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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 May 09. 2023

페즈가 알려준 다정히 싸우는 방식

9000여 개의 골목을 지닌 페즈(Fes) 메디나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메디나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은 인생 최고의 경험이 될 것이라고.


메디나(medina)는 도시라는 뜻으로,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기 이전까지 도시적인 삶의 중심지였으나 현재는 구시가지 느낌이 강하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미로같이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며, 모로코 대도시마다 메디나를 볼 수 있다.


페즈의 메디나

 아주 보기 좋게 길을 잘못 들어 5분 거리의 목적지를 30여분 간 헤맸던 당사자로서, 인생 최고의 경험이라고 말하진 못하겠다. 페즈의 메디나는 그 어떤 도시의 메디나들과도 차원이 달랐다. 9000여 개가 넘는 골목을 갖고 있다는 이곳은 오토바이와 같은 자그마한 교통수단조차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비좁았다. 이런 게 길이라고? 싶을 정도로 허리를 숙여야 하는 곳도 길이었다. 그 골목골목엔 기울어지는 건물들을 막기 위해 장작같이 생긴 거친 나무조각들이 틈을 메우고 있었다. 구글 맵도 날 전혀 도와주지 않았고 여행 막바지라 데이터도 다 떨어져 가는 참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끄고 벽 곳곳을 짚어가며 길을 찾는 것에만 오로지 집중했다. 메이즈 러너 세트장 안에 들어온 것처럼 이건 일종의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목표는 하나, ‘탈출’!


숙소 주인은 내가 체크인을 하자마자 지도를 꺼내 위치를 설명해주었다. (물론 그림에서 알다시피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올드 메디나 속에서 3일씩이나 보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페즈라는 도시를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러니까 5년 전 유튜브로 처음 접했다. 캣콜링과 관련된 영상이었고, 당시에 알고리즘을 타면서 도시가 부정적인 느낌으로 굉장히 유명해졌던 기억이 난다. 유튜버가 올리던 ‘페즈의 실체’라는 영상들을 하교 후 교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 한 구석에서 보았다. 친구들과 영상을 공유했고 입을 쩍 벌린 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영상 덕분에 페즈를 여행지로 넣을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생각하는 것보다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며, 아기자기하고 볼거리가 많다는 지인의 추천으로 결국 마지막에 가기로 결정한 여행지였다. 5년 전에 보았던 영상이 여전히 내게 잔잔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이후 어떠한 편견에도 휩싸이고 싶지 않아 여행 전까지 관련 유튜브 영상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저녁 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밥을 먹으러 들어간다.
오전에 길을 잃었던 내가 찍은 영상

  나는 고대 도시 페즈에서 로컬들 사이로 잘 스며들고 싶었다. 그래서 화장도 하지 않았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세상 가장 무난한 옷을 입었다. 그게 내가 선택한 이 도시의 여행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페즈에서 '낯설고 다른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충격의 연속이었다. 그 충격은 어떨 땐 좋은 느낌으로 신선했지만 가끔 당황스러울 정도로 겁이 났다. 집으로 돌아와서 다른 유튜버들의 영상을 보니 내가 겪은 것과 거의 유사했다. 그래서 며칠 동안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 나도 그들과 비슷한 모험심과 호기심을 가진 사람인 것 같은데 유튜버나 할 걸 그랬나.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모로코를 향한 편견은 페즈에선 편견이 아니었다. 실화였다. 곳곳에서 “마담!”을 외치는 사람이 붙었다. 처음 페즈에 도착해 캐리어와 함께 나 홀로 골목에 놓여있었을 때 누군가가 와서 30초 거리에 있는 호텔까지 길을 안내하고 팁을 달라고 했다. 사실 이미 사기가 아닌 것 같은 신종 사기는 카사블랑카에서 한 번 당했었고, 사하라 사막에서 배운 커다란 용기 때문에 그들을 물리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단순히 무난하게 넘어갔던 상황들을 순전 운으로만 치부하기에는 내 대처방식이 살짝 아까운 느낌... (그래도 조심하자.)


테너리를 가기 위한 관문 : 허리를 숙이고 이 길을 지나가라

 의도하고 페즈를 마지막 여행지로 넣은 것은 아니었는데, 일련의 여행에서 배운 것들이 날 크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페즈 메디나 곳곳을 누빌 때마다 나는 다정하게 맞서는 방법을 배워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메이즈 러너가 된 느낌으로 상황을 즐기다 보니 단기간에 수십 번씩 변화하는 내 모습이 확 느껴졌는데 그게 제일 재밌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모로코로부터 ‘잘‘, ’무사히‘ 돌아왔을 때 꼭 얘기하고 싶었다. 여행 도중에도 몇 번이고 브런치에도 얼른 적어내고 싶었지만 꾹 참고 다이어리에만 끄적였다. 마무리를 잘 해내고 나서야 목소리를 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스카 7관왕을 받았던 영화 <에브리싱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선 ‘ALWAYS BE KIND’라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영화의 나머지는 내 삶 곳곳에 이미 침투해 있을 만큼 인상적이었으나 이 메시지엔 늘 의문을 품고 살았다. (이전 글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도시 페즈가 그 간지러웠던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며 ‘다정하게 싸우는 방식’을 알려주었다.


