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사 및 삼국사까지도 천문현상에 관해서는 접할 수 있는 사료가 많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천문현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비록 천문현상에 관한 기록이 없을지라도 지금은 당시의 실제 있었던 현상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시뮬레이션을 통해 알아낸 천문 현상과 같은 시기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결부시켜 보는 작업도 가능하다.
부족한 사료, 미지의 공간을 채우는 작업으로의 역사천문학. 이 작업에 대하여 정통 역사학계보다는 유사 역사가들이 더 관심을 가졌던 듯하다. 그들은 이것을 왜 하는 것이고, 얻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서울대학교 교수였다가 지금은 고등과학원에 재직 중인 박창범 박사는 그의 대표적 논문인 삼국사기 일식기록의 과학적 검증과 함께 단기고사, 단군세기에 기록된 흘달 단군 50년에 있는 오성취루(五星聚婁)에 대한 내용이 기원전 1734년에 있었던 오성결집이란 주장을 하였다. 이것은 후속 연구 따윈 개나 줘버렸음에도 무려 20년 넘게 유사 역사가들의 주장의 '객관적', '과학적' 증명의 기반이 되었다. 의도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후 그에게는 숱한 강연과 명성, 그리고 책 출판이라는 리워드로 돌아왔고, 역사학자들이 자정하기 위해 분투하는 이 순간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다.
단군세기의 연대, 우선 단기의 기원이 B.C. 2333년이 맞느냐부터 논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환단고기를 추앙하는 이들은 꽤나 '근본주의적'이기 때문이다. 오성취루가 있던 흘달50년 무진년을 B.C.1733년으로 '추정'하던 연대 계산은 마침 불과 1년 차이인 B.C. 1734년에 실제로 오성을 한 번에 볼 수 있었음이 확인되면서 반박 불가가 되어 버렸다.
B.C. 1734년 오성취루의 근거가 되는 장면
권위에 의한 호소는 한 번 더 부스터가 되었다. 무려 한국천문연구원장을 지낸 박석재 대한사랑 이사장이 인증을 해 준 것이다.
아니, 무려 한국 천문연구원장을 지낸 천문학 박사가 맞다고 하는데 여기에 반박을 하는 사람은 그럼 박창범, 박석재, 아니면 조경철 박사급의 천문학자란 말인가.
그렇게 '권위자'인 박석재 이사장은 관련된 서적을 여럿 집필하였다. 일반인을 향한 그분의 필력은 상당하다. 읽기 쉬우면서도 본인의 학식과 분야에 대하여 넘사벽의 권위를 잃지 않는 그 필력은 진심으로 존경한다. 이렇게 권위자들에 의해 그들의 사상(思想)이 현상(現象)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위 그림과 같이 B.C 1734년 오성이 모인 것은 정확히 맞다.그러나 이미 사람들이 지적한 것처럼 오성이 모인 곳은 천구상의 루(婁) 별자리와는 동떨어져 있다. 다섯 행성은 가장 동쪽에 헌원 별자리부터 태미우원까지 걸쳐 있고 그래서 어떤 분은 헌원 별자리 아래에 위치한 류(柳)를 루(婁)로 잘못 쓴 것 아니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사실상 아킬레스 건임에도 아직까지 아무도 설명을 못하고 있다.
그러나 맞지 않는 옷에 팔을 잘라 맞추는 경우가 허다한 유사역사가들에게는 1년의 시간 차이나 오성의 뒷배경에 있는 별자리가 다르다는 오류는 '그 당시에는 확실히 정해진 게 아니었다'는 식으로 퉁쳐서 반박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오성의 모이는 별자리가 헌원 근처라는 것이다.
'황제 헌원 별자리. 고대에 그곳에 오성이 모였다' 이런 제목을 환구시보에서 볼일은 없겠지...
필자는 우선 취(聚)라는 개념이 정확하게 조상님들이 어떤 현상을 보았을 때 사용하였는가가 궁금하였다. 과거 역사서나 문헌에 오성취에 대한 언급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아래 두 가지이다.
한서 고제기 : 오성취어동정(五星聚於東井) - 오성이 동정(井) 수에 모였다.
동몽선습 : 송태조입국지초 오성취규(宋太祖立國之初 五星聚奎)
- 송 태조가 나라를 세웠을 때 오성이 규 수에 모였다.
아래 그림은 이를 뒷받침하는 실제 오성이 모인 모습이다.
