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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시인 혜월당 Feb 23. 2024

진짜 말이 안 통하더라

진짜 말이 안 통하더라



대학 새내기 때이니 참 오래전에 일이다 입학 초기에 지인들의 소개로 동아리 서너 군데 가입하여 활동을 했다 선배들은 조언을 새겨들으라며 이곳저곳을 다녀봐야 자기와 맞는 곳을 찾는다며 동아리 입회하기를 권했다 권유에 못 이겨 들어가다 보니 동아리가 서너 개는 된 것 같다 

어디에 구속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지만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이곳 찔끔 저곳 찔끔 드나들다 보니 어느 한 곳도 그다지 열심히 활동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병영 훈련이 있었고 1학년  5월 정도쯤 남학생들이 병영 훈련을 들어갔다 

그런데 그 병영 훈련소에 들어가는 남학생에게 같은 기수들이 의무적으로 편지를 쓰게 하는 전통 같은 것이 내려져 오고 있었다 당시에도 참 이해 할 수 없었던 부분이었고 지금 같았으면 단박에 거절하고 그 자리를 떨치고 나올 터이지만 그때만 해도 순진했고 선배들이 강요니 어쩔 수 없다 여기고 불만스러운 기분이었지만 손 편지를 써 보내야 했다 

하지만 같은 기수라는 이유로 잘 알지도 못하는 남학생에게  억지춘향격으로 편지를 써 보내라니 낯선 사람을 상대로 뭔가를 쓴다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당시에 나는 헷세의 전작품을 탐독하던 터였고 그의 작품에 온통 심취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궁리 끝에 그냥 <페터카멘친트>를 읽고 난 독후감을 편지 대신에 써 보내기로 했다 

한 사람에게만 보내기가 뭔가 기분이 썩 좋지 않았고 손해보는 기분도 들고 짜증도 나고 해서 똑같은 내용으로 다른 동아리 1학년 남학생들과 옆집 사는 함께 입학한 남학생에게도 똑 같이 손 편지를 5명에게 보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반응도 궁금했고 뭔가 한사람에게만 나의 귀한 독후감을 보낸다는 것은 나의 가치가 떨어질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과는 정말 각양각색이었고 독특했다 공대생은 아주 정확하게 독후감이라는 걸 파악하고 왜 독후감을 내게 보낼 생각을 했냐며 그래도 반갑더라면서 별 달리 할 일이 없어서 자유시간에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고 말했다 

옆집이 살던 문대생은 편지를 보내줘서 고맙다면서 남포동에 가서 맛있는 밥을 사주고 싶다고 해서 밥을 먹고 이후로도 한참 동안 좋은 친구로 같이 버스를 타고 통학하며 이런저런 대학 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다 

법대생은 손 편지를 받은 그날 이후로 나를 계속 따라다녔다 자기는 글 잘 쓰고 책 많이 읽는 똑똑한 여자가 이상형이라며 주야장천 나를 따랐다 내가 없을 대에 나를 찾아서 집으로도 오고 내 아버지도 만나고 제 딴에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나를 사귀고 싶어 했다 그 통에 나는 한동안 아주 큰 곤란을 겪었다 그리고 한 사람은 아예 묵묵부답이었다 

문제는 마지막 인문대생인데 무슨 큰 일이나 난 것처럼 당황스럽게 굴었다 기억도 아련하지만 아마도 노발대발을 한 것 같았다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단지 독후감일 뿐이라고 몇 번을 말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벽창호 같았다 정말 말이 안 통했다 기분도 몹시  나빴다 

내가 하는 말은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해댔다 심각한 자기 착각 자기 연민에 빠진 완전한 나르시시스트 같았다 세상의 중심에 자신만 존재하는 듯이 받아들인 그 모습 너무 불쾌했다 그리고 억울했다 난 그 마음이 아닌데 오해하고 있었다 좋은 마음이 1도 없이 그냥 싫고 귀찮아서 의무사항으로 생각 없이 보낸 편지를 이렇게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이 역겨웠다 장난을 친 벌을 단단히 받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편지를 보낸 다섯 명 중 가장 의미 없는 미미한 존재라는 사실도 모르고 완전한 자기 착각에 빠져 글을 읽고 자신이 주인공인양 이입되어 홀라당 글에 빠져서 주제를 잊고 현실도 잊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생각해 보면 쓸데없는 지나친 자기 우월감이거나 열등감은 아니었을까 

원치도 않았는데 분위기에 쓸려하고 싶지도 않은 편지를 시키는 대로 써 보낸 당시의 내가 어리석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그렇게 글을 잘 썼나? 당시에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물론 글을 써서 여러 번 상을 받기도 했지만 이런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결과였고 그때 아무 말이나 떠들어대던 그 입을 보면서 뭔가가 꽝하고 머릿속에 와닿았다 

이렇게 말이 안 통하는 사람도 있구나 이 사람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기에 남의 말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걸까 스무 살 인생에 그렇게 가슴이 검은 물로 꽉 차오르는 대화불능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징그러워 그 얼굴을 쳐다보기도 역겨웠다 

그때부터 어쭙잖은 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 아무 의미도 없는 대상에게 누가 시킨다고 별다른 생각 없이 내가 글을 써서 보내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 일을 계기로 전통 같잖은 전통을 내세워 후배들에게 편지를 쓰게 만든 동아리와 동아리 선배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가기도 보기도 싫었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동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더 이상  대부분의 동아리 활동을 접었다 그리고는 기회가 될 때마다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려 책을 읽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들 각각이 드러내는 심리적 상황들을 알아채고 대응을 잘 할 수도 있었는데, 그때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되는대로 경험하고 지냈다 나르시스트 에코이스트 약간의 에코이스트성향을 지닌 자 그리고 집착이 강한 편집적 강박장애자 그리고 그냥 열외의 평범한 보통 사람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나는 나의 독후감에 아무런 대답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과 우연한 기회에 캠퍼스에서 다시 만났다 자신은 당시에 여학생들에게 너무 많은 편지를 받아서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다면서 다 버렸다고 말했다 섭섭했다 나의 소중한 독후감을... 그런데도 이 후 우리는 C.C.가 되었고 지금까지 울퉁불퉁한 인생길을 손을 놓치 않고 한결같은 툴툴거리기도 하고 투닥거리기도 하고 또 때로는 토닥거리며 둘이 손을 꼭 잡고 세월을 보내며 살아가는 중이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편지는 내 것만 고이 간직하다가 몇번의 이사끝에 분실했다고 말했다 거짓인지 참인지 모르겠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 우습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보다는 말을 안 하는 사람이 훨씬 나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어린 나이에 벽창호 같은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말도 글도 함부로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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