기심으로 나를 흥분시켰다. 이 호기심으로 결국 이 책의 한국어판이 《취함의 미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탈리아어판(2022)
스페인어판(2022)
프랑스어판(2023)
중국어판(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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