한서 고제기 : 오성취어동정(五星聚於東井)
동몽선습 : 송태조입국지초 오성취규(宋太祖立國之初 五星聚奎)
과연 잘 알려진 기록을 뒷받침하면서 일렬로 배열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서 고제기의 경우 행성들의 가장 동쪽에 정(井) 수가 있는 것이 확인되나, 실제 행성들은 오히려 귀(鬼)수 근처에 있어 보여 차라리 오성취귀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동몽선습의 경우 행성들의 가장 가운데 규(奎) 수가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화성은 벽(壁)수, 수성은 루(婁)까지 걸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러 분야(分野)에 걸쳐 있는 상태로 저렇게 일렬로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았다면 내가 일관이라면 어떻게 써야 할까.
아무래도 내가 일관이라면 관측한 사실을 보고할 때 근처에 밝은 별 또는 좀 더 유명한 별자리를 언급하지 않을까 싶다. 또한 '귀'수 별자리 같은 불길한 별자리보다는 남방 주작의 첫 번째 별자리인 '정'수 별자리로 기록할 것 같다. 예컨대 별똥별이 외뿔소자리를 지나갔어도 '외뿔소자리'가 아니라 '오리온자리 근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동몽선습이라는 책은 이제 막 천자문을 마친 어린 아이들이 읽는 유학 입문서, 지금의 초등학교 도덕책이다. 즉, 일제 강점기 전까지 태어났던 모든 아이들은 '송태조입국지초 오성취규'를 달달 외웠던 사람들이란 말이다.
그 아이들 중 하나였을 계연수란 분이 쓴 '오성취루'.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오성취루에서 '루'라는 글자에 대해 김윤명 박사라는 분이 오성취루에 대하여 새롭게 해석한 주장이 있었다. 사실 이 주장을 처음 본 것은 몇 주 전인데 정말 오랜만에 국립중앙도서관에 갔을 때 4층 자료실에서 본 대한사랑에서 출판한 책에 나와 있다.
주장인즉슨 오성이 루(婁) 별자리에 모였다면 정확히는 오성취어(於)루라고 해야 하니 꼭 별자리 이름이라고 볼 수는 없고, 다르게도 해석할 수 있는데 바로 오성이 '루' 모양으로 모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루라는 한자의 중의적 의미로 성기다, 드문드문하다 가 있는데 행성들이 간격을 가지고 벌려져 있는 모양이 루 모양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루라는 표현은 루(婁)라는 별자리에 오성이 모인 게 아니라 그림처럼 오행성이 간격을 가지고 드문드문 모인 모양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성취루 현상은 BC1734년의 결집을 이야기하는 것에 문제가 없으니 별자리 위치가 잘못되었다는 위서론자들은 모두 입을 다물라는 주장이시다.
세계환단학회라는 학회 동영상을 보면 이 내용을 이야기하시면서 유레카를 외치던 아르키메데스처럼 신나 하셔서 자못 당황스러웠다. 박석재 이사장도 이 주장에 박수를 치면서 특히 2022년 6월에 오성이 루(婁)가 있는 양자리 근처에 모이는데 이것은 올해 안에 식민사관에 젖은 위서론자들을 끝장내라는 하늘의 계시라고 한다.
무섭지만 반박해 보자면, 그렇다면 오성이 취합한 역사 기록의 다른 사례들도 똑같이 적용하여 해석할 수 있냐는 것이다. 적합하지 않은 반증 사례가 나온다면 가설의 신빙성을 의심해야 하는 것은 과학자 출신인 두 박사님도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첫째로, 오성이 루 모양으로 모였다고 하려면 五星聚如婁形 이런 식으로 써야 되지 않을까. 어조사 어(於) 자가 없으니 무조건 루 별자리에 모였다고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면 같을 여(如) 자가 없으니, 무조건 루 모양으로 모였다고 하는 것도 궤변이다. 실재로 이런 근거가 있다. 17세기 들어 소빙하기에 접어들면서 태양의 이상 활동을 감지할 수 있는 오로라 관측 기록이 실록에 등장하는데, '마치 불과 같은 기운 (有氣如火光)'이라는 식으로 형태를 표현하고 있다.
둘째로, 송나라 건국 시기의 '오성취규'는 마찬가지로 '규'별자리가 아니라 '규' 모양으로 모였다고 해야 할까.
967년 오성취규(奎)
위 그림은 967년 송나라 건국 시기에 오성이 규(奎) 별자리 근처에 '드문드문' 모인 모습이다. 이것을 다른 책도 아니고,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생 도덕교과서인 '동몽선습'에 '송태조입국지초 오성취규(宋太祖立國之初 五星聚奎)' 라고 나와 있다. 같은 논리라면 저 그림의 오성은 '규(奎)' 모양으로 모인 것인가?
출처 : 네이버 한자사전
별 규 자의 중의적 의미는 가랑이를 벌리고 걷는 모양인 가 보다. 그럼 어떻게 해야 가랑이를 벌리고 걷는 모양일까.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될지...
