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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세베리아 Oct 30. 2022

9. 중국 남자와의 연애

외로움의 공간을 기쁨으로 덧입히다.

어느 금요일 늦은 오후 마지막 수업을 앞둔 그때 갑자기 Jason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대뜸 나에게 지금 뭐하냐고 물어봤고 나는 수업에 간다고 말했다. 그는 수업이 다 끝나면 나에게 전화 한 통 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았고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수업 시작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알겠다고만 하고 급히 전화를 끊었다.


매주 금요일 저녁 스쿨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길은 유난히도 쓸쓸했다. 특히 비라도 내린 날이면 더 그랬다. 버스 안의 온기로 데워져 김서린 창밖에는 비 온 뒤 맺힌 물방울이 구슬구슬 흔들리다가 차가 신호에 걸려 급정지라도 하게 되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 마음도 물처럼 눈물처럼 그렇게 흘러내리곤 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달랐다. 열심히 수업을 마치고 복도로 나온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수업이 끝났다고 말하자 그는 내게 세상 달콤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럼 지금 혹시 나한테 와줄 수 있을까? 나 위해 공원 해변가야."


그는 공원에 도착한 나를 두 팔 벌려 안아주었다. 주말에 오프를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하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어떻게 된 거냐며 물었고 그는 내게 실장님께 가서 잡아야 할 여자가 있어서 가봐야 할 거 같으니 보내달라고 솔직히 이야기했고 실장님께서 잡지 못하면 다시 돌아올 생각 하지 말라며 보내주었다고 했다.


나는 그의 그 고백에 가까운 말을 듣는 순간 그간 페이스북에 올렸다 지워지길 반복한 그의 글이 떠올랐다. 그는 한국 여자였고 나이가 6살이나 많은 나와 미래를 같이 그려나갈 수가 있는지에 대해 며칠 밤낮을 고민했다고 했다. 그에게 용기를 준 사람은 가까운 친구가 아닌 바로 엄마였다. 아들이 몇 날 며칠을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집 밖을 서성거리는 것을 본 엄마는 아들의 고민에 대해 물어봤으며 시작도 전에 너무 많은 것을 고민하는 것도 좋지 않고  떠난 인연은 쉽게 돌아오지 않으니 떠나기 전 일단 나의 마음도 그와 같은지 확인해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진실되고도 신중한 그의 가분한 고백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는 내가 허락만 해준다면 자신을 경력을 토대로 내가 있는 지역으로 직장을 옮겨서 우리가 더 자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게 서로에게 만남을 이어가기 더 좋을 거 같다라고도 말했다.


그날 밤 택시로 내 기숙사 앞에 나를 내려준 그는 내가 어떤 결정을 하든지 내 결정을 존중해 줄 것이며 나를 결코 곤란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말없이 그의 커다란 엄지손톱을 만졌다.  


위해에서 나의 토요일은 대부분 혼자였다. 가족들이나 연인들과 시간을 보내는 다른 선생님과 달리 나는 아침을 든든히 먹고 이루마의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는 이어폰으로 거리의 소음을 막은 후 시내 곳곳을 혼자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아무 카페에나 들어가 일기를 쓰곤 했다.


한국에서는 가질 수 없는 여유라 처음에는 정말 좋았지만 이내 쓸쓸함이 몰려왔었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님께 전화를 걸 자신은 없었다. 아빠가 그동안 엄마에게 저지른 갖가지 기이한 만행을 몇 시간이고 떠들어 댈 엄마를 생각하면 더욱이 연락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평생을 풀어도 풀리지 않는 그들의 인생을 더는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은 위해에서의 완벽한 하루였다. 나는 그동안 외로움을 묻히고 다녔던 장소들을 그와 함께 다니며 기쁨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백화점, 사원, 시장, 카페 등등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냥 그와 함께라는 것이 너무 기적 같은 일이라서 그날 내가 기억하는 것이라곤 나를 향해 쏟아붓는 그의 눈빛 부드러운 손짓과 목소리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싱푸먼(행복문)이라는 곳에 올라갔다. 그곳에 부서지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그는 나를 따뜻하게 뒤에서 안아주었고 우리 첫 키스를 나누었다. 따뜻한 그의 입술의 온기가 나를 위로해주는 듯했고 나는 그의 위로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우리는 장거리 연애를 시작하였다. 주말엔 내가 그를 찾아갔고 비번인 날은 그가 날 찾아왔다. 나는 차라리 내가 청도에 가는 편이 더 편했다. 위해에는 불편한 시선들이 많았고 좁은 한인 사회에서 특히나 학부모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들은 리트머스 종이가 물들듯 순식간에 퍼져나가기 일쑤였다.  기독교 학교에 근무 중인 여교사에게 사람들이 들이대는 잣대는 엄격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하나둘 더 많은 부분들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는 하나뿐인 누나가 있었다. 그보다는 2살이 많았고 나보다는 4살이나 어렸다. 어느 날 그가 상기된 기쁜 목소리로 누나가 임신을 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중국에서는 결혼을 일찍 하는 추세이지만 인구 제한 정책에 의해 자식을 하나만 낳을 수 있으며 더 낳고 싶으면 그만큼의 세금을 정부에 내야 한다라고 들었다. Jason도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귀한 아들이었다.


 Jason의 아빠는 오래전부터 그 귀한 아들에게 본인의 사업을 물려주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Jason은 평생을 일에 매달려 술만 마시고 엄마를 그리고 가정을 돌보지 않은 아빠의 사업을 이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대학 졸업 후 해천만 온천에 취직한 그를 아빠는 몹시도 못마땅하게 생각하셨으며 사내자식이 서비스직이나 한다면서 그를 무시했고 그렇게 조금씩 그와 사이가 멀어졌다고 말했다.


Jason은 장거리 연애를 빨리 끝내고 싶어 했다. 그는 타지에서 외로워하는 나를 걱정하며 사귀기 전보다 더 알뜰살뜰 내 모든 것을 챙겨주었다. 하지만 위해에서의 내 삶은 조심씩 달라져만 갔다. 3월 새 학기가 시작되자 젊은 싱글 선생님들이 대거 한국에서 넘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이루마 음악과 쓸쓸히 주말을 보내지 않았다. 대신 싱글 선생님들과 근교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하루는 가까운 연태로의 주말여행에서 내가 시장 구경에 빠져 핸드폰을 도둑맞는 사건이 벌어졌다. 하루 종일 연락이 두절됐던 그날 밤 그는 더 이상의 장거리 연애는 우리에게 좋지 않을 거 같다고 말했고 바쁜 아빠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 하며 저녁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우리 연애에는 적신호가 울렸다.


처음 그의 아빠는 우리의 연애를 엄마에게 들어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식사 시간에는 정신 나간 녀석이라면서 소리를 치시며 마시던 컵을 그를 향해 던져버리셨다. 아빠는 그동안은 본인의 만류에도 끝까지 고집을 피우며 그만두지 않았던 직장을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한국 여자 때문에 그만두고 그것도 모자라 위해로 간다고 하니 아들이 괘씸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두 부자 사이는 더 틀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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