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같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레스토랑에서 소개팅 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소개팅 남이 아닌 다른 남자의 연락을 며칠째 기다렸다. 그 남자는 마지막 데이트 이후에 연기처럼 멀어져 갔다. 그 연기는 뿌옇게 그 남자를 지워버리고 애달픈 내 마음은 그 남자에게 닿을 방법을 찾으려 안달이다.
나는 안감힘을 썼지만 그 남자는 결국 떠났고 곧이어 들이닥칠 지긋지긋한 외로움이 두려운 나는 절망스러운 마음에 가슴이 아렸다.
눈을 떴다. 꿈이었다. 천장이 보였다. 지난 7년간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한꺼번에 몰아쳤다. 현실로 돌아온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랬다. 나는 꿈속의 그 남자와 결혼 후 두 아이를 낳았고 6년째 그 아이들을 같이 키우고 있었다. 슬쩍 고개를 돌렸다. 신랑이 자고 있다. 슬며시 신랑의 손을 잡고 깎지를 끼었다. 돌아선 내 뺨에 베개가 축축했다. '땀인가... 아니 울었나?' '내가 또 그 꿈을 꾸었네.' 한동안 안 꾸던 그 꿈, 내 꿈속에선 항상 나는 아직 결혼 적령기 여자이며 내 신랑은 손에 닿기 힘든 이상향이었다.
결혼 후 신혼 초 몇 년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신랑을 너무 사랑해서 그래서 이 남자와 결혼하고 예쁜 아이들을 낳아서 가정을 꾸렸다는 것 자체가 꿈만 같은 이야기라서 자꾸 이런 꿈을 꾸는가 보다 했다.
하지만 그 꿈은 이후에도 지속되었고 이젠 안 꿀 때도 되지 않았나 했는데 여전히 내 꿈속에서 신랑은 닿지 않는 노스탤지어 손수건이었다.
호주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39살 나이에 드디어 호주에서 풀타임 첫 직장을 얻었다고 했다. 7년 전 경찰 공무원과 결혼과 동시에 이혼을 하고 호주로 자기 행복을 찾아 제2의 인생을 살겠다고 떠났던 친구다. 그 친구는 대학생 시절 워킹 홀리데이로 살아봤었던 호주가 이상향이었고 그것을 잡으러 고수익의 직장과 안정적 직장의 배우자 그리고 자신만을 의지하는 부모, 동생을 뒤로한 채 호주로 떠났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녀가 한국에서 일할 때 지친 긴 하루 끝 호주를 기억할 때마다 얼마나 기쁨에 넘쳐 두 눈을 반짝거렸던지... 반드시 한국을 탈출하겠다던 친구는 내가 잠시 한국에 없을 때 기어코 해내고 말았다. 호주로 떠난 사진 속 그녀는 섹시함이 넘쳤다. 화장부터 옷까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친구는 마치 봉인 해제된 출소자처럼 호주의 공기를 온몸으로 흡입하며 새 생명을 얻었다.
나는 그와는 반대였다. 중국에 있는 한국 국제학교 영어교사로 일한 경력을 살려 캐나다 토론토 주정부에서 발급된 영유아 교사자격증을 가지고 이민을 갈 계획을 다 해놓고도 그 모든 시나리오를 스스로 접고 경찰공무원인 신랑을 만나 결혼을 하였다. 호주로 간 내 친구는 그 후 연락이 없다가 5년 전 어느 날 슬픈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학교 가는 길에 사고가 있었다고 했다. 큰 사고인데 다행스럽게도 목숨은 건졌지만 병원에서 스스로 일어나기 까진 시간이 걸릴 거 같다고 말이다.
나는 친구가 자신을 찍어 보내준 사진을 보면서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허리가 다쳤는지 이름 모를 철제 보조 기구를 온몸에 감고 겨우 몸을 지지하고 침대에 앉아있었다. 친구는 병원에 있는 동안 하루에 꼬박 2~3시간씩 나와 통화를 했다.
친구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면서 자신의 사고에 대해선 부모님도 모른다며 한국에 있는 그 누구에게도 절대 말하지 말아 달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친구는 전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사죄를 했다고 했다. 당시 친구는 과거 이혼이라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으며 모든 걸 포기한 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7년 전인 32살 나와 내 친구는 결혼을 앞두고 이렇듯 각자 다른 선택을 하였다. 나는 엄마의 표현에 의하면 폐기 직전 제고 상품이었고 추한 노처녀였다. 나는 고귀하고 평범하게 살기를 원했으나 내 가치는 외모 직장 나이로 사회에 내던져졌으며 그 사회 속에 내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29살에 중국으로 한번 탈출을 시도했었다. 국제학교 영어교사로 일하며 한국사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친구보다 먼저 제2의 인생을 꿈꾸었다. 그러나 내가 간 중국은 한국 커뮤니티 안에서 작은 동네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한국 국제학교는 40이 가까운 노총각, 노처녀 교사가 가득했었다. 20대 중후반 예쁜 여교사가 올 때면 월척을 낚으려는 중국 한인사회 총각들의 낚싯대가 수시로 날아들었다. 나는 그 낚싯대에 낚인 몇몇의 월척 여교사의 결혼을 축하해주며 꺾인 날개로 축축해져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 다시 도망가고 싶었다. 날 선택해주지 않은 거지 같은 한국 남자들에게 초라해지기 싫어 캐나다로 이민을 계획했었지만 그렇다고 캐나다에서 혼자 다시 시작할 용기가 없었다. 내 친구는 이미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신랑의 기나긴 구애 끝에 결혼을 했지만 그깟 제도를 비웃듯 호주로 떠났었다. 그녀를 알던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선택에 어리둥절했다.
난 그녀가 뼛속까지 나와는 다른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친구를 무책임한 이상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해도 나만은 내 친구의 선택을 지지했다. 그녀는 나처럼 되지 않길... 자신만의 길을 가서 보란 듯이 날아오르길 기도했다. 하지만 호기롭게 떠났던 친구는 삶의 끝자락에서 버둥거리며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