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버팀목이 되어준 짝꿍
조쉬를 처음 만난 건 2010년, 영국 런던의 한 기숙사에서였다. 기숙사의 경비가 꽤 삼엄해서 대부분의 문을 카드를 찍고 들어가야 했는데 첫날이라 그런지 내 카드키 인식이 잘 안 됐다. 짐을 한가득 들고 리셉션에서 문을 못 열어 어리버리하게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SAMSUNG 로고가 박힌 티셔츠를 입은 영국인 남학생이 걸어왔다. 영국에서 삼성 텔레비전, 세탁기도 아닌 티셔츠라니. 너무 반가웠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한국의 위상이 높지 않을 때라 유럽 사람들은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남한에서 왔어? 북한에서 왔어?"라는 질문을 빈번하게 들을 때였다. 얼굴이 선한 삼성맨은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고 짐도 들어주었다. 알고 보니 조쉬는 프리미어 리그 첼시팀의 광팬이었는데 삼성이 그 시절 첼시를 후원해주고 있어서 모든 첼시 유니폼에는 삼성이 박혀있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날 조쉬가 보인 친절함과 삼성 티셔츠에 혼자 내적 친밀감을 형성했다.
우리는 기숙사 식당과 라운지에서 종종 마주쳤다. 조쉬는 이 기숙사의 회장이라 해도 될 정도로 주위 사람들을 살갑게 챙기는 친구였다. 영국인 특유의 차가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다른 친구들과 한 무리가 되어 자주 놀러 다녔고 급속도로 친해졌다. 나는 어학연수를 마치고 1년 뒤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영국 나이로 조쉬가 열아홉, 내가 스무 살이었다. 어린 소녀 소년에게는 미래 따위가 두렵지 않았다. 내가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조쉬가 한국으로 놀러 와 주었고 겨울 방학에는 내가 영국으로 놀러갔다. 이때부터는 슬슬 우리가 과연 롱디를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어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웬걸, 조쉬는 이미 한국에서 일할 인턴 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내가 영국에서 머문 2주 동안 조쉬는 한국 건축회사에서의 인턴쉽 기회를 얻어냈다. 대단한 박력이었다. 이런 남자라면 정말 믿어볼 만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육 개월 뒤, 조쉬는 큰 이민 가방을 들고 한국으로 왔다. 그때부터 결혼 전까지 한국에서 지냈던 시간들은 꿈만 같았다. 영국인 남자 친구에 대한 부모님의 반응이 좀 걱정되었는데 다행히 부모님은 조쉬를 아들처럼 아껴주셨다. 명절 때마다 우리 집에서 가족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중에는 아빠와 단둘이 등산을 가기도 했다. 둘이 등산을 하며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길거리나 대중교통에서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가끔 느껴지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선하디 선한 조쉬는 한국에서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씩씩하게 잘 지냈다. 그러다 졸업 전 여름방학에 조쉬에게 청혼을 받았다. 고민할 것도 없이 YES였다.
졸업 후 나는 서울의 한 대학 병원에 입사했고 그 무렵 조쉬는 건축가가 되기 위한 과정을 계속 공부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다. 공장처럼 돌아가는 간호사의 삶은 힘들었지만 환자를 보는 건 뿌듯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그냥 일만 하도록 놔뒀으면 참 좋았을 텐데 신입만을 골라 괴롭히는 악독 선배 간호사에게 밑도 끝도 없이 갈굼을 당했다. 갈구는 이유도 가지가지였는데 화장을 안 하고 출근하면 피곤해 보인다고 혼나고 같이 일하는 날 내가 먼저 일을 끝내면 신규답지 못하다고 혼났다. 수위가 점점 세져 손가락으로 내 어깨를 툭툭 치는가 하면 오물처리실로 나를 끌고 가 울 때까지 갈궜다. 일명 간호사 세계에서 공공연하게 알려진 '태움'이었다. 면담 시간에 팀장에게 이 간호사의 태움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자 돌아온 답변이 이랬다. "너가 나중에 수간호사가 되어서 분위기를 바꿔보면 되잖아." 염증이 혐오로 바뀌는 건 한 순간이었다. 병원의 우두머리 어른들은 지금 당장 악습을 개선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그해 병원을 그만두고 조쉬와 결혼했다. 그리고 미련 없이 한국을 떠났다.
우울증에 걸리고 나면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게 내 주위의 사람들이다. 특히 나와 24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함께해야 하는 가족. 마음이 아픈 이에게 보호자의 역할은 실로 너무 중요하다. 의학적으로도 우울증을 혼자 이겨내야 하는 사람보다 주위에 도와줄 친구나 가족이 있는 사람의 회복이 훨씬 더 빠르다는 증거가 있다. 그들의 역할이 중요한 만큼 보호자의 스트레스 또한 상당하다. 영국에서는 따로 시간을 마련해 보호자에 대한 교육을 한다. 보호자에 대한 케어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을 정도로 보호자의 정신 건강도 우울증을 앓고 있는 당사자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긴다.
처음에는 나의 우울함이 조쉬에게도 전염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조쉬는 나의 걱정을 우습게라도 보듯이 두 팔을 있는 대로 벌려 더 큰 나무가 되어 주었다. 날씨가 궂은날에는 비바람을 막아주고 더운 날에는 그늘을 마련해 주었다. 공책을 따로 만들어 우울증에 대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상사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 병원에 함께 갈 수 있도록 했다. 운동도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하고 건강하게 챙겨 먹으며 나의 carer가 되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말도 못 하게 고마웠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나까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사명감으로 버티는 것 같아 미안하고 안쓰러운 감정이 복합적으로 들었다. 이때부터 조쉬는 내가 먼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자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아마 자기가 잠든 동안 내가 예전처럼 딴마음을 먹을까 봐 몹시 불안했을 것이다.
한때는 너무 미안해서 조쉬가 나 말고 평범한 영국 여자와 결혼을 했으면 어땠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비슷한 문화에서 비슷한 교육을 받고 자란 짝꿍을 만났다면 지금처럼 나 때문에 고생할 일은 없지 않았을까란 생각. 부질없는 생각이란 걸 알았지만 그만큼 조쉬에게 짐을 지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조쉬가 내 곁에 있어줘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도 했다. 조쉬 없이 이런 시련을 겪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짝꿍이 없었으면 나는 진작에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몇 년이 흐른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미안하기도 하면서 고맙기도 한 양가감정이 끊임없이 든다.
조쉬와 함께 지나온 시간을 생각하며 결혼은 2인 3각 경기와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미안하니까 먼저 가라고 손짓해도 소용이 없다. 우리의 발은 하나로 묶여 있어서 혼자서 속도를 내면 모두가 넘어지게 된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선 구령에 맞춰 하나 둘 하나 둘, 상대방이 힘들 땐 어깨도 빌려주고 손도 잡아주며 같은 속도로 걸어가야 한다. 넘어질뻔한 나를 붙잡아 다시 걷기를 시작할 땐 싱긋 웃으며 고맙다고 말해주는 게 큰 힘이 된다. 조금 느리더라도 그렇게 꾸준히, 결승선까지 함께 걸어가야 한다.
든든한 나무가 되어준 조쉬에게 나는 이제 열심히 물을 줄 것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무에 봄에는 어여쁜 꽃이 피고 가을에는 알록달록한 단풍이 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