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도서선정단 I차 대상 도서 독서 후기 및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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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란 아래야 했다.
책을 손에 들고 첫 장을 펼친 순간부터,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말 그대로 쉼 없이 읽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화장실에 가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소설은 이래야 제맛이지!
이 소설은 두 번째 장에서 이미 독자인 나를 꼼짝 못 하게 묶어놨다.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움직이지 않는 자’ (The unmoved mover)(6쪽).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개념으로, 모든 운동과 변화의 근원이면서 자신은 어떠한 외부에 의해서도 움직임을 ‘당하지 않는’ 최초의 원인(제1원인)이자 제일의 동인인 자(혹은 것).
‘부동의 원동자’라 하여, 이는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 등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개념을 활용하여 모든 원인의 연쇄 끝에는 자신이 원인이면서 원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부동의 원동자’가 존재해야 하며, 그것이 곧 신이라고 주장했었다.
그 개념을 소설가는 그가 창조해 내는 서사의 중심적 기기인 자율주행차인 '슈마허'와 ‘무버(mover), 즉 바퀴 달린 아동용 휠체어처럼 보이지만 실은 교육용 머신’이라는 의자를 등장시켜 그 제1원인을 폭로하고자 한다.
첫 장면에서, 이미 독자인 나의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제 읽어 내려가기만 하면 끝나는 것이다.
“그래 소설은 이런 맛이 있어야지” 생각하면서…
1
이혁진의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을 기술 유토피아의 그림자와 인간 존엄성의 서사 구조로 이해하려는 평단의 시도가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인공지능이 주체가 된 시대, 우리를 구원하는 가장 인간적인 것’이라는 주제 의식을 전면에 내세우며, 고도로 발달한 기술이 인간의 교육과 이동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시대로 묘사된다. 기술의 발전이 가져오는 사회적 영향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윤리적 딜레마가 교차하는 가운데, 등장인물들은 첨예하게 갈등하는 모습을 보인다.
소설의 핵심 갈등 구조는 완전자율주행 자동차 '슈마허'와 관련된 교통사고 및 이 사고를 둘러싼 회사의 서늘한 ‘진실 은폐 시도’로 그려진다. 이 갈등 구조 속에서, 기술 개발자 '재호'와 사고 피해자 '영인'의 대립은 단순한 개인 간의 충돌을 넘어, 기술 권력과 인간 존엄성, 효율성과 윤리의 충돌 지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무버는 잘 팔리는 상품을 넘어 사회현상이 됐고, 인공지능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기준까지 바꿨다. 누군가의 단언처럼 무버에서 혁신적인 건 기술들의 집약과 조화가 아니었다. 인류가 지금껏 받아본 적 없는,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교육이자 보살핌을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에게서 받게 됐다는 것이 놀랍고 전례 없는 혁신인 것이었다.
무버는 인공지능이 주체, 인간이 객체가 된 최초의 상품일 뿐 아니라 최초의 스마트폰처럼 새로운 시대를 연 사회적, 역사적 전환점이었다."(8쪽)
궁극적으로 작가가 이 서사를 통해 탐구하는, ‘인공지능이 주체, 인간이 객체가 된’ 근미래 사회에서 인간이 지켜야 할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집요하게 설명하고자 했다고 읽혔다.
2
소설이 제시하는 근미래 사회는 고도로 자동화된 기술 시스템이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방식을 변화시킨다.
메인 스토리는 두 종류의 기술을 기반으로 전개된다.
첫째는 '슈마허’라는 재호가 개발에 성공한 완전자율주행 자동차다. 인간의 이동 문제를 혁신적으로 해결하며 대중의 찬사와 시장의 폭발적인 기대에 힘입어 판매량이 급증한다. 이 설정은 기술적 진보가 제시하는 장밋빛 유토피아의 표상을 보는 듯하다.
"놀랍다는 말조차 무색한, 어처구니가 없는 변화였고 지금껏 잘못된 인식을, 편견을 갖고 있었다는 생각마저 하게 했다. 도로란 이렇게 흐를 수 있는 것이었다. 아니 이렇게 흘러야 하는 것이었다. 두 눈으로 보고 있으니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모든 차가 일사불란하고 질서 정연하게 달렸다. 도로는 완벽하게 안전했고 빈틈없이 효율적이었다. 여기가 바로 도로의 이상향, 운전자라면 한 번씩은 꿈꿔봤을 그 도로 아닐까?