테너리 골목에는 상인들의 환대와 함께 민트잎을 받을 수 있다. 대부분 공짜이니 안심하고 들어가도 된다!
테라스 곳곳에서 본 테너리 염색 공장, 그리고 엄마에게 줄 지갑을 골랐다. 민트잎으로 만들었다는 초록색으로 결정...

 페즈는 내게 단호하고 냉정하면서도 그 안에 온기를 품고 살아갈 수 있는 방식을 가르쳤다. 말 그대로 강강약약. 페즈 여행 당시 ‘이드’ 첫날이었다. ‘이드’는 라마단 금식월이 끝나고 난 뒤 가족들끼리 즐기는 축제이다. 거리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많이 북적였고, 덕분에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유튜브에서 보았던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는지에 따라 판도는 뒤집어졌다. ‘만약 모든 것을 의심하려 들면 결국 아무것도 의심하지 못한다’는 말을 돌아다니며 내내 곱씹었다. 난 이미 페즈에 와있고 이곳에서 3일 숙박을 할 예정인데, 그 모든 호의에 끝없는 의심만 하기 시작하면 여행이 재미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의 문화 속에 스며들어 언어도 써보려고 노력하며 지냈고, 내 상식선에서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다 보니 페즈 이튿날부턴 주관을 잃지 않는 나만의 여행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의외로 페즈에서 만난 모로칸들은 대부분 친절했다. 상인들은 민트잎을 한 움큼씩 손에 쥐어주며 본인의 무료 테라스로 와 최대 천연 염색공장을 구경하라고 했다. 길목에서 수많은 고양이들을 정신없이 쓰다듬고 있으면 건너편 메디나 상인분들은 “you like cats~?" 하며 흐뭇한 미소와 함께 윙크를 날리셨다. 아이들은 저 멀리서부터 한국인임을 눈치채고 빵긋 웃으며 내게 안녕하세요를 외쳤고, 낡은 골목 벽에 그려져 있는 BTS 낙서들은 왠지 모르게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페즈의 이모저모 사진들

골목 골목 BTS 낙서는 나를 웃음 짓게 했다
메디나 외곽길에서 본 태권도 학원
블루 메디나 입구와 시장
메디나 입구에 있었던 중식당. 강추합니다!
또진, 또스또스라는 말에 무한 공감.
한국어를 잘하시던 사장님이 보여주신 방명록. 읽고 맥주를 주문했다 :)
낙타 타고 낙타 만두 먹기....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사장님께서 스리슬쩍 꺼내주신 라마단 기간의 귀한 맥주. 아시아인이 반가우셨는지 페즈 아시안 식당 3개의 모든 사장님께 연락을 돌리시며 한국인이 왔다며 오늘 문 열었는지 확인해주심ㅠ
TIP : 그러나 메디나에서 받는 알 수 없는 호의는 웬만해서 거절하는 것이 맞다. 모로칸의 기본 정신은 똘레랑스, 즉 관용이기 때문에 거절한다면 곧장 받아들이긴 하니 엄청 걱정할 필요는 없다. 너무 친절하다 싶을수록 더 냉정하게 내 갈 길을 가야 한다. 길을 알려주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은 따르지 않는 것이 좋다. 구글맵도 믿진 못하겠지만 보통 반대편의 길들은 막혀있다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반대길도 다 열려있었고, 결국에는 내가 가는 길이 맞았던 경우가 다반사였다. 돌아와서 유튜브를 찾아보니 이런 케이스가 종종 있었다.) 골목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비좁고 복잡하니 마음을 단단히 먹을 것. 이상한 사람들은 대꾸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인생을 어떤 형체로 구축한다면 페즈 메디나가 되지 않을까. 어떤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나아가지만 가끔 여러 갈래로 나뉘고 그럴 때마다 선택을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곳곳에서 마주한 사람들은 가끔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잘 대처하고 넘어간다면 문제는 어찌어찌 해결이 되고… 그런데 그만큼 비례했던 다정한 사람들로 또다시 사랑이 숱하게 채워지고… 그래서 페즈를 비롯한 모로코의 많은 곳들을 단순히 편견으로만 판단 내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관심이 지나치다면 매정해져야 하는 것이 맞다. 나 역시 몇 번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화도 냈다. 그렇지만 직접 경험하기 전부터 잔뜩 힘을 주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 쓸데없는 힘은 비축해 두었다가 더 새롭고 다양한 것들을 보고 느끼는 데에 써도 충분하다. 페즈는 그런 의미에서 많이 벅차기도 했다.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할 만큼 많은 것을 배우고 또 실천했으니까, 내가 정신적으로도 지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재밌다. 나름 모든 것에 흡수력이 빠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모로코 페즈는 한없이 날 겸손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굴러가지 않는 게 세상에 두 개가 있다면 그건 바로 모로코 페즈와 삶일 테다. 그러나 나만의 방식을 더 확고히 할 수 있었던 이 여행에서 확신한다. 이전의 삶에서 쌓아온 자신감과는 차원이 다른 어떤 묵직한 용기가 여전히 내 안에서 새롭게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아기 고양이가 골목골목 정말 많았다
나를 무시하던 고양이(?)
스트레칭 한 번 해주고 너무 귀엽게 다가왔던 개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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