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콜과 커피의 이중나선

ep.1 주말엔 연필을 깎고, 평일엔 영혼을 깎고

by 김멀똑

사각. 사각.


새벽 5시 30분. 서늘한 서재 공기를 가르는 소리. 스탠드 불빛 아래서 나는 '의식'을 치르는 중이다. 도구는 독일제 연필깎이가 아니라, 무려 편의점표 커터 칼이다.


나는 칼날을 두 칸 정도 빼내어, 검은 연필의 살을 아주 얇게 저며낸다. 기계에 넣고 돌리면 3초면 끝날 일이다. 하지만 나는 굳이 이 미련한 수작업을 고집한다. 기계는 나무를 억지로 비틀어 깎지만, 칼은 나무의 결을 따라 어루만지듯 깎아내니까. 마치, 내가 회사에서 원하는 대우처럼.


나는 21년 차 직장인이다. 그리고 주말마다 연필을 깎는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 천만에. 나는 이 연필로 로또 번호 하나 적지 않는다. 그저 뭉툭해진 흑연심을 바늘 끝처럼 예리하게 다듬는 행위. 위태롭게 뾰족해진 그 검은 심을 보며, '나도 아직은 부러지지 않았다'는 최면을 걸뿐이다.


완벽하게 깎인 연필 세 자루를 필통에 꽂는다. 무기 장전 완료. 이제 연료를 주입할 차례다.


치익-.


에스프레소 머신이 검은 액체를 토해낸다. 이것은 커피가 아니다. 내 혈관에 흐르는 적혈구를 강제로 기상시키는 '합법적 각성제'다.




오전 8시 50분, 본사 회의실. 내 혈액형은 C형이다. Caffeine형. 이미 에스프레소 투 샷을 때려 넣었지만, 런던과 뉴욕의 시차 사이에 끼인 내 뇌는 여전히 파업 중이다.


회의실 문을 열자, 박 대리가 기이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레이저 거리 측정기로 상석과 자신의 의자 사이 거리를 재고 있었다.


“뭐 해? 인테리어 공사해?”

“아, 팀장님. 오셨어요? 오늘 조 상무님 구두 굽 소리를 분석해 보니 ‘날카로움’ 수치가 평소보다 20% 높습니다. 비말 감염 및 ‘지랄’ 도달 범위 2.5m를 확보하는 중입니다.”


그녀는 바닥에 마스킹 테이프로 보이지 않는 결계(Barrier)를 쳤다.


“팀장님은 여기 앉으세요. 1.5m 지점. 탱커(Tanker) 역할이시니까.”


... 고맙다, 아주.


곧이어 또각또각, 굽 소리와 함께 조 상무가 입장했다. 그녀의 손에는 성수처럼 보이는 탄산수 병이, 다른 한 손에는 소독 티슈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티슈를 뽑아 테이블을 멸균실 수준으로 닦았다.


“Start 하죠.”


그녀의 한마디에 런던 지사와의 화상 회의가 연결됐다. 화면 속 런던 지사장은 막 점심을 먹고 들어와 얼굴에 윤기가 돌았고, 서울의 우리들은 방금 무덤에서 기어 나온 좀비 떼 같았다.


“So, regarding the Q4 target…”


영어가 쏟아진다. 내 뇌는 이중 연산을 시작한다. 귀로는 영어를 번역하고, 눈으로는 조 상무의 미간 주름 깊이를 측정하며, 손으로는 엑셀 숫자를 마사지한다.


심장이 쿵쿵댄다. 카페인이 중추신경을 채찍질하고 있다. 이것은 열정이 아니다. 다 타버린 장작을 라이터 기름으로 억지로 태우는, 매캐한 연소 작용일 뿐이다.


“K, 자네 생각은?”


갑작스러운 질문. 조 상무가 나를 쏘아봤다. 그녀의 눈빛은 ‘정답(My Answer)’을 말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부관참시하겠다고.


“Well… Jennifer’s insight seems perfectly logical.” (제니퍼의 통찰력이 완벽해 보이는군.)


