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실록을 유사역사학의 노리개로 삼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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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조 29년 10월 1일 - 1753. 10. 26.
일식이 있다.
朔壬午/日食
실록에는 이렇게 일식이라는 단어 한 개만 있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상참과 경연도 중지되고, 재계 때문에 각종 업무가 모두 미뤄지는 것도 볼 수 있다. 이 날 일식의 그림자는 아래와 같았다
해당 일식은 유럽전역과 서아시아 쪽을 지나간 일식이다. 이 때도 1740년 일식과 마찬가지로 영조는 재계를 하고 모든 업무를 중지했지만 구식제는 하지 않았다. 여기서 한 가지. 이 시기 청나라와 조선이 주고받은 외교문서인 '동문휘고'를 보자. 동문휘고의 일월식에 관한 자문은 '18세기 중반 조선 일월식 계산의 새로운 기준으로서 청나라 일월식 자문'(김슬기, 한국과학사학회지)이라는 논문에 잘 정리되어 있다.
'강희 60년(경종 1, 1721) 윤 6월 일식을 알리는 청나라의 일식 자문이 조선에 전달된 이래로 19세기말까지 조선과 청나라의 천문학자들은 양국의 일월식 정보를 주고받았다.(중략) 강희 60년부터는 조선에도 자문을 보내 일월식을 예측하고 그에 대한 조선 국왕의 구식례를 요구한 것이다 (중략) 영조 17년부터 후원한 관상감의 일월식 계산법 학습 프로젝트는 영조 30-31년 청나라의 자문과 완전히 동일한 일월식 계산값을 산출하게 됨으로써 결실을 맺었다.'
- 김슬기, '18세기 중반 조선 일월식 계산의 새로운 기준으로서 청나라 일월식 자문'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일식이 발생할 때 청나라에서 먼저 자문을 보내와 어느 날 몇 시에 일식이 있을 것이니 구식례를 요구하였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청나라의 통보된 일월식 시각이
자체적으로 계산한 값과 오차가 있어 이를 맞추기 위해 영조가 부지런히 노력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조 25년인 1749년에는 월식에 대한 청나라의 자문이 오히려 틀렸다고 지적하여 흠천각의 관리들을 경악케 하기도 했다.
이 동문휘고는 동북아역사넷에서 누구든지 조회 가능하다.
http://contents.nahf.or.kr/id/NAHF.dh
정확히는 동문휘고 원편 43, 44권이 일월식 자문을 모아놓았지만 1753년에는 그 어디에도 일식이 있을 것이란 자문이 없다. 지난 게시글에 있던 1734년의 일식도 또한 자문이 없다. 이것은 청나라에서 조선에 일식이 없을 것임을 알고 구식례를 요구하지 않은 것이고 조선에서는 이것이 '지하일식'이라는 것을 자체적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구식례는 준비하지 않지만 일식이므로 기본적인 왕의 재계 절차를 밟은 것이다.
실록의 '일식' 한 글자로 일식을 볼 수 있던 곳에 있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승정원일기도 보고 동문휘고도 보고 했으면 좋겠다. 주장과 선동은 간단하지만, 해명은 이렇게 힘들기 때문이다.
2. 순조 13년 1월 1일 - 1813. 2. 1.
일식이 있었다. 【유정(酉正) 초각(初刻)부터 삼각(三刻)까지였다. 처음에 서북쪽이 이지러지기 시작하여 정북 쪽이 심하게 일식 하였다가 동북쪽에서 다시 둥그레졌는데, 일식은 지하(地下)에 있었다.】
己巳朔/日有食之。 【自酉正初刻至三刻。 初虧西北食甚正北, 復圓東北食在地下。】
순조실록은 위와 같이 일식의 시각과 시작, 중간, 끝을 말하는 초휴, 식심, 복원까지 서술하는데 유정은 오후 6 시인 저녁이므로 해가 져서 지하에 있었던 것까지 예측하였다. 일식을 볼 수 없으므로 청나라에서 온 일식 자문도 없다. 따라서 관상감에서 자체적으로 예측한 것이다. 관상감의 예측이 얼마나 정확해지는지 확인해 보자.
