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시, 기행시첩答詩紀行詩帖그 하늘에 쓰네 해남편

by 김지숙 작가의 집

그 하늘에 쓰네 해남편


-정약용과 고정희



해남을 방문할 일이 생겼다 정약용선생의 유배지와 고정희 생가터만은 이번 기회에 꼭 다녀 올 심산으로 일정을 다잡았다

다산茶山은 강진 귤동 뒷산 이름이다 18년 동안의 삶이 다산초당 옛터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초당까지 가는 신길은 숲이 우거져 그늘져서 살짝 어둑하다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귀양 와서 목민심서 등을 집필했던 곳이자 존경하는 분들 중 한 분을 뵈러가는 길이라 생각하니 두근거리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이 길을 올랐다 그 분이 기거할 적에는 분명 이름처럼 초당이었으리라 생각했는데 기와집이라서 잠시 의아했지만 고색이 흠씬 풍기는 기와와 툇마루도 나름 후대인들이 그분의 공로에 집격을 맞춘 듯이 보인다

초당의 앞에는 차를 달려 마시던 다조가 있고 초당의 왼쪽에는 정석丁石이라는 글씨가 있는데 분명 그분이 직접 새긴 것이라 몇 번을 만져봤다 이곳에서 물을 길어 앞마당에서 차를 달여 초의선사와 차를 마시지 않았을까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은 추사의 글씨를 새긴 것이다 특별한 장소인 관어재觀魚齋에서 그 분은 문을 열고 연못 속의 물고기를 바라봤으리라 나 역시 연못 속의 물고기를 바라보는 일을 즐기기에 비슷한 점을 발견해 내심 기뻤다

조금 내려오면 새로 만든 작은 정자 천일각이 있다 이곳에서 그분이 강을 바라보면 약진형을 생각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정자에 올라 탐진강을 내려다보면 형을 생각하는 마음이 와 닿는다 천일각에서 1키로 내외거리에 백련사가 있다 일정상 거기까지는 가지 못했다 백련사까지 그분이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걸었을까 다음 기회가 된다면 그 마음을 헤아리고 싶다


다산초당을 뒤로 하고 고정희의 생가터로 향했다

평소 고정희 시인은 당대의 암울하고 부당한 현실에 부단히 시로 항거하던 여성이라는 존경하던 터라 꼭 한번은 생가터를 찾고 싶었다 여성 시인 가운데서는 난설헌 과 고정희 시인을 정말 각별하게 생각한다 시를 잘 쓰기 때문이라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날씨가 정말 화창했다 내비게이션에 나타나지 않아 인터넷에서 알아낸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해 겨우 찾았다 길거리에 안내판도 없고 지나가는 행인도 많지 않아서 길을 묻기도 힘들었다 내비게이션이 도착했다는 말과 도로 앞에 멈춰선 곳에서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눈짐작과 인터넷에 있는 사진을 참고하여 어렵사리 찾았다 산언덕의 소나무와 교회당 건물을 찾고 그 아래 한적하다 못해 고독해 보이는 빈 논 가운데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차를 세우고 대문이 활짝 열린 집을 들여다보니 생가터 팻말이 있고 친척 한분이 살고 있었다

대문이 제대로 없는 여느 시골 할머니가 사는 작은 집이다 대문간 옆에는 감나무가 있고 감이 몇 개 달려 있다 집안에 들어와서는 곧장 그분이 20살까지 살았다는 방에 들어섰다 막상 들어서고 보니 너무 조용한 방안에 마음은 무거웠다 시계는 그 어느 날부터 멈춰 서 있었고 막상 그분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보니 이 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썼을 고정희 시인이 느꼈을 수많은 시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손때가 묻어 있는 노트며 필기구 글씨들을 보면서 잠시 그분의 생애가 눈앞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분은 또 하나의 문화라는 여성주의 공동체 동인으로 활동했다 아이와 어른 여자와 남자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를 모색하는 모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남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여성의 고통을 겪으면서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의 장을 처음 열었다 여성의 삶에 대해 치열했으며 부단한 노력을 했던 이 분야에서 선구자이다 대부분의 선구자처럼 그분 역시 비운의 삶을 살다갔다

정치적으로나 성적으로도 금기시 된 언어들을 시에 차용하였으며 여성들의 삶의 방식을 시에 언급하였으며 가슴 저리는 사랑을 곤륜산 넘나드는 아픔으로 표현한다 그분의 10권 시집은 각각 다른 주제가 특징이다 그 가운데『아름다운 사람 하나』시집을 각별히 좋아한다 한편 한편 시를 읽으면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면 저렇게 아름다운 표현이 나오고 저런 시가 되는지 읽고 또 읽었다 그런 사랑을 하며 살다간 시인의 감성이 좋았다

