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보람 Oct 29. 2022

때로는 소소한 것들이 크게 다가온다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   

세탁기를 돌리다 대형사고를 쳤다. 며칠 전만 해도 괜찮았던 세탁기의 호스가 배수관에서 분리되어 버렸다. 어쩌다 분리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세탁기를 돌리고 방에서 계속 일을 하고 있었는데 직감적으로 느낌이 안 좋았는지 다용도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방에서 나가보니 이미 문 밖은 물바다가 되어 있었고 다용도실에서는 세탁기 위로 물이 넘쳐 찰랑찰랑 거리고 있었다.


아, 이를 어쩐다. 급한 마음에 세탁기 전원을 꺼버리고 황급히 수건을 가져와 바닥에 있는 물기를 닦았다. 수건으로는 어림이 없어 물을 퍼내다시피 하고 히터를 틀어 바닥을 말렸다. 그날 저녁에도 나는 일을 해야 해서 학생과 수업을 하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났다. 학생에게 양해를 구하고 문을 열어보니 아래층에 사는 찰리였다. 낯빛이 어두운 찰리의 얼굴을 보고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찰리는 지금 자기 집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다고 했다. 아... 이거 정말 대형사고구나. 조쉬와 나는 일을 끝내고 황급히 찰리의 집으로 내려가 봤다. 이사 온 지 두 달 밖에 안 되어 깨끗하게 인테리어가 된 찰리의 집 천장에서는 정말 물이 흐르고 있었다. 에너지 비용이 솟구치는 이 시점에 불필요한 히터를 빵빵하게 틀어야 하는 비용 더하기 찰리의 집수리 비용까지,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저절로 두들겨졌다. 절망감에 벽에 흐르는 물 마냥 나도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찰리에게는 거듭 사과를 하고 우리가 깨끗하게 변상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착한 찰리는 괜찮다고, 살다 보면 이럴 수도 있지 하하하 웃으며 넘겼지만 속이 얼마나 타들어갔을까, 다시 생각해도 너무 미안하다.


이 망할 세탁기...


이런 일을 겪고 나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다용도실을 볼 때마다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이런 사고가 났나 자꾸 과거를 복기하게 된다. 푹 젖어버린, 아니 물에 절여진 코딱지만 한 다용도실을 말리는 데는 시간도 더럽게 오래 걸린다. 그동안 카펫을 걷어내고 히터를 풀가동했건만 사고 발생 4일째인 오늘도 바닥은 바싹 마르지 않았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한 냄새는 덤이다. 어쩐다, 오늘따라 축축한 바닥만큼이나 해외 생활이 고단하게 느껴진다. 푸념을 늘어놓고 싶어 영국 가족 메신저에 미주알고주알 그날 있었던 일을 털어놨다. 따뜻한 시댁 가족들은 괜찮냐며 나를 위로해 주고 위트 있는 동생들은 페인트칠에 자신이 있다며 자기들이 전문가인 척 등장해서 찰리의 집을 대신 고쳐주겠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발상에 나도 모르게 낄낄낄 웃음이 나온다. 다행히 가까이에 사는 동생 한 명이 제습기를 가져다줘서 오늘부터는 제습기까지 풀가동을 시켰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요즘 들어 영국답지 않게 비가 많이 오지 않고 마른날들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바닥은 언젠가 바싹 마르겠지 스스로를 위로하며 찝찝한 마음을 환기시키러 집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공원에서 마주친 할아버지가 나에게 싱긋 웃으며 "Hello!" 인사를 건넨다. 영국에서는 모르는 사람들과도 이렇게 인사를 나누는 게 문화지만 런던 같은 큰 도시에서는 아주 드문 일이다. 오랜만에 영국 시골처럼 낯선 이에게서 들어보는 헬로, 이 한 마디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사르르 녹아 또 웃음이 나온다. 집에는 여전히 사고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현실을 비웃기라도 하듯 웃음기 많아진 내 자신을 보며 드디어 어른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평화로운 날들 사이사이에서 이렇게 한 번씩 크고 작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화창한 날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리광 묻은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넘어가 줄 리가 없다. 인생이 나에게 끝없는 챌린지를 던질 때마다 나를 굴러가게 하는 오늘의 힘에 대해 생각해본다. 지나가는 행인의 인사 한 마디, 가족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고맙게도 중간중간 햇살이 내리쬐는 런던의 가을 날씨, 동네에 마음을 다스리기 좋은 공원이 있다는 것 - 생각해 보면 놀랍게도 나에게 힘이 되는 건 내가 친 사고의 스케일만큼 큰 것들이 아니다.


나를 굴러가게 하는 힘의 근원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온다. 오늘도 생각해보면 별 거 아닌 것들이 모이고 모여 나의 하루를 완성해 주었다. 웃긴 것은 평소에는 이런 소소한 것들의 소중함을 잘 모르다가 꼭 이렇게 큰일이 한 번씩 터지고 나야 내 인생이 온전히 나의 힘으로만 굴러가지는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걸 보면 정말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인가 보다. 오늘도 잃은 만큼 또 새로운 배움을 얻어간다.


공원에서 산책하며 심호흡 한번 크게!


이전 10화 국제연애의 기록 - 사랑하는 남편에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