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_ ASAP의 상대성 이론과 유교 파리지엥
ASAP. (As Soon As Possible). 사전적 의미: 가능한 한 빨리.
K-직장인 번역: 아(A)주 쌉(S)가능하게 지금 당장, 아니 어제까지(AP).
한국 기업에서 시간은 아인슈타인의 물리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이곳의 시간은 임원의 혈압 수치에 비례하여 수축한다.
오전 11시 20분. 조 상무로부터 메일이 날아왔다.
제목: [Urgent!] 프랑스 세포라(Sephora) 제안서 수정 (점심 직후 보고)
"K. 지난번 타깃 분석 너무 올드해요. 파리 현지 Gen-Z들이 쓰는 '찐' 슬랭(Slang)이랑 바이브(Vibe) 좀 녹여줘요. 텍스트만 봐도 에펠탑 조명이 켜지는 느낌으로. 12시 50분까지."
지금 시각 11시 21분. 남은 시간 89분. 이건 업무 지시가 아니다. 텍스트로 에펠탑 조명을 켜라니, 이건 주술 행위다.
나는 급히 피에르(Pierre)를 찾았다. 프랑스 본사 파견 인턴. 파리 16구 출신의 금수저이자, 우리 팀의 유일한 불어 원어민.
“Hey, Pierre!”
그는 창가에서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가방을 싸고 있었다. 린넨 냅킨, 개인용 은수저, 그리고 '뚝배기 받침대'를 챙기고 있었다.
“피에르, 큰일 났어. 제니퍼가 지금 당장, 프랑스 Gen-Z 슬랭을 원해. 네가 좀 도와줘야겠어.”
피에르가 푸른 눈을 들어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아주 유창한, 그러나 묘하게 옛날 말투인 한국어로 대답했다.
“팀장님. 지금 시각이 11시 25분입니다. 오시(午時)가 다 되어가는데 업무라니요.”
“오시...? 아니, 점심시간 5분 전인 건 아는데, 급해서 그래.”
“팀장님.”
피에르가 품에서 낡은 책 한 권을 꺼냈다. 프랑스어판 <명심보감(明心寶鑑)>이었다. 이 미친 파리지엥은 K-Pop이 아니라 조선왕조 500년에 입덕한 상태였다.
“한국 속담에 이르기를, ‘금강산도 식후경(Manger d'abord, voir la montagne ensuite)’이라 했습니다. 하물며 개도 밥 먹을 땐 건드리지 않는다(Même le chien...)고 했는데, 제니퍼 상무님은 개보다 못한 분입니까?”
“야! 목소리 낮춰!”
나는 기겁해서 주위를 둘러봤다. 피에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팀장님, 끼니를 거르면서 일하는 건 부모님이 주신 신체를 훼손하는 불효입니다. 저는 오늘 ‘순대국밥’ 맛집을 예약해 뒀습니다. 깍두기 국물을 부어 먹는 성스러운 의식을 치러야 하니, 찾지 마십시오.”
그는 트렌치코트를 휘날리며 사라졌다.
“Bon Appétit” 대신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형님.”이라는 말을 남기고.
덩그러니 남겨진 나. 유교 파리지엥에게 팩폭을 맞고 멍해진 사이, 모니터 속 붉은색 [Urgent]가 나를 비웃었다. 그래, 너는 명심보감 읽으러 가라. 나는 챗GPT 형님께 간다.
나는 생성형 AI를 켰다.
"프랑스 파리의 Z세대가 쓸 법한, 아주 힙하고 반항적이면서도 럭셔리한 신조어를 만들어줘. 존재하지 않는 단어라도 상관없어. 있어 보이기만 하면 돼."
AI가 3초 만에 깜빡였다.
[제안: C'est la Vavavoom (쎄 라 바바붐)] 의미: 인생은 폭발적이다. (설명: 1960년대 자동차 배기음에서 유래했으나 최근 틱톡에서 역주행 중인 가상의 유행어)
바바붐? 뭔가 터지는 소리 같긴 한데... 시간이 없었다. 나는 이 정체불명의 단어를 제안서 헤드라인에 박았다.
<세포라를 점령할 새로운 물결: C'est la Vavavoom!>
12시 48분 전송 완료. 나는 의자에 널브러졌다. 위장이 쪼그라드는 소리가 났다. 이것은 불효다. 피에르 말이 맞다.
10분 뒤, 조 상무가 회의실에서 나왔다. 그녀의 한 손에는 탄산수, 다른 한 손에는 내 제안서가 들려 있었다. 표정이... 밝다?
“K! 역시 감각 살아있네. ‘바바붐’이라니. 어감이 너무 섹시하잖아요.”
그녀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방금 검색해 봤는데 데이터는 별로 안 나오더라고요? 그만큼 완전 극초기 트렌드라는 거지? 이거 사장님께 보고하면 ‘우리가 트렌드 세터’라고 어필하기 딱 좋겠어.”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데이터 툴에는 안 잡히는 현지의 바이브... 역시 이래서 글로벌 인재(피에르)를 써야 한다니까. 수고했어요.”
그녀는 또각또각 사라졌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상무님, 그거 글로벌 인재가 아니라 실리콘밸리의 전기 먹는 하마(AI)가 뱉은 환각입니다. 그리고 '바바붐'은 트렌드가 아니라 그냥 헛소리예요.
하지만 정정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에서 진실이란, 결재권자가 믿고 싶어 하는 거짓말의 다른 이름이니까.
오후 1시 30분. 피에르가 사무실로 복귀했다. 옷에서는 꼬릿한 냄새가 진동했다. 최고급 샤넬 향수와 토종 순대국밥 냄새가 섞인, 기괴하고도 끔찍한 혼종의 향기.
“K 형님. 국밥은 드셨습니까?”
“...아니, 나는 '바바붐' 하느라 못 먹었다.”
“바바붐? 그게 뭡니까?”
“몰라도 돼. 그냥 프랑스엔 없는 프랑스 말이야.”
피에르가 혀를 쯧쯧 찼다.
“역시 한국의 노동 환경은 가혹하군요. 밥심으로 산다는 민족이 밥을 굶다니. 이건 공자님이 통곡할 노릇입니다.”
그는 자리에 앉아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며, 다시 명심보감을 펼쳤다. 나는 책상 서랍에서 먹다 남은 에너지바를 꺼내 씹었다. 딱딱한 초콜릿 덩어리가 모래처럼 부서졌다.
모니터 속 제안서에는 'C'est la Vavavoom'이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단어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일이면 저 단어가 사장님 입에서 나오고, 다음 달이면 마케팅 문구로 박혀 전 세계로 나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무도 모를 것이다. 저 단어가 '배고픈 K-직장인'과 '헛똑똑이 AI'의 합작품이라는 것을.
속이 쓰렸다. 국밥 냄새라도 맡아서 그런가. 아니면 거짓말이 소화가 안 돼서 그런가.
빌어먹게도, 바바붐(Vavavoom)하기 딱 좋은 오후였다. ㅋ
당신의 조직에서 'ASAP'는 정말 시장의 속도입니까, 아니면 리더의 조급증입니까? 무의미한 데드라인 때문에 퀄리티를 포기하고 '가짜 결과물(바바붐)'을 만든 적은 없나요?
피에르는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며 자신의 권리를 지킵니다. 당신은 점심시간이나 휴가 중에 업무 연락이 올 때, 스스로를 지키는 원칙이 있습니까?
조 상무는 모르는 단어를 보고 "섹시하다"며 아는 척을 합니다. 당신의 조직에서 '무지(Unknown)'가 '혁신(Innovation)'으로 포장되는 촌극을 목격한 적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