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되바라진 건들장마에도 축구는 멈추지 않는다

비 오는 날 축구장에서 하는 여자들의 공놀이

by 끼우

여름의 끝이었다. 장마라는데 연습하는 그 두 시간은 비가 내리지 않는다. 훈련하라는 하늘의 지시였다. 안개비처럼 흩뿌리는 비가 싫지 않았다. 한 언니는 천연 미스트라면서 얼굴을 하늘로 들어 올리고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축구하는데 적당하게 내리는 비는 언제나 옳다. 땡볕보다 나으니까. 그리고 시원해지니까.


비 한 방울에도 민감했던 여자


축구를 시작하기 전에는 비에 민감한 여자였다.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면 비를 피해 건물로 들어가거나 우산을 찾느라 요란법석이었다. 학창 시절에도 비가 오면 엄마가 언제나 마중을 나왔다. 비를 맞아본 적도 없었지만 비를 맞으며 노는 아이들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가 된 뒤에도 아이들이 비 맞고 감기 걸려서 고생하는 일이 싫었다. 그래서 비 맞는 일은 사절이었다. 그러던 내가 이제는 비 맞는 일을 좋아하다니.



비 오는 축구장에 봉분도 있고 고추잠자리도 있고


내가 다니는 축구장은 비가 오면 옆에 있는 하천이 넘쳐 물이 받아지는 구조다. 때문에 작년에는 비가 많이 와서 축구장에 오리가 떠다니기도 했다고 들었다. 비를 머금은 인조잔디 축구장에 볼록하게 올라온 인조 잔디를 보며 언니들이 말했다.


축구장에 파도가 친다. 밑에서 물이 넘실거리고 봉분이 오르락내리락 한다. 나는 밟아보기로 했다.


“무슨 묘지다.”


축구장에 봉분이 여럿 서 있다. 나는 신기해서 달려가기로 했다. 발로 밟아 보고 점프를 해봤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하늘에는 이미 가을을 알리는 고추잠자리가 비를 요리조리 피해 날아다니고 있었다. 둘째가 가족끼리 축구를 하다 삐쳤던 적이 있었다. 삐친 채로 두고 축구하는데 갑자기 둘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추잠자리가 귀엽다고 잡아보겠다고 날뛰며 웃었다. 고추잠자리가 고맙고 예뻤다. 비 오는 하늘을 보면서 그렇게 둘째를 생각했다.


건들건들 건들장마야 시간 좀 뺏지 말아 줄래?


보슬보슬 내리는 비의 단어를 찾고 싶었다. 축구장에 내리는 비에 맞는 단어를 알고 싶었다. 문득 건들장마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가을에 비가 쏟아져 내리다가 번쩍 개고 또 오다가 다시 개는 장마를 의미했다. 그런데 ‘건들’이라는 단어가 거슬렸다. 건들건들. 사람이 건드러진 태도로 되바라지게 행동하는 모양을 뜻했다. 비가 와서 축구를 못하게 되는 날이면 실내로 다시 옮기는데 그렇게 되면 시간을 빼앗겨서 아쉽다. 그래서인지 건들장마가 되바라진 못된 건달 같은 느낌이었다. 여름이건 가을이건 시간을 잡아가는 날씨건달.

나무데크 위로 비를 피하는 처마가 있다. 빗방울이 그치기를 기다리는데 밖에서 조명은 그대로 비를 맞고 있었다.


비 온 후 빨아버린 축구화


다음 연습 날이 되자 운동장은 엉망이었다. 우리는 그 흙탕물과 지푸라기들이 흥건한 축구장에서 공을 찼다. 하필이면 경기용으로 쓰려고 아끼던 새 축구화를 신고. 축구공, 축구화, 손에는 흙이 넘쳤다.

감독님이 말했다. “축구화는 세탁하는 게 아닙니다. 구두처럼 빨면 안돼요.”

그럼 어떻게 이 비싼 축구화를 감당하라는 건가. 흙을 물티슈로 감당할 수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축구화를 살살 빨았다. 하지만 장마라 축구화가 마르지 않았다. 건조기를 돌려버렸다.



+ 비 온 뒤에는 할 일이 참 많습니다. 비가 오기 시작하면 집 창문은 다 닫았는지 아이들은 우산을 가져갔는지 나갔다 온 우산도 말립니다. 아이들과 함께 읽었던 ‘도깨비를 빨아버린 우리 엄마’가 생각났습니다. 동화 속에서는 도깨비를 빨랫줄에 건조합니다. 이제는 도깨비를 빨아서 건조기에 돌리면 되는 세상이 온 것 같습니다. 축구화도 건조기에서 멀쩡히 살아 나왔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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