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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떠나며 마지막 편지를 보내다

타발적인 자발적 퇴사를 하고

미국 회사에서 일하며 역량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고 생애 가장 빛나던 한때를 보냈다. 그러나 2005년 미국 본사가 수익 악화로 법원에 파산보호 신청을 하였고 파산보호를 받는 동안 계열사 매각과 인력 감축 등 대규모 구조조정이 일어났다. 


나는 2009년 구조조정이 끝날 때까지 아무 영향 없이 내 일에 최선을 다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폭탄은 엉뚱한 곳에서 터지고 말았다.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는 다시 마주한 시련, 또 다른 형태의 고통을 견디며 2년 가까이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계열사 별로 한국에도 각각 지사가 있었는데 유사한 업무를 하는 지사 간의 통폐합이 뒤늦게 일어났다. 내가 속한 B 지사가 A 지사로 흡수 통합되었다. 나에겐 새로운 한국인 보스가 추가되는 일이었고 불편하고 어정쩡한 관계였다. 새로이 추가된 보스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나도 원치 않는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책상은 다른 건물로 옮겨졌고 팀원들과 서로 다른 건물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다른 팀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진심 그랬다면 그 이후에 소통이 더 나아졌는지 점검하고 이후 상황을 follow up 했어야 했다. 자발적으로 퇴사하도록 심리적 압박을 가한 것이었다.


나를 찾지 않았고 팀원들에게 직접 업무 지시를 하거나 보고를 받았다. 그러면 팀원들은 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 주었지만, 업무가 긴박하게 돌아갈 땐 팀원들도 모든 상황을 다 알려주진 못했다. 이것은 때때로 내가 업무 상황을 다 알지 못해 나를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하거나 무능하게 만들었고, 일부 팀원들은 나를 전처럼 대하지 않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진 모르지만 비즈니스 정글에 의리 같은 건 없었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버티겠어", "곧 퇴사 하겠지". 매일 아침 팀원들이 없는 다른 건물로 출근하는 것, 출근하면서 "잘 쉬었어?"라는 말 한마디 건넬 사람 없는 곳, 따가운 시선들을 온몸으로 받아 내야 하는 곳. '확 퇴사해 버릴까' 하는 생각이 수도없이 들었지만, '뭐 책상이 없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라는 생각으로 버텨냈다. 



아직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었고 벌어놓은 돈도 없었다. 대책 없이 무작정 자진 퇴사할 수는 없었다. 한동안은 팀원들을 내 자리로 불러 업무 이야기를 하고 또 내가 그쪽 건물로 찾아가 이야기도 하며 할 일을 해 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의욕은 떨어지고 무력감은 더 커졌으며 10년의 노력이 물거품 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속에선 다시 분노의 감정이 커져갔다. 


그런 와중에 아내의 병세는 더욱 심해져 갔다.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시작했고 혼자서는 걷지 못하게 되었다. 아내와 나는 점점 더 우울해졌고 다시 정신과 약을 먹어야 했으며 약을 먹지 않으면 전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동정이나 도움 같은 건 받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나의 문제였다. 


생각했다. '내 삶은 왜 이렇게 생겨 먹었을까' 부모님 돌아가시고 이때까지 25년, 내 삶은 빛나던 때도 있었지만 치열한 전쟁터였다. 크고 작은 많은 전쟁을 치루어야 했고 살아남는 것 이외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미국 본사와 10년 가까이 쌓아 올린 모든 신뢰와 다 만들어놓은 정년퇴직까지의 Career Pass 가 모두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고, 통합한 미국 본사인 A 사의 사람들과도 새로이 신뢰 관계를 쌓아야 하며, 한국에 있는 A 지사 사람들과도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정치적 공동체로 형성되어 있는 그들만의 높고 견고한 울타리를 뚫고 들어가 그들과 섞여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기에 나는 그다지 유연하지 못했다. 게다가 나의 가장 큰 단점 중의 하나는 나는 인격적으로 어느 정도의 레벨을 갖추지 않은 사람에게는 절대 나도 우호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좀 더 유연해야 했을 것이다. 조금만 굽혔다면 안 겪을 수도 있는 시련이었다. 아니 굽히지 않아도 겉과 속이 다른 모습으로 속임수를 쓰며 희희낙락할 수도 있었다. 결국 시련의 길은 나의 선택이 만든 결과였다. 그러나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도 나도 각자의 위치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한 일을 했을 것이다. 나와는 맞지 않았지만. 필요한 것이 사람마다 다르니 갈등이 일어나는 것뿐이다.



사회라는 것도 밀림의 세계이고 밀림의 세계에서 자비를 바라며 목숨을 구걸할 수는 없다. 어떠한 상황이던 상사가 어떻든 생존을 위해선 자신의 길을 닦아야 하고 또 성과를 내야 하는 게임이다. 산다는 것도 어찌 보면 수많은 게임의 연속인데 게임이 어렵다고 탓할 수는 없다. 


게임에서 질 수는 있지만 하나의 게임에 졌다고 모든 게임을 포기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살면서 100번의 게임을 한다면 51번만 이기면 된다. 49번을 져도 결과적으론 내가 이긴 것이다. 이기는 게임을 하고 싶다면 게임을 더 많이 하면 된다. 내공은 점점 증가할 것이고 이길 확률도 계속 상승할 것이다. 


실패를 교훈으로 삼으며 자아성찰을 통해 자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상황 탓을 하거나 나쁜 상사 탓을 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고 내적 성장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사회에서 은인이 되는 사람이나 스승을 만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만났다면 최고의 행운을 만난 것이다) 시련을 통해서 더 성장하고 의식의 크기가 더 확장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사람은 의식의 크기만큼 일을 해낸다. 큰일을 해내기 위해선 먼저 의식의 크기가 더 커져야 한다.


그렇게 2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다행히 새로운 기회를 찾았다. 나는 또 다른 도전에 나서기로 결심하였고 40대의 뜨거운 열정을 쏟아냈던 미국 회사를 떠나며 팀원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다음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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