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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세베리아 Oct 30. 2022

18. 윈디의 결혼

영롱히 빛나리라

윈디는 밤낮 미친 듯이 학업에 매달린 결과 항상 최고의 성적으로 교수님을 놀라게 했다. 그녀는 특히 병리학 연구실 실습수업을 좋아했다.  Histology lab에서  환자 조직을 specimen slide로 만드는 모든 실전 과정이 흥미로웠으며 마지막으로 현미경으로 보면서 마침내 병명을 진단해 낼 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대학교 졸업이 얼마 남지 않자 그녀는 풀타임 잡을 구하려 정성스러운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를 궁금해하는 한 곳에 연락이 왔다. 그녀의 화려한 성적을 본 병원에서는 그녀에게 더 이상 학문적인 지식을 묻지는 않았지만 대신 한국에서 그녀의 경력을 궁금해하였다.  


그리고 한주 정도 뒤에 면접 결과를 알려준다던 매니저는 바로 다음날 윈디에게 전화해 다음 주부터 실습을 시작하자고 했다. 나는 윈디가 정말 자랑스러웠다.


스칼렛은 재스민이 초등부 수업을 확장하는 사업을 도왔다. 기존 Paul과 함께 개업한 학원 건너편 상가에 초등생들을 전문 영어학원 하나를 더 개업할 프로젝트를 세운 재스민은 남편에게 자신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재스민은 매주 그녀가 산부인과에 가는 걸 도왔고 태어날 아이를 위해 클로이 선생님과 함께 지낼 더 큰 집도 전세로 알아봐 주었다.


제시카는 뱃속 아이를 통해 책임감을 배우고 학생들과 소통을 통해 자신의 자아효능감을 높여갔다. 재스민은 곧 정신의학과 주치의로 부터 약을 먹지 않아도 될 만큼 그녀의 우울증이 호전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시카의 아이가 태어날 무렵 재스민은 드디어 Paul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사업체를 이루어냈다. 그녀의 초등부 수업은 나날이 학생들이 늘어만 갔고 곧 Paul의 중고등부 수업보다 더 큰 수익을 내기 시작하였다.


그해 겨울 윈디로부터 예쁜 청첩장이 한 통 날아왔다. 우리는 너무나 갑작스러웠지만 끊이지 않았던 윈디의 연애사업을 생각하면 그렇게 놀랄 일도 아녔기에 윈디의 두 번째 결혼식을 축하해주러 발리에서 만나기로 했다.


윈디는 발리 중에서도 예쁘기로 유명한 누사렘봉안의 작은 빌라를 통째로 빌려 야외 결혼식을 진행할 예정이니 꼭 와달라고 크리스마스 날짜에 맞춰 예매한 비행기 티켓까지 함께 동봉해서 보내왔다.


 해외에서 그것도 아일랜드에서의 결혼식 이라니...  갑자기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드디어 출국날이 다가왔고 인천 국제공항에서 7시간을 날아 발리 덴파사르 공항에 도착했다. 누사렘봉안에 가기 위해선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사누르 지역으로 일단 고젝을 불러 타고 이동했다. 선박회사가 채워준 팔찌를 차고 눈치껏 같은 팔찌를 찬 사람들이 움직일 때 우리도 같이 배에 올라탔다.


따로 항구가 없고 그냥 해변가에 정박한 배에 올라타는 거라 신발과 바지가 홀딱 젖었지만 재스민과 나는 가는 내내 깔깔 거리며 웃어댔다. 20대의 싱글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을 타는 기분이었고 실제로 섬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더 생기 있어지고 젊어지는 우리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바다는 너무나도 투명했고 비추는 태양빛에 반짝거리며 출렁거렸다. 섬에 다다른 우리는 윈디의 결혼식이 열린다는 빌라를 찾아 걸어갔다. 내리쬐는 뜨거운 햇살에 숨이 막히는 듯 더웠지만 우리의 몸은 솜털처럼 가벼웠고 발은 구름을 타듯 떠다녔다.


드디어 빌라에 도착했다. 섬의 바다와 잘 어울리는 블루와 화이트 담벼락 사이를 지나 모퉁이를 도니 윈디의 워딩 홀이 보이기 시작했다. 섬에서만 나는 처음 보는 열대식물과 꽃으로 버진로드가 꾸며져 있었으며 아치형 단상 위에는 서약서처럼 생긴 책자가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펜스 뒤로는 바로 깎아지른듯한 절벽 하래 바다가 펼쳐 저 보였다. 완벽했다.


그런데 결혼식장의 너무 한산한 것도 모자라 아무도 없지 않은가? 재스민과 나는 조금은 어리둥절했다. '뭐지? 사람들은 고사하고 윈디 선생님은 또 어디에 있는 거지? 우리 잘못 찾아왔나? 아님... 날짜를 잘못 알아나?'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 우리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윈디 선생님!" 우리는 10년 전에 청도 국제공항에서 재회했던 그날 밤처럼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이름 모를 동물들이 낼 법한 소리를 내지르며 꺅꺅 서로를 부둥켜안고 뛰어댔다.


윈디는 우리에게 와줘서 고맙다고 하면서 우리 손을 끌어당겨 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맞춤 드레스 세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와 예뻐요~ 선생님...  근데 신랑이랑 하객은 어디 있어요?


설마... 우리 선생님 영혼결혼식 같은 거 축하해 주라고 부른 거예요?" 윈디는 어리둥절하는 우리의 머리에 꽃을 꽂으면서 말했다. "아니요. 우리 셋이 하는 파티지!! 결혼식은 거짓말이야! 내가 이렇게라도 안 했으면 한국에서 바쁜 당신들이 스케줄 맞춰서 이 먼 곳까지 와 줬겠어요?"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신부 윈디를 기대하고 온 우리는 그녀의 어이없는 말에 약간의 허무함을 느꼈지만 이내 결혼 같은 거 없으면 뭐 어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어쩌면 이편이 더 재밌을 거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예쁜 맞춤 드레스를 입은 우리는 부캐를 들고 아까 보았던 꽃들이 장식된 단상에 섰다.


얼마 후 나이 지긋한 외국인 여생분이 나타나셨다. 그녀의 진행 아래 우리는 서로 손을 모아 서약서 종이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서로의 이마에 입을 맞추면서 서로를 축복하여 주었다. 우리는 지나간 우리의 30대를 뒤돌아보았다.


29살에 눈이 펑펑 내리는 청도에서 30대를 맞이할 때는 30이 되면 안정적인 직장, 예쁜 사랑, 성숙한 마음 이런 것들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가 겪었던 30대를 생각하면 결코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평범하게 아무 일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던 모든 30대 어른들도 각자 그들만의 좌절과 고통 속에서 아픔을 견디어 내고 그 안에서 피고 지고 무수히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었음을 우리는 이제 알 수 있았다.


우리는 다가올 40대를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맞이하지 말자고 짐했다. 그리고 세상의 잣대가 아닌 우리만의 신념으로 어떤 다른 사람의 주제넘은 조언이 아닌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40대를 살아가자고 맹세했다. 우리는 충분히 사랑스러웠고 여전히 아름답고 또 누누이 영롱한 빛을 뿜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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