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기 딱 좋은 밤

프롤로그.

by 김멀똑

탁.


마찰계수 0의 슬라이딩. A4용지 30장이 묶인 결재판이 대리석 테이블을 미끄러져 내 가슴팍 앞에서 멈췄다.


"K(케이)"


그녀는 내 한국 이름 대신 알파벳을 불렀다. 조 상무(제니퍼). 그녀는 몽블랑 만년필을 쥔 반대편 손으로 세정제를 짜냈다. 싹싹. 마른 손바닥이 비벼지는 소리와 함께 알코올 냄새가 훅 올라왔다.


"네, 상무님"


그녀의 책상 위는 무척 말끔하다. 최신형 맥북과 브랜드 로고가 정면을 향한 탄산수 병만이 오차 없이 정렬되어 있다. 그녀에게 현장, 그리고 21년 차 영업쟁이의 감(feeling)이란 박멸해야 할 세균과 다름없다.


"이 숫자들.. Logic이 빈약하지 않아요?"


그녀가 펜촉으로 보고서의 손익 요약표를 툭툭 두드렸다.


"베트남 성장률 21%. 지금 장난해요? 리오프닝 이후 왓슨스(Watsons) 입점 수수료 인상분은 반영 안 되어 있고"


그녀의 시선이 내 넥타이 매듭에 머물렀다.


"인도네시아는 더 심각하네. K, 우리 할랄(Halal) 인증 아직 안 났잖아요. 식약청 승인 밀리면 리드타임 최소 6개월이에요, 물건은 항구에 묶여 있는데, 매출은 하늘에서 떨어지나? 아님 보따리상으로 팔 생각이에요?"


나는 양복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차가운 플라스틱의 감촉. 소형 커터 칼. 엄지로 칼날을 밀어 올리는 레버를 만지작 거렸다. 드륵, 드륵, 미세한 진동이 손끝에 전해졌다. 주말이었다면, 지금쯤 서재 스탠드 아래서 이 칼로 연필을 깎고 있었을 텐데. 나무의 결을 따라 얇게 썰려 나가는 향나무 조각들. 그 사각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해진다. 하지만 지금 내 손에 들린 건 연필이 아니라, 구겨진 자존심뿐.


"결정적으로 환율. 1350원? 킹달러 기조가 계속되는데, 혼자 1,200원대 낭만적인 환율을 적용해서 이익률 맞췄네요. K, 본인 사업이면 이럴게 할래요?"


치익. 그녀가 탄산수 뚜껑을 따며 한숨을 섞었다.


"Top-line(매출)은 부풀리고, Bottom-line(영업이익)은 환율 마사지로 때우고. K, 이거 비즈니스 플랜 아니잖아요"


그녀가 보고서를 덮었다. 표지에 적힌 팀의 이름이 그녀의 손바닥 아래로 사라졌다.


"이건.. 그냥 회계부정을 예고하는 판타지 소설이지.."


아마추어. 그녀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컨설팅 펌에서 숫자놀음만 하다 낙하산 타고 내려온 그녀가, 나를 정의하는 단어.


"K, 듣고 있나요?"

"네, 듣고 있습니다. 소.. 설이라고.."

"그래요, 소설, 그것도 아주 개연성 없는"


잠깐의 정적. 공기 청정기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녀가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사장님이 뭔가 원대하고 앰비셔스 한 목표를 원하신다고, 상무님이 말씀하셔서"

"Wow,.. K, 표정 봐, 문장력이 아주 탁월해요"


그녀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럴 거면, 그냥 소설을 쓰세요, 네?"


그녀가 결재판을 툭, 하고 손가락으로 밀어냈다.


"다시 잡아오세요, 내러티브(Narrative) 좀 신경 써서, 숫자가 전혀 섹시하질 않잖아"




복도로 나왔다. 자동문이 닫히자마자 등 뒤에서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차단됐다.

자리로 돌아오니 박대리가 다가왔다. 내 안색을 살피는 척하며, 손에 쥔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빠르게 기록하고 있었다.


"팀장님 방금 제니퍼 메신저 상태가 'Refreshing(상쾌함)'으로 바뀌었던데, 보고 분위기 좋았나 봐요?"


박 대리의 맑은 눈이 내 구겨진 셔츠를 훑었다. 그녀가 상쾌한 이유. 뭐지.


"어, 뭐 보고서 문장력이 탁월하대, 소설가로 데뷔하란다"

"오, 역시... 팀장님~! 문학상 각인가요?"

"ㅋ 뭐 노벨상은 못 타도, 술상은 받지 않을까?"


박대리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님, 수정 작업하실 거면, 301 회의실 쓰세요, 거기가 조도랑 와이파이 감도가 제일 안정적이에요. 데이터상으로"


그녀는 가방을 챙겨 사라졌다. 야근은 팀장의 몫이지, 대리의 몫이 아니라는 명쾌한 거리두기. 뒷모습이 차라리 존경스러웠다.

나는 모니터를 켰다. 검은 화면에 내 얼굴이 잠시 비쳤다가 사라졌다.

존재하지 않는 매출을 예언하고, 불가능한 이익률을 약속하는 행위. 상사는 그것을 '비즈니스 플랜'이라 부르고, 나는 그것을 '소설'이라 부른다.

화이트보드에 붉은색 마커로 YOY 20%라고 썼다. 뚜껑을 닫는 소리가 총성처럼 울렸다.


엑셀 셀(cell) 안에는 흙먼지와 땀 냄새가 담기지 않는다. 오직 건조한 수식과 차가운 논리만 존재할 뿐. 조상무에게 비즈니스가 Smart 함의 증명이라면, 나에게 비즈니스는 그냥 생존의 기록이자, 가장 정교한 거짓말이다.

커서가 깜박였다. 마치 나에게 어서 거짓말을 시작하라고 재촉하듯이.

그래, 뭐 원한다면 대하소설이라도 써 주지. 대신 어떻게 끝날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작가인 나도 모르는 결말. 해피엔딩이 될지, 피 비린내 나는 비극이 될지.


나는 주머니에서 다시 커터 칼을 꺼냈다. 드륵, 드륵. 칼날을 밀어 올렸다 내리는 소리가 조용한 회의실을 채웠다. 이 칼로 흑연심을 깎아낼지, 아니면 이 지겨운 거짓말의 막을 찢어버릴지는 두고 볼 일이다.


창밖은 이미 어둡고, 빌딩 숲의 불빛들은 모스 부호처럼 깜빡거렸다.


소설 쓰기 딱 좋은 밤이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회사에서 '위에서 원하는 숫자'와 '내가 아는 현실'이 충돌할 때,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그 간극을 메우고 있나요? 그 과정에서 당신이 느끼는 감정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직장 생활 중 솔직한 감정을 드러낼 수 없어 가면을 써야 했던 순간, 당신을 버티게 해 준 '나만의 배출구'는 무엇이었나요?


강팀장(K)은 타인이 강요한 보고서를 쓰지만 언젠가 진짜 이야기를 쓰겠다고 다짐합니다. 만약 지금 당신이 '진짜 내 이야기'를 쓴다면, 그 첫 문장은 어떻게 시작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