그중에서도 「겨울사랑」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 시가 주는 간절함보다 그 간절함을 표현하며 얼마나 아팠을까에 더 마음이 갔다 어떤 사랑이기에 단 한 번의 감촉으로 몇 년을 견디는지 느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단 한 번의 기쁨과 단 한 번의 진실로 일생을 버틸 힘으로 삼고 살았는지에 한편 무모한 듯 하지만 그 사랑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껴졌다 그분의 시혼에 담긴 사랑은 열정적이고 치열하고 충만하여 읽는 내내 가슴은 그저 뭉클해 왔다

「겨울사랑」을 읽고 나도 답시를 섰다 너무 사랑을 하다 그 사랑에 자신을 몽땅 잃지 않기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그분이 어떤 이를 사랑하는 만큼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고 염려하고 있었다는 그 마음을 그리고 그 마음이 지극하다는 것을 담아내고 싶었다

책상 앞에 앉아 한참 그 마음을 생각하면서 나도 답시를 한편 썼다 사랑이라는 주제로 쓴 그분이 한 그 사랑을 이제는 놓고 훨훨 편안하게 떠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갖고 있는 것보다는 놓아버리는 것이 오히려 더 깊은 사랑이라는 걸 그분도 알고 있으리라 놓아버리는 것이나 오래 기억하는 것이나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것이니

책상을 떠나기가 싫었다 하지만 마냥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오고 나가기까지 아무도 오지 않았기에 오래 앉아 있어도 간섭하지 않겠지만 산소도 들러보고 싶어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생가를 나와서 대문을 끼고 오른쪽으로 가면 방죽이 있고 방죽 위에 그분의 묘가 있다는 친척의 말을 듣고 길을 나섰다 갈림길이 나오고 왼쪽 길로 가라는 표지가 나온다 바로 뒷산의 소나무숲 아래에 묘가 보인다 꽃도 없고 특별하지도 화사하지도 않는 세월의 흔적만 남은 묘와 묘비명이 정갈하고 고즈넉하다 묘에서 앞을 바라보면 해남의 들판이 아주 잘 보인다 잠시 묵념을 하고 다시 마을길을 돌아서 나왔다

처음 들어갈 때에는 몰랐는데 돌아서 나가는 길에 언덕에 교회와 노송이 보인다 벼락을 맞았는지 태풍에 꺾였는지 윗부분이 부러진 채 그래도 잘 살아내고 있었다 그분이 이곳에서 청년시절을 보내면서 소나무도 교회당에 자주 눈길과 발길이 가닿았으리라 생각하니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시인의 눈으로 다시 한 번 그들을 바라봤다

생가터를 둘러보면서 부당한 현실에 분노하고 상처 입은 자를 위해 투쟁하고 고통스러운 내면을 시로 승화시키면서 시대와 사회와 삶에 고뇌하고 성찰한 의지와 이루지 못한 사랑의 절절함이 더욱 와 닿았고 이번 기행은 이를 각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약용「打麥行 보리타작」


新蒭獨酒如湩白(신추독주여동백) : 새로 거른 막걸리 젖빛처럼 희고

大碗麥飯高一尺(대완맥반고일척) : 큰 사발에 보리밥이 높기가 한 자로다

飯罷取耞登場立(반파취가등장입) : 밥 먹고 도리깨 잡고 마당에 나서니

雙肩漆澤翻日赤(쌍견칠택번일적) : 검게 탄 두 어깨가 햇볕에 번쩍인다

呼邢作聲擧趾齊(호형작성거지제) : 응헤야 소리 내며 발 맞춰 두드리니

須叟麥穗都狼藉(수수맥수도랑자) : 삽시간에 보리 이삭 온 마당에 가득하다

雜歌互答聲轉高(잡가호답성전고) : 주고받는 노랫가락 점점 높아지고

但見屋角紛飛麥(단견옥각분비맥) : 다만 지붕 위에 어지러운 보리티끌 뿐이구나

觀其氣色樂莫樂(관기기색락막락) : 그 기색 살펴보니 즐겁기 짝이 없고

了不以心爲形役(료불이심위형역) : 마음이 몸의 노예 되지 않았음을 알았도다

樂園樂郊不遠有(락원락교불원유) : 낙원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니

何苦去作風麈客(하고거작풍주객) : 어찌하여 벼슬길 떠나는 것 고민하고 있는가.



고정희 「겨울사랑」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 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슥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고정희 「겨울사랑」에 대한

답시 혜월당 「방하착放下着」



놓아라

버려라

버리려는 그 마음까지 놓아버려라


활짝 핀 채

쓰레기통에 버려진 참나리꽃도 있고

첫 초록 채 피기 전에 뿌리 뽑힌 푸른 나무도 있다


잊어라

잊으리라

다짐하는 그 각오조차도 다 잊어라


평생을 기다리다

하루 만나고 헤어진 사랑도 있고

그리움에 목말라 쓰러진 젊음도 있다



모두 놓아라

그리고 세세토록 다시는 잡지 마라

푸른 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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