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그녀와 그, 그리고 나의 늙음
할머니의 주름살을 생각한다.
턱 밑에서부터 목 아래로 늘어져 있던 주름들. 매듭을 묶어 주름진 비단 보자기나 커튼 주름을 닮았었다. 나는 그 피부의 감촉이 좋았다. 빳빳하게 뻗대지 않고 부드러웠다. 할머니는 내가 목주름을 만지도록 허락했지만 썩 좋아하진 않으셨다. 겉 표면에 촘촘히 갈아엎은 밭이랑과 고랑처럼 주름살이 빽빽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가 늙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기억 속 할머니는 그냥 처음부터 할머니였다. 할머니 이름이 곱디 고운 '순이'라는 것을 인지했을 때의 놀라움을 기억한다. 그녀에게도 마흔이 있었고 스물이 있었고 아이였던 시간이 있었을 텐데. 그녀의 젊음은 당연한 나이 듦 만큼이나 현실감이 없었다.
조부모의 늙음은 그냥 당연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죽음을 품고 있었다. 내 기억 속 유일한 조부모였던 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돌아가셨다. 십대가 된 직후였던 것 같다. 장례식을 집에서 치렀고, 집에 사람들이 와서 기도를 했으며, 할머니는 선산에 묻히셨다. 말년에 세례를 받으셨고 기일이면 할머니 이름이 봉헌된 미사가 있었다. 아주 멀리 사는 큰아버지를 그때 처음 봤고, 그가 작은 고모랑 너무나 닮아서 놀랬다. 나는 할머니가 높은 사다리를 오르는 꿈을 꾸었고, 친척들 사이에서 그 꿈 얘기가 잠깐 회자되었다 잊혔다. 할머니의 죽음은 이런저런 이벤트의 연속으로 기억된다. 죽음에 내 마음의 저항이 느껴지지 않았고, 그 늙음 속엔 오히려 신비가 감돌았다.
최근 엄마의 주름살을 봤다.
추석 직전 아이들 옷을 사던 때였다. 아웃렛에서 적당한 가격의 옷을 사고 뿌듯한 마음으로 백화점에서 식사를 했다. 엄마가 아이들 외투를 하나씩 사줘서 더 기분이 좋았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문득, 맞은편 엄마의 턱 아래 늘어지고 건조한 주름살이 눈에 띄었다. 엄마는 별 시답잖은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주차 등록을 했는가에 대한 얘기였나? 그럭저럭 나와 아이들은 우리 집으로, 엄마는 엄마 집으로 갔는데, 그 주름살이 자꾸 떠오른다. 색깔은 할머니의 것보다 훨씬 하얗지만, 결코 비단 보자기를 연상시킨다거나 만지고 싶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 시대의 쇠락을 의미했다.
부모의 늙음은 불편하고 당혹스럽다. 그러고 보니 아빠의 치아 색이 누레진 것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래, 그것은 할머니의 빈 잇몸과 틀니보다 훨씬 충격적이었다. 젊어서 비상한 기억력과 준비력을 자랑하던 그가 차 열쇠를 어디다 뒀는지 찾는 모습은 말할 것도 없다. 맞다, 걷는 것이 힘들어 함께 여행 갈 때면 동선을 최소화한 지는 꽤 됐다. 이미 늙음은 깊숙이 침투했다. 부모의 늙음은 당혹스럽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마음이 무겁고, 슬쩍 아리고, 또 안타깝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항하고 싶다. 그들의 젊음을 기억하기에 더 불편하다. 이쯤 되면 늙음은 필멸의 존재에게 따르는 형벌로 다가온다.
필멸의 존재에게 그어진 명백한 한계.