자기 주장을 억지로라도 관철시키기 위해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게 있으면 이것을 침소봉대하는 것인데 너무 앞만 보고 돌진하는 논리라서 이렇게 반증 사례가 있는 것이다. 과학자 출신인 분이 모르지도 않으실 텐데 말이다.
오성취루가 '루 모양'이라고 주장한다면 오성취규도 똑같이 '규 모양'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기타 다른 오성 개합 사례에 똑같이 어조사가 없다면 동일하게 주장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고 그때그때 다르다면 궤변에 불과할 뿐이다.
이렇게 오성이 루(婁) 별자리에 모였다고 기록된 바람에 실제로 이때 있었던 오성취합 현상은 루 별자리 근처에도 있지 않았고 이것은 오성취루를 가지고 단군세기 및 단기고사가 진서임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180년 전인 기원전 1953년 오성이 취합하는 현상은 한 번 더 있었다. 기원전 1953년 2월부터 3월까지 이 행성은 가장 가까이 모였을 때 동서 끝에 있는 목성과 토성의 거리가 불과 4도 38분 정도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하늘의 한 곳에 매우 가까이 모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원전 1953년 오성이 최소 거리로 밀집되었을 때 모습
이게 얼마나 좁은 거리에 모여있는 거냐면 위의 그림처럼 10배율의 쌍안경으로 보아도 한 시야에 5개 행성이 모두 보일 정도이다. 전천 하늘을 맨 눈으로 보게 되면 동쪽에 해가 뜨기 직전에 5개의 별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을 것이다. 기간도 2월 말의 겨울이었기 때문에 동이 트기 전 오랜 시간 동안 볼 수 있었다.
오성이 결집을 10x50 쌍안경으로 보았을 때 모습
중요한 것은 이 날 오행성이 결집했을 때 어느 별자리 근처에 있었냐는 것이다. 넓은 시야에서 오행성 부근의 별자리들을 보도록 하자.
오성이 최소로 모인 기원전 1953년 2월 24일의 모습
현재 보는 방향이 동쪽이기 때문에 적경선이 기울어져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오성의 위치는 대략 위수와 실수 별자리 사이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보이는 실, 벽의 두 선분을 마저 이으면 페가수스자리가 된다. 그런데 벽 수 왼쪽에 규수가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시간을 더 돌리면 별자리들이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어 아래와 같이 된다.
기원전 1953년 3월 17일의 동쪽 하늘 모습
3월 17일 정도가 되면 5개의 행성이 한 곳에 모이지는 않았지만 오성취루처럼 한 줄로 늘어선 모양도 '취합'으로 인정한다면 아직까지 취합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심지어 태양이 위치한 곳에 드디어 '루(婁)' 별자리가 등장한다. 기원전 1734년과는 다르게 기원전 1953년 오성취합은 그래도 루 별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것이다. 억지로 우긴다면 오성취루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실 이것은 지난 2013년 박석재 이사장의 칼럼에도 이미 나와 있다. 2013년 사이언스 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에서 그는 본인의 자랑스러운 후배(박창범, 라대일 박사)들이 오성취루를 발견하였고, 기원전 1953년 2월에도 오성취루와 비슷한 현상이 발생한 것을 발견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이 현상 역시 어딘가에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니 우리 모두 찾아봐야 하겠다고 말한다. 읽다 보면 현대 인류 최초로 고대의 비밀을 푼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 사례는 이미 2013년 기준으로 그보다 20년 전 먼저 돌려본 사람들이 있었다. NASA의 1993년 옛 기사에서 Jet Propulsion Laboratory 연구소의 케빈 팡과 미해군연구소의 존 뱅거트가 기원전 1953년 3월 5일 기준으로 새벽에 태양과 달(삭, New moon), 오행성이 모여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들은 이것이 옛 고전의 내용과 일치하는 현상이라고 보는데 그 고전은 전한 말기 유향이 쓴 '홍범전'에서
'고대 전욱력(기원전 2000년 대 추정)은 봄이 시작하는 새벽에 태양과 달(New moon), 그리고 오행성이 영실(營室) 별자리에 모였을 때 시작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고, 기원전 1953년 태양, 달, 오성의 위치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영실은 실(室)수 별자리의 다른 이름으로 페가수스자리의 사각형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1280년까지 천문학자들이 규명해보고자 했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도 시도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어느 시대이던 천문학자들이 당시 개발한 가장 우수한 역법으로 오성의 옛 위치를 추보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첨언하자면 유향이 쓴 것은 '홍범전'이 아니라 '상서홍범오행전론'이다
이 기사는 박석재 이사장이 칼럼을 쓰던 2013년보다 20년 전인 1993년에 쓰인 기사이다. 무엇인가 주장을 하기 전에 우물 밖을 한 번쯤 살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