미친놈처럼 칼치기를 하는 차도 없었다. 얌생이처럼 끼어드는 차도 없었다. 크다고 들이대기부터 하는 차도, 비싸다고 제멋대로인 차도 없었고 정신 줄 놓은 것처럼 차선 변경을 하거나 좌회전하는 차도, 눈이 삔 것처럼 유턴하는 차도, 약이라도 빤 것처럼 일방통행로에서 역주행하는 차도 없었다. 너무나 상식적이고 당연한, 오직 규범과 질서의 권능으로 강물처럼 힘차게 흐르는 도로가 지금 저기에, 모니터의 영상 안에 있었다. 모두 매혹당한 듯 쳐다봤고 감격해 눈물을 터트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69쪽)
둘째는 '무버’라는 아동용 이동 의자이자 교육용 머신이다. 무버는 아이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시스템을 통해 세상의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며, 안전하고 효율적인 교육과 이동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 기술의 확산은 심각한 역설을 초래한다. 아이들은 무버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면서 걸을 수 있는 능력 자체를 포기하고, 결국 걷기 능력을 잃어간다.
이 두 기술의 병치는 기술 발전이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 동시에, 인간의 기본적인 능력과 자율 능력을 저하시키는 이중적 난제를 초래할 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3
서사는 폭설이 쏟아지는 겨울, 영인이 도로에서 사고를 당하는 사건을 기점으로 급격히 전환된다. 영인은 멀리서 뛰쳐오는 어린 여자아이와 부딪혀 도로 위로 굴러 떨어지고, 마주 오던 완전자율주행 자동차 슈마허에 치이고 만다. 이 사고는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 슈마허의 알고리즘이 피할 수 없는 딜레마 상황, 즉 이른바 '트롤리 딜레마' 상황에 놓였음을 암시한다. 슈마허는 어린아이와 영인 중 누구의 피해를 최소화할 것인지 알고리즘적으로 판단해야 했으며, 이 판단 과정이 이후 회사가 은폐하려는 '서늘한 진실'의 핵심이 된다.
"슈마허가 먼저 감지한 건 막 몸을 일으키던 아이였다. 슈마허는 즉시 긴급 브레이크를 작동시켰다. 하지만 미끄러운 눈길에 타이어도 일반이었다. 차량이 속수무책 미끄러지자 슈마허는 경적을 울리며 라이트를 빠르게 깜빡였다. 하지만 그게 아이를 더 놀라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이는 꼼짝도 못 했다. 경적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세우던 영인이 그 모습에 비명을 질렀다. 슈마허의 앞바퀴가 갑자기 반대 방향으로 급격히 꺾였다. 뒷바퀴가 맹렬히 돌아가며 눈발을 내뿜었다. 미끄러지던 차체가 아이를 간신히 비껴갔다. 하지만 멈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전 기동의 힘까지 실어 영인을 향했다. 영인이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은 커다란 아가리처럼 자신을 덮치던 차체의 그릴이었다." (83-84쪽)
자율주행 알고리즘의 선택이었다. 아이가 아닌 영인의 값어치 계산이 더 낮게 나온 결과값에 기인한 거였다.
노인이었다는 것. 상대는 아이였다는 것. 아이보다는 노인의 값이 더 낮았다는 것.
그러니 알고리즘은 당연히 영인을 선택한 것이었다.
4
회사가 필사적으로 은폐하려는 '서늘한 진실'은 슈마허의 알고리즘 작동 방식에 대한 투명성 문제였다. 이 진실은 슈마허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프로그래밍된 기준에 따라 인간의 생명을 취사선택했다는 점을 내포한다. 즉, 알고리즘이 기술적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간의 도덕적 판단 영역을 침범했음을 의미한다.
소설은 슈마허가 ‘기계일 뿐이고, 때문에 어떠한 윤리적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고 명시한다. 그러나 이 중립적인 기계의 작동 방식을 설계하고, 그 결과를 윤리적 딜레마로 인식하고, 나아가 이를 은폐하려는 행위는 온전히 인간들의 책임으로 돌아온다. 기업은 슈마허의 시장 기대치와 회사의 존폐를 방어 논리로 내세우며 은폐를 시도하며, 이는 공익적 기술 발전보다 사익적 이윤 추구를 우선하는 자본주의의 윤리적 우선순위를 극명하게 드러내며 작가는 또 하나의 현대사회 문제점을 직면하게 한다.
그 자본과 조직적 은폐 움직임에 인간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질문을 한다.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그러나 미약하게만 보이는 질문을 영인은 웅변처럼 작중에서 말한다.
