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은 너무 맛있어서.
초콜릿을 좋아하는 사람을 세상에서 계수하면, 굉장히 많은 사람이 나올 것이다.
초콜릿은 달고 초콜릿 안의 카페인과 당분은 기분이 좋아지게도, 피곤이 풀리게도 한다.
그래서인지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우울감이 밀고 들어올 때도 초콜릿을 먹고. 또는 맛있어서 먹기도 한다.
나도 초콜릿을 좋아하는데 초콜릿을 먹을 때마다 아주아주 작은 죄악감과 함께 조금 더 나은 기분을 얻기 때문이다.
초콜릿이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먹는 죄악감과 초콜릿을 먹음으로 나아지는 기분 상태가 죄악감을 가지고 있어도 더 나은 상태로 만들기 때문에 초콜릿을 그만 먹을 수 없다.
물론, 초콜릿을 많이 먹는 것도 아니고 초콜릿이 미친듯이 먹고싶었던 특별한 상황이 아닌이상, 서너블럭을 먹는 것이지만.
얼마나 먹든 초콜릿을 환영한다.
초콜릿은 마야 문명에서 마시던 카카오 차인 쇼콜라틀에서 시작했고 아즈텍 문명의 화폐였다고 하는데 옛날 옛적에도 가치가 있는 열매, 가치있는 식품이었다.
그러니까, 초콜릿을 맛있어하는 것은 지극히 대중적인 취향일 것이다.
아마도.
확증할 수는 없지만, 역사에서 보이듯...물론, 문화에 따라 차이가 있고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어 그 가치의 변동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도, 간단히 말해서 초콜릿은 대중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달고 쌉싸름한 그 맛과 그 성분은 힘이 나도록한다.
이런 것들이 또 있는데.
나를 향한 누군가의 응원이란 것이다.
이것은 끊을래야 끊을 수가 없는 것인데, 누군지 정확히 알지 못하더라도 때로는 분석적으로, 때로는 위로의 말로 응원하는 그것은 달고 쌉싸름하고 힘이 된다.
초콜릿이 대중적이듯이 이 응원도 대중적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응원을 원하고 응원으로 힘을 얻는다. 어디에 사는 누구의 응원이 특별히 특별할 때도 있겠지만, 대부분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의 응원이라도 기꺼이 수용한다.
이 응원은 너무 맛있는 것이어서.
어떤 이는 포기하려고 했던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
어떤 이는 선뜻 시도하지 못했던 것들을 시도하고.
어떤이는 삶에서 도망하려고 했다가도 살아내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 응원은 초콜릿 처럼, 종류도 다양해서 힘이 나는 것은 똑같지만 반응은 다르다.
누군가는 응원을 받아 쉬기로 작정하고, 누군가는 응원을 받아 쉬지않고 나아가기로 작정한다.
우리는 가끔 쉬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잊고는 하는데.
사람이 살아가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쉬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잠시 바쁜 세상에서 멀어질 용기.
그런 용기는 얻어내기가 어려운 것이어서 응원의 종류 중에서도 가장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다.
마치 카카오 99%의 초콜릿과 같이 귀한데.
무언가를 해야할 때 힘이 필요하다는 한 방향의 생각이 무언가를 쉬어야할 때도 힘이 필요하단 것을 잊게 하고는 한다.
씁쓸한 응원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내가 본 세상은 그것보다 쉬는 응원이 더 적은 것만 같다.
우리 모두가 좀 더 나은 사람이고 싶어하고, 좀 더 나은 대접을 받고 싶어하기에 응원받고 응원하지만.
쉬는 것에는 응원을 더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아보인다.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여서일까.
성과 지향 주의적인 사회 때문일까.
하지만 사회가 어떻게 변하든 초콜릿은 계속 있었던 것 처럼 응원도 계속 있어왔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카카오99% 응원을 하는 사람이 되어보겠다.
나는 생계를 책임지며 치열하게 살고있지만, 그래도 너의 쉼을 응원해.
정말 잘 했어.
너 자신을 정말 잘 돌보는구나.
자신을 돌보는 멋진 사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