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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시인 혜월당 Jul 28. 2024

우리는 어떻게 길들여지나

우우리


우리는 어떻게 길들여지나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원하든 원치 않든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고 밥을 사거나 밥을 대접받게 된다 밥을 사는 경우에는 돌려받아야겠다는 생각만 안 한다면 대개는 마음의 빚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혹은 원하지 않게 일방적으로 밥을 대접받으면 왠지 마음에 빚을 진 기분이 들고 그것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갚아야 할지 시기만 재게 되는 불편함을 안고 관계를  유지하거니와 내심 뭔가를 반대급부로 내놓아야 한다는 마음의 빚을 지게 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밥 한두 번 대접받은 것으로 그렇게 빚으로 생각하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밥을 대접받은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가족이나 친지나 오랜 친구 연인도 아닌 순전한 남남이라는 관계에서 그냥 상대가 사는 밥을 일방적으로 넙쭉 넙쭉 받아먹는 것도 사람이 할 짓은 아닌 것 같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일 순간 늘어난 부담에 마음의 빚쟁이가 되어버린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매번 밥 대접을 받을 이유는 없다 밥을 굶거나 특별히 남에게 의지하여 공밥 먹기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혹 모를까 특별히 밥을 사야 할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그럴 수는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어느 특정한 사람이 자주 밥을 사면 한두 번은 미안해하면서 혹은 고마운 마음을 가지면서 밥을 받아먹지만 자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다른 사람들은 타성에 젖어 또 그 사람이 또 사는 거야 돈이 많은가 보지 아니면 돈에 곰팡이가 쓴다거나 등의 말을 하면서 그저 그러려니 하며 무덤덤한 상태에서 고마운 마음조차 갖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면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나중에 자주 밥을 산 사람이 어떤 일을 제시하거나 요구할 때에 쉽게 거절하지 못하게 되고 자신의 의지를 피력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설사 강하게 피력하는 경우에도 <비싼 밥 척척 받아먹을 때는 언제고 그거 한번 못 들어주냐>는 식의 눈총을 의식해할 경우도 있다 이게 바로 상호성의 법칙 Law of Reciprocity이며 갚아야 하는 부채가 쌓인 경우가 된다 

집에서 키우는 짐승들은 자신에게 밥을 주는 사람을 주인으로 인식하게 되고 급기야 주인이 나타나기만 해도 특정 옥시토신이라는 물질이 분비되어 정서적 교감을 일으키게 된다 물론 사람은 그 경우가 다르고 사람마다 반응이 다르게 드러나겠지만 훈련된다는 점에서는 그다지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다는 속담과 달리 자주 이유 없이 대접받은 밥이 뒤늦게 목구멍에 걸려서 후회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깟 밥 한 그릇이 대수냐며 뭐라고 말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은 빗방울이 바위를 뚫듯이 몇 번의 밥대접을 받고 나면 나중에는 <낯이 보셔서> 그 누구든 그 앞에서 쉽게 밥 산 사람의 말이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 그러기에 아예 처음부터 이런 구조를 만들지 말아야 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서 옳은 일이지만 어느덧 자신도 예기치 못하게 공짜밥의 덫에 걸려 가두리에 갇힌 짐승처럼 점점 그 상황에 길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 일방적으로 밥값을 늘 내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알게 모르게 관계에서 갑과 을이 정해지고 어느덧 자신이 그 아래의 을로 스며드는 무서운 관계가 형성된다 만약 자신이 밥값 내는 상대에게 뭔가를 내어 줄 것이 있다면 그나마 당당하게 대접받기도 하겠지만 상대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모든 것을 가진 경우라면 자연히 갑을 관계가 밥값으로 정해지고 여간해서는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은 왜 사소한 것에 약할까 거액의 돈이 아니라 그냥 고작 한 끼의 밥값이고 그 밥을 못 먹고 굶는 사람들도 아닐진대 뒤꿈치도 못 따라가는 양심이 밥 몇 번 대접받고 난 뒤 스스로 을이라는 쇠고랑을 차고 끌려다니게 되는 것일까 왜 그 상대에게 자기의 소신을 피력하지 못하는 것일까

밥을 무조건 대접하는 사람들의 경우, 선의의 에코이스트들이 더 문제이다 자신은 별 뜻 없이 밥을 사고 차를 차고 상대를 배려하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즐긴다 치더라도 그 결과는 같은 물을 먹고 벌은 꿀을 만들고 독사는 독을 만들듯이 다른 결과치를 낸다    

간혹 달리 이런 현상을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독사 같은 경우를 빗댄다면, 상대가 자신을 대접하고 우대한다고 여기며 자신이 대단하다고 점점 강도를 높여 교만과 자만으로 키워간다 특히 나르시시스트적인 성향이 강한 경우에는 상대가 자신을 여신이나 혹은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다고 작정하고 상대에게 단지 밥값이 아니라 더한 것도 바라는 혹구로 점찍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상대가 자신을 배려하고 베푸는 선한 행위에 자기 교만이라는 마약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고 이를 악용하여 더욱더 교만하고 안하무인의 자세로 주변인들을 대하는 민폐를 키워내는 데 공헌하는 행동이 된 게 된다