노쇠에 따른 모든 생리학적 징후가 제거되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노인의 모든 정신적인 특징들도 제거되었다. 평생 동안 개성들은 변함이 없다.
p.103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소담
너무 나이가 많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면서 조심스럽게 한 칸씩 내려왔다. 그의 얼굴은 깊게 주름이 지고 새카매서 오석으로 만든 가면을 쓴 사람 같았다. 치아가 없어서인지 입은 푹 꺼져 있었다. 입가와 턱의 양쪽에서는 몇 가닥의 길고 뻣뻣한 털이 시커먼 피부와 대조적으로 하얗게 반짝거렸다. 땋지 않은 기다린 머리는 그의 얼굴 주위로 회색 다발을 이루며 흘러내렸다. 그는 몸이 구부정했으며 살이 거의 없을 정도로 뼈만 앙상하게 말랐다. 다시 발을 옮기기 전에 한 계단마다 잠깐 멈춰 잠깐씩 쉬면서 그는 아주 천천히 내려왔다.
"저 사람 왜 저래요?" 레니나가 숨죽여 물었다. 공포와 놀라움으로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냥 늙어서 그래요." 버나드는 가능한 한 무관심하게 말했다. 그 역시 놀랐지만 마음의 동요를 보여주지 않으려 나름대로 애를 썼다.
"늙어요?" 그녀가 되풀이해서 말했다.
p.178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소담
올더스 헉슬리의 1932년작 <멋진 신세계>에는 늙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늙음과 가까운 죽음의 무게도 가벼워졌다. 책 속 린다의 죽음은 화학비료가 되는 인이 확보되는 과정이었을 뿐, 야만인 존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울림을 주지 않았다. 죽음의 연결선상에 있는 삶의 무게도 한없이 가벼워졌다. 작가는 가상의 사회에서 늙음을 제거함으로써 '늙음'의 가치를 역설했다. 그것은 유한한 삶에 대한 불안, 불편, 사색, 철학을 동반한다. 예술과 신에 대한 자극이 되며, 그래서 인간이 성숙한 존재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 중 하나이다.
그런데 말이다. 내 눈앞의 늙음은 역시 받아들이기가 만만치 않다. 당혹스럽고, 불편하고, 멀리 돌아가고 싶다. 영원히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어도, 건강하고 젊게 살고 싶단 생각은 많이 해봤다. 늙음의 겉모습은 얼굴엔 주름이 가득하고 생기가 없어 보는 이를 기쁘게 하지 않는다. 발에는 납덩이를 단 것처럼 걷는 게 힘들어지고, 등에 무거운 짐을 맨 것처럼 허리가 굽고, 어두운 안경을 쓴 것처럼 시야가 흐려지는 현상을 수반한다. 이에 따라 앉아서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경험을 반추하며, 인간 내면을 살필 수 있는 속모습을 내포할지도 모른다. 다만.
정말 그런 늙음의 가치를 누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의문이 남는다.
늙는다는 것에 대해 부쩍 생각한다. 나는 올해 마흔셋이다. 나의 늙음도 슬슬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노안, 주름살, 흰머리, 급속한 단백질 감소, 인지능력 쇠퇴 등 부모에게서 보이는 노쇠의 징후는 내게도 이미 나타났다. 증강현실에 가까운 사진 앱으로 셀카를 찍고, 피부과 시술을 알아보고, 노화방지에 좋다는 각종 영양소나 음식을 쇼핑목록에 넣을 때마다 생각한다. <멋진 신세계>에서 처럼 신체적인 노쇠의 징후를 제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기가 어렵다.
마음의 성장은 계속하고 몸의 늙음만 제거하는 것은 정녕 불가능한 걸까. 몸은 활력을 유지한 채 내면이 깊어졌으면 좋겠는데, 실상은 신체는 시간표대로 늙어가고 마음만 아직도 성장하고 있지 못함이 분명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나의 젊음은 지나간다. 남은 인생 가운데 가장 젊은 순간이 휘발되고, 그 자리에 늙음이 채워진다.
오늘은, 올더스 헉슬리보다 오스카 와일드의 한 마디가 가슴에 꽂힌다.
노년의 비극은 늙었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인생을 잘 모르는 풋내기라는 사실에 있다네.
The tragedy of old age is not that one is old, but that one is young.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오스카 와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