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세베리아 Oct 30. 2022

3. 직업의 귀천

차가운 여자들의  유세

재스민에게선 상큼한 오렌지 향이 났다.  그녀에게선 윈디와 나에게서 보이는 치열함과 궁상맞음이 없었다. 오피스 걸인 엄마가 직접 코디해준 옷을 입고 특유의 칭찬과 재치 있는 유머로 나를 무장해제시킨 후 항상 크진 않지만 바쁜 학원의 일상 속 지친 나를 가꾸고 위로하기 충분한 선물을 주었다. 예를 들어 외국에 사는 이모에게서 선물 받은 하루한알 예뻐지는 피부 비타민이나 벌꿀 가득한 호주산 립글로스 같은 거였다.


재스민은 나를 귀하게 대해 주었다. 주말마다 읽던 그 어떤 자기 계발서나 찬송가 가사보다 그녀의 기분 좋은 언행이 더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었다. 윈디는 자타가 공인한 워커홀릭이었다. 그녀는 일 자체를 그녀와 동일시하였으며 그녀의 큰 교실은 수위 아저씨가 문단속을 할 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렇게 단기간에 악착같이 모은 으로 윈디는 빠른 출퇴근을 돕는 자가용이 아닌 늦게 퇴근해도 부담 없는 학원 바로 앞 오피스텔을 구입했다.


그녀에게는 사실 오래된 연하 남자 친구가 있었다. 재스민과 나는 그 사실을 친해지고 6개월 후에 알게 되었다. 그녀의 연하 남자 친구를 처음 소개받았던 날은 그 남자 친구가 경찰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날이었다. 오래되어 케케 묶은 냄새까지 나는 남자 친구의 차에 우리를 처음 태운 그날 밤 그녀는 그녀의 오피스텔에서 우리에게 고민상담을 했다.


남자 친구는 대학교 후배이고 23살 국토대장정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다. 몇 번의 싸움과 이별에도 미련스럽기까지 한 굳건한 사랑을 보여주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그런 남자라고 했다.


하지만 결혼 이야기가 오가니 사정이 달라졌다. 남자 친구 쪽 이모들에게서 어느 날 전화가 와서 나가보니 윈디를 가운데 앉혀 놓고 다섯 이모가 삥 둘러앉아 이것저것을 요구했다고 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공무원 남편감이 일 순위라는 운을 띄운 후 그런 남편감을 얻었으니 뭐라도 내놓으라는 취지였다. 윈디는 처음엔 남자 친구 홀어머니 시골집에 티브이를 놔드렸다. 남자 친구는 고생하는 어머니께 결혼 후에도 매달 적지 않은 생활비를 부쳐드려야 한다고 했고 자신의 합격이 확실해지자 생활력 있고 당찬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윈디는 본인의 집안에서도 평생 무능력한 술주정뱅이 개차반 아빠에게서 자란 실질적 가장 이었다. 20살 독립해서 모은 모든 돈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엄마와 동생을 위해 헌신했다. 그런 그녀에게 오지랖 넓은 시이모들의 참견과 혼자인 시어머니 봉양 그것도 모자라 사회 초년생 연하남편의 월급을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지고 답답해진다고 말했다.


그녀는 뻔히 보이는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자신의 인생을 끼워 넣고 친정 엄마가 바라는 대로 남편과 자식을 위해 헌신하며 사회적 기준에 맞는 수순을 밟아 암울하게 살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모든 속박과 뻔한 시나리오를 벗어던지고 오피스텔을 팔아 자신을 빛나게 해 줄 미지의 나라 호주로 도망을 갈지 갈등했다.


재스민은 윈디의 고민을 잠잠히 듣더니 쭈뼛쭈뼛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자신은 올해 초 7년간 사귄 남자와 헤어졌다고 말했다. 그 남자도 대학생 때 소개팅으로 만나 가족 같이 두 집안이 왕래하며 알고 지냈다고 했다. 하지만 대기업에 취업을 하고 나니 남자 쪽 누나들이 태도를 바꾸었다. 누나들은 언제 그만둘지 모를 학원 강사라는 재스민의 직업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면서 남자 친구를 설득해 선을 보게 했다.


아무 걱정 없이 그저 티 없이 밝게만 살아왔을 재스민에게 그런 과거가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윈디와 나는  극대노 하며 그 누나들은 속물적인 냄새나는 인간들이며 재스민을 놓친 것을 평생 후회할 것이라고 저주와 악담을 퍼부어 주었다.  집 며느리가 될 여자는 시누이 등살에 고생길이 훤하다는 이야기도 덧붙여주었다.


재스민은 우리의 말에 통쾌해하며 깔깔깔 거리며 웃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헤어진 지 몇 달도 되지 않았는데 전 남자 친구 프사에 여자 사진이 올라왔으며 그 여자는 누나들이 골라 준 초등학교 교사라고 했다.


초등학교 교사? 그 말은 들은 나의 얼굴에 갑자기 웃음기가 사라졌다. 재스민의 존재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곳에 온 나에게 섞어빠진 세상의 직업의 귀천 논리를 허물어 주는 단 하나의 상징이었다. 학원 강사라는 직업이 사회 속 어떠한 직업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히 능력 있고 귀한 선택받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것을 각인시켜주는 편견 없는 잣대였다. 기품 있는 그녀가 택한 직업이고 인정받고 능력 있는 사람이니 이 직업이 결코 천하거나 보잘것없는 것일 수가 없다는 논리로 그간 나는 자존감을 지켜왔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발악을 해봤자 사회 속 오래된 통념 속에 직업의 귀천은 반드시 존재했었다. 학원 원장이 되지 않는 이상 세상 사람들의 눈에 학원 강사라는 직업은 임용고시를 패스한 공교육 교사보다 낮은 직업이고   만만한 사람들이 도전하면 언제고 시작할 수도 또 갑자기 그만둘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그것을 인정했다. 청소부가 월 천만 원을 벌어도 오백만 원 버는 의사의 직업이 더 고귀하듯 직업엔 귀천이 있었다.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은 세상의 오래된 고정관념이 아니었다. 내가 정말 싸워야 할 대상은 내 마음속 못난 패배 심리였다. 

이전 02화 2. 재활용 삶과 한 줄기 햇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