뺑덕어미도 아니면서 뺑덕을 감싸고 보호하고 간을 키워내는 행위처럼 섣부른 에코이스트들의 선한 행위는 뺑덕어미처럼 간악한 나르시시스트인 뺑덕이를 보호하는 방어막을 하나 더 쥐어 주는 셈이 되고 그 힘을 키우는 무기를 갖고 주변인에게 휘두르는 셈이 된다 

하지만 전혀 감사할 줄 모르는 나르시시스트들은 상대의 친절이나 배려는 나르 자신이 충분히 그럴만한 대접을 받을 가치 있는 존재라 여기며 스스로 존중받을 만큼 가치 있고 당당하다는 자기 주입과 그 결과로 더욱 주변인들에게 교만하게 굴고 무상으로 제공되는 선의의 친절은 모두 상대를 호구로 생각하고 주변 사람을 깔보는 안하무인의 마음에 힘을 더하는 교만의 독을 더 많이 생산하는 힘을 만들게 된다

선의의 에코이스트들은 시의 적절하게 자기 가치를 더높이는 도구로 교만의 독을 만들고 뿜어 주변인에게 피해를 입게 된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선의의 친절도 사람을 봐가면서 때와 장소를 가려 베풀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친절 역시 선하다 할 수 없다 

독을 품는 독사에게는 먹이를 줄 필요가 없다 독이 필요한 목적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그 독이 오히려 주변을 해치는 상황이라면 잘못된 선택이 되기 때문이다 <예쁘다 하니 손자가 할아비 수염 당기는 꼴>에서 부정적인 방향으로 한층 나아간 형상이다 

예의도 없고 이기심이 극치에 이른 이기적인 사람이라면 필요 이상 친절하거나 잘 대해 줄 이유가 전혀 없다 적절한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어가는 친절은 오히려 그 사람에게나 주변인에게 독이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잘 알아야 한다 독사의 교만은 그 늘어난 독으로 주변인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친절과 호의를 베푸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때로는 잘못된 일인지는 알아야 한다

별다른 의미가 있는 친절이든 아니면 각별히 챙겨주는 친절이든 친절을 왜곡하는 자에게서는 별다른 유익한 성과를 얻지 못하고 결국 독만 키울 따름이다 선의로 베푼 에코이스트들의 친절로 나르시시스트 같은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다만 그 친절을 먹이로 더 나쁜 방향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마치 독사에게는 독을 만들 요소만 있으면 되고 그것이 어떤 의도이든 무관한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선의로 베푼 친절로 상대가 꿀을 만들어낸다면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는 주변이나 자신에게 유익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 되지만 친절을 베푼 것이 상대가 독을 만들고 그 독으로  힘을 얻어 날뛴다면 그것은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다 따라서 사람 봐 가면서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 

아무에게나 친절하다고 그 친절함이 상냥함이나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친절도 호의도 투자이다 차라리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푼다면 오히려 감사하고 삶에 생기를 불어넣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그것도 호의의 타성에 젖은 이기심에 절어 있는 나르시시스트에게 친절을 베푼다면 그것은 친절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로 나타난다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 

친절도 사람 봐 가면서 상황 봐 가면서 베풀어야 한다 아무리 진심을 담은 선한 에코이스트들의 친절이라 하더라도 그 진심은 베푼 자의 마음 그대로 상대에게 전해지지는 않고 원하는 결과를 낳지도 않는다 언젠가는 그 친절로 만든 독으로 뒤통수 맞는 일도 생길 수 있다 한 번이라도 선의를 베푼 에코이스트가 독을 품어내는 나르시시스트에게 뒤통수를 맞아본 사람이라면 왜 사람은 가려 사귀어야 하고 왜 가려서 친절을 베풀어야 하는지 알게 된다

밥빚은 작아 보여도 결코 작은 것이 아니며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어떤 빚이든 하나하나 쌓이면 선뜻 소신대로 운신하기 곤란한 족쇄가 늘게 된다 그래서 자기가 먹은 것은 각자 지불하는 방식이 가장 합리적이다 다만 자기 밥값 내는 정도는 부담가지 않는 사람들끼리의 만남에서는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빚을 상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우리는 그 누구에게라도 길들여져서는 곤란하다 그것도 밥값으로 길들여진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혹은 길들여지지 않고 더욱더 날이 갈수록 기세 등등 하여 뻔뻔한 나르시시스트들을 바라보면서 사람과의 관계는 정말 쉽지 않고 선의의 에코이스트들이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지 결과치를 경험하는 주변인의 입장이 되면서 자기  의지대로 생각하고 그 판단이 정의롭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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