그림의 위쪽에 있는 가로선이 지평선이다. 일식은 지평선 아래에서 발생하고 있다. 일식은 서북쪽에서 이지러져서 정북 쪽에서 심하였다가 동북쪽으로 빠져나간다.
화면의 오른쪽 아래가 서북쪽이다. 달은 계속해서 동쪽으로 진행하여 태양의 오른쪽 위로 빠져나가는데 이 쪽이 동북쪽이다. 일식이 일어난 시각과 일어나는 모양까지 정확하게 예측하였다. 여기서 시각은 오후 7시부터 시작인데 이것은 동경표준시각이므로 당시 조선에서 사용하던 표준시각은 언제였는지 유추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3. 헌종 2년 4월 1일 - 1836. 5. 15.
일식이 있었다.
癸丑/日有食之。
이 날 일식은 중국과 한반도와 같은 동아시아를 제외하고 아메리카 유럽 쪽을 지나간 일식이다. 이 날 일식이 있다고 서술했고 일식이 있었던 것도 맞는데, 승정원일기에는 일식과 관련된 아무 말도 없이 정상적인 일과만 진행하는 것을 볼 수 있고, 햇무리가 있었다는 말은 있다.
하다못해 지하 일식에 따르는 재계 절차조차 없다. 동문휘고의 일식 단자 같은 것도 당연히 없다. 일식이 있는 날 기록이라고 믿을 수가 없는데, 날짜상으로 추보해 보니 일식이 있던 날이라는 코멘트만 있는 것이다.
4. 헌종 5년 2월 1일 - 1839. 3. 15.
지하에서 일식 하였다.
丁卯/日有食之, 食在地下。
5. 헌종 11년 4월 1일 - 1845. 5. 6.
해에 일식이 있었는데, 일식은 지하(地下)에 있었다.
辛卯/日有食之, 食在地下。
6. 철종 2년 7월 1일 - 1851. 7. 28.
일식(日蝕)하였다.
乙酉/日有食之。
이 날 일식 역시 아메리카와 유럽을 지나는 일식이었다. 승정원일기를 보자.
일식 기록이 있는데, 뭘까? 날씨는 비가 내렸고 동틀 때부터 미시(오후 1-3시)까지 비가 와서 측우기로 측정하였다고 한다. 비가 왔는데 일식이 있었다는 말은 일식이 있었다는 것이 단순히 추보이며 관측에 의한 기록이 아니란 뜻이다.
7. 철종 4년 11월 1일 - 1853. 11. 30.
일식(日食)하였다.
壬寅/日有食之。
이 날 일식은 태평양과 남아메리카를 지나는 일식으로 관측이 불가능했지만 승정원일기에도 똑같이 적혀 있다. 날씨도 맑다. 그러나 일식이 있었다는 정확한 시각은 없는데 미시에 태백성이 보였다는 말은 있다. 그리고 이날 온갖 관직 제수 등의 업무를 보더니 제일 마지막에는 경모궁(사도세자를 제사 지내던 곳) 망묘루에서 지낸 삭봉심(왕릉을 살피는 일)을 무사히 마쳤다는 보고를 받는다.
일식과는 무관한 일과를 보낸 것이다. 헌종, 철종 시기인 19세기 중반쯤부터는 일식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진 것으로 보일 때가 많다.
8. 고종 2년 9월 1일 - 1865. 10. 19.
일식(日食)이 있었다.
初一日。 癸亥。 日食。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일부를 지나간 일식이다. 승정원일기에는 일식 언급 자체가 없다. 고종은 이 날 아주 바쁜 나날을 보이는데 심지어 진시, 즉 아침에는 창덕궁 관물헌에서 신하들과 권강을 진행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이제 일식 기록은 관측 유무와는 거의 상관이 없는 시대라고 봐야 할 것이다.
9. 고종 4년 2월 1일 - 1867. 3. 6.
일식(日食)이 있었다.
初一日, 乙酉。 日食。
승정원일기에도 일식이 있었다는 언급이 있으나 일식과 관련된 어떠한 액션도 없다.
11. 고종 13년 3월 1일 - 1876. 3. 25.