"매튜 씨, 나는 봐야겠어요. 그래야 하는 게 있다는 걸, 원래, 누가 뭐라든 세상이 어떻고 세월이 어떻든 아무 상관없이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게 있다는 걸요. 우리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걸 허무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게 하나라도, 단 하나라도 있다는 걸요. 그게 내가 생각하는 정의라는 말의 뜻입니다. 원래 그래야 하는 것, 누구도 아니라고 할 수 없이 당연히 지켜야 하고 그래서 적어도 내 가장 소중한 단 하나만큼은 허무한 게 되지 않게 해주는 것. 내 전 재산을 다 갈아 넣어서라도, 이 종이 쪼가리에 적힌 사람들이 모두 피 흘려 쓰러지더라도 이제는 봐야겠어요." (123쪽)
묘하게도, 이 문장을 읽고 있던 내 마음은 착잡했다. 너무나도 당연한 주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공허하고 어쩌면 메아리 없는 무모한 외침과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연히 진실이 밝혀지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후의 문장을 서둘러 더듬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흡인력이란 이런 것일 게다. 그래야지 소설이라면.
5
결국에는 사람이었다.
인류애, 부모애 등 그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모든 걸 해결하는 동인이자 해결책이었다.
서두에 작가는 ‘부동의 원동자’를 도입했었다.
본인은 움직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그 누구. 다른 의미로는 나는 부모로부터 태어났고, 나의 부모는 또 그 부모로부터 태어났는데, 그렇게 무한히 앞으로 가다 보면 결국에는 본인은 누구에게서도 태어나지 않는 첫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 즉 제일자.
그 부동의 원동자는…
작가는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웅변하는 것으로 읽혔다.
6
이혁진의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은 기술적 발전이 만연한 근미래 사회에서 인간이 지켜야 할 궁극적인 가치에 대한 질문으로 수렴된다. 제목이 지칭하는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 가치는 기계의 안정성이나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오히려 고통을 마주하고 견디는 용기,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타협할 수 없는 사랑과 양심을 의미한다.
작품 속에서 고통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고통을 알죠. 사람만이 고통에도 의미를 주니까요. 그 고통엔 의미가 있어 더욱 고통스러우니까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고통을 견디는 것도 의미가 있는 거예요”(164쪽)
이 구절은 영인의 투쟁이 단순한 복수나 감정적 폭발을 넘어, 인간적 의미와 주체성을 부여받고자 하는 행위임을 보여준다.
소설은 ‘인공지능이 주체, 인간이 객체가 된 사회 구조'를 제시하지만, 결국 인간이 자신의 '주체성'(존엄)을 회복하는 길을 스스로 모색해 나간다. 영인의 맹렬한 분노와 재호의 양심적 고뇌는 객체로 전락하려는 인간의 상태에 대한 저항 그것인 것이다.
이러한 저항의 핵심은 '용기'와 '행동'이다. "할 수 있는 건 해야 해"라는 언급은 개인의 능력(걷기, 기술 개발, 진실 추구)이 단순히 주어진 조건이 아니라 윤리적 의무와 직결됨을 보여준다. 즉, 윤리적 투쟁은 기술이 제공하는 편리함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양심에 따라 행동할 용기를 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는 재호와 영인 모두에게 필요한, 그리고 독자들에게 촉구하는 주제적 결론이다. 인간의 윤리적 의지와 책임감은 기술 시대에 개인이 주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생존 무기라는 저자의 웅변적 호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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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었던 이희주의 <나의 천사>와,
장르는 같으나 전혀 다른 서사를 구현해 내는 이혁진의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은 훨씬 입체적이다.
서사의 전개 또한 다면적이다. 저자가 하고자 하는 얘기 또한 다성적이다. 하나의 서사에 의미가 복수로 묻어있다.
독자에게 생각거리를 부여하고,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중단편이라는 한계는 분명히 안고 있으나, 그래서였을까 소설은 근미래 기술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 능력, 그리고 윤리적 책임감을 어떻게 시험하는지를 밀도 있게 보여준다. 기술 발전의 기대와 환희 속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고찰’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기술 발전의 어두운 그림자를 독자에게 성찰하게 한다. 책을 읽어가면서 ‘슈마허’가 우리 시대의 테슬라를 떠오르게 했던 건, 안 비밀.
시민들이나 청소년들에게 매우 중요한 주제 의식을 일깨우기에 적절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깊다.
추천 목록에 넣어야 할 듯하다.
[참고]
◻︎ 선정을 위한 (임시) 도서평가점수 = 93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