나는 비겁하게 대답했다. 새벽에 깎은 연필심처럼 예리한 팩트를 찌르고 싶었지만, 현실의 나는 뭉툭한 지우개처럼 상황을 문대고 있었다. 박 대리가 책상 밑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훌륭한 방어였다는 뜻이다.




오후 7시, 청담동 고깃집. 낮 동안 카페인으로 혹사당한 뇌를 달래기 위해, 2차 연료 주입이 시작된다.


“강 팀장! 잔 비었다. 받아!”


오 상무(Director Oh). 영업 본부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간이 강철로 되어 있다는 소문의 사나이. 그는 넥타이를 이마에 묶고, 소주와 맥주를 1:3의 황금 비율로 섞고 있었다.


“자, 쭉 들이켜! 우리가 남이야? 이 알코올로 오늘 들은 개소리를 싹 소독하는 거야!”


그는 폭탄주를 물처럼 마셨다. 목울대가 넘실거리더니, 잔이 순식간에 비워졌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를 '주당(酒黨)'이라 부르지만, 나는 그를 '마술사'라 부른다.


그는 술을 넘기자마자 재빨리 하얀 물수건을 집어 들었다. “캬아! 좋다!” 그는 입가를 거칠게 닦는 척하며, 입안에 머금고 있던 액체를 물수건에 뱉어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물수건은 알코올을 머금고 축축해졌지만, 겉보기엔 그저 땀을 닦은 것처럼 보였다.


그의 의자 밑에는 그렇게 ‘알코올을 마신’ 물수건들이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선천적으로 알코올 분해 효소가 0%인 남자가, 이 정글 같은 영업 바닥에서 20년을 버틴 비결. 저것은 사기가 아니라 처절한 묘기다.


나는 모른 척, 그가 건넨 잔을 받아 단숨에 털어 넣었다.


찌르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차가운 독극물. 이것은 술이 아니다. 낮 동안 내 신경을 팽팽하게 당겼던 카페인의 독을, 더 지독한 독으로 중화시키는 '마취제'다.


“크으, 좋다! 야 진혁아. 너 아까 회의 때 표정 봤냐? 제니퍼 그 여자가 쪼아대니까 아주 나라 잃은 표정이더만. 쫄지 마 임마! 니체 형님이 말씀하셨잖아.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고!”


오 상무가 맨정신으로 취한 척 소리를 질렀다. 나는 취한 눈으로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상무님... 제 내면은 혼돈이 아니라 알코올로 절여지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춤을 출 수 있는 거야! 마셔!”


술잔이 다시 채워졌다. 문득, 아침에 깎아둔 연필이 떠올랐다. 그 연필은 지금쯤 서재의 어둠 속에서, 부러질 듯 위태롭지만 꼿꼿하게 서 있을 것이다. 마치 오 상무가 뱉어낸 물수건 탑처럼.


내일 아침이면 나는 또다시 몽롱한 머리를 부여잡고 커터 칼을 들 것이다. 사각, 사각. 나무를 깎아내며 무뎌진 나를 다시 벼려낼 것이다. 그리고 다시 출근해 에스프레소를 혈관에 꽂겠지.


낮에는 각성, 밤에는 마취.

이 지독한 이중나선 구조 속에서, 나의 유전자(DNA)는 과연 안녕한 것일까.

밤이 깊었다. 서울의 빌딩 숲은 화려하게 빛나고, 오 상무는 여전히 니체를 부르짖고 있다.


합법적 마약에 중독되기 딱 좋은 밤이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낮에는 카페인, 밤에는 알코올. 당신의 하루를 지탱하는 연료는 무엇입니까? 혹시 강팀장처럼 건강하지 못한 에너지원으로 엔진을 억지로 돌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 상무는 알코올을 못 마시지만 생존을 위해 만취 연기를 합니다. 당신이 직장에서 보여주는 모습 중 "이건 정말 나를 갉아먹는 연기(Acting)다"라고 느끼는 행동은 무엇입니까?


강팀장은 새벽에 연필을 깎으며 무뎌진 자아를 세웁니다. 업무와 역할에 치여 '나'라는 존재가 뭉툭해졌다고 느낄 때, 나를 다시 날카롭고 선명하게 만들어주는 당신만의 '의식(Ritual)'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