일식이 있었다. 日食
알래스카와 북아메리카를 지난 일식이다. 승정원일기에는 어떠한 언급도 없는 무관한 하루를 보내며, 비가 내려 측우기를 재보니 1치 5푼(4.5cm)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12. 고종 16년 1월 1일 - 1879. 1. 22.
실록과 승정원일기 모두 일식이 있었다는 말은 있으나 무관한 하루를 보낸다. 고종 때는 과연 일식이 생기면 이렇게 무관한 하루를 보낸 걸까?
고종 6년 6월 30일 기사이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병학(金炳學)이 아뢰기를, "태사(太史)가 맹추월(孟秋月) 초하루에 일식(日食)이 있다고 아뢰니 전하께서 친히 구식 행사를 거행하겠다고 명하신 것입니다.
전하께서 하늘의 경계를 조심스럽게 대하면서 두려워하고 반성하시니 송축하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하늘에 응하는 도리는 오직 진심으로 진실한 정사를 실행하는 데 있습니다. 이른바 하늘의 신의를 체득하고 그 의사에 순종하여야 하늘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실제적인 대책으로 응답하지 않고 사례의 말단적인 것에 얽매이면 한갓 일시적인 형식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결연히 반성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내용이 절실하니 의당 마음에 새기겠다."'
- 고종실록 고종 6년(1869) 6월 30일
맹추월 초하루는 이 날 다음날인 음력 7월 1일을 말하는데 실제로 한반도에서 일식 관측이 가능했다. 그런데 구식제를 하겠다는 고종을 영의정이 허례허식이라며 마리는 장면인 것이다. 사실 이 기사가 있기 보름 전에 월식이 있어 고종이 구식제를 하려 했는데 이 때도 신하들이 명을 거둬 달라고 한다.
19세기말 고종 때 신하들은 더 이상 성리학적 명분론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백 년만 일찍 이렇게 바꿨더라면 조선 역사가 달라졌을 텐데.. 고종 때에는 일식을 볼 수 있었든 없었든 이제 더 이상 일월식에 국가의 정력을 쏟지 않았다. 그리고 고종 때 정도인 19-20세기는 일식의 추보 능력도 정교해져서 현대처럼 지구 어디에서 일어나든 상관없는 천문뉴스 정도로 보는 것이다.
13. 고종 22년 2월 1일 - 1885.3. 16.
동일하다. 실록에만 일식이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 승정원일기에는 일식과 무관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14. 고종 25년 12월 1일 - 1889. 1. 1.
동일하다. 실록에만 일식이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 승정원일기에는 일식과 무관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15. 고종 26년 12월 1일 - 1889. 12. 22.
동일하다. 승정원일기에는 어떤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16. 고종 28년 5월 1일 - 1891. 6. 6.
실록에는 일식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승정원일기는 역시 기록이 없고, 승정원일기가 얼마나 자세히 썼냐면 자시 즉, 자정에는 삭제를 오시에는 주다례를 치렀는데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마치 생중계하다시피 적어 놓았다. 그러나 일식과 관련된 그 어떤 언급도 없다.
21. 1905. 8. 30.
실록에 일식 기록은 있으나 승정원일기에는 무관한 일과를 보내고 있다.
지금까지 조선왕조실록에 일식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일식을 관측할 수 없었던 일식 기록들을 구체적으로 파고들어 보았다. 결론은 조선왕조실록의 일식 기록은 단지 예측한 보고 사실만으로도 일식이 있었다고 기록하였고, 비록 일식이 보이지 않아도 일식이 땅 밑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임금이 재계 절차를 밟기도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 어떤 기록에도 구식의 예를 준비했다는 내용은 없었다.
천인감응론에 빠졌던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일식을 구(救)하는 행사는 임금이 치러야 할 매우 중요한 행사인데 단 한 건도 해당하는 사실이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예측에 의한 기록일 뿐 관측을 해서 기록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기록들과 연관된 일식의 그림자가 지나간 지구의 어느 곳도 조선의 영토라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이제 더는 조선왕조실록이 유사역사학에서 주장하는 대륙조선설, 아메리카조선설의 노리개로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아 긴 시리즈로 검증을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