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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전문가윤담헌 Dec 27. 2023

회남자, 너의 이름은

혜성이 가로지르는 장성경천의 하늘

 2016년에 개봉한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에서 우리는 하늘에 길게 꼬리를 수놓으며 지나가는 혜성의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었다.

'너의 이름은'의 한 장면

 옛 역사서에도 이렇게 가끔씩 지구 근처까지 날아와 지나가면서 하늘을 뒤덮는 혜성의 모습을 기록한 경우가 있는데, 긴 별이 하늘을 뒤덮었다는 뜻으로 '장성경천(長星竟天)' 또는 '장경천(長竟天)'이라고 쓰여 있다. 우리도 살면서 이렇게 혜성이 하늘을 수놓는 장성경천의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최근에 가장 크게 보였던 혜성으로는 1995년에 등장한 햐쿠타케 혜성이 있는데, 그것도 가장 길게 보였을 때는 꼬리의 각거리가 20도 정도였다. 아래 사진을 보면 햐쿠타케 혜성이 지구에 근접했을 때 북두칠성의 국자 손잡이 부분을 지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앞으로 혜성이라는 것이 언제든 등장할 수 있는 것이기에, 20도가 아닌 180도로 온 하늘을 뒤덮는 혜성의 모습을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다.

햐쿠타케 혜성 (故 박승철 님 블로그)

 사실 '너의 이름은' 뿐만 아니라 '딥임팩트'나 '돈룩업'처럼 혜성의 모습이 온 하늘을 뒤덮을 정도라면 지구와 충돌할 가능성도 있는 상당히 가까운 거리를 근접하는 일이기 때문에, 역사서에 가끔씩 나오는 '장경천'의 기록 중엔 어쩌면 인류 최대의 위기의 순간을 적은 기록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충돌이 되고 안되고를 떠나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날아가는 혜성의 모습은 전 시대 모든 인류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영화 '돈룩업'의 한 장면

 이러한 '장경천'의 기록이 존재하는 대표적인 군주가 있다. 그 군주는 바로 현재까지도 중국어를 '한어', 중국 글자는 '한자'라고 부를 정도로 '한(漢)'이라는 국호를 사방에 떨쳐낸 강력한 통치자, 과연 명군인지, 폭군인지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의견이 분분한 한나라의 5대 황제인 한 무제 유철이다.

한 무제 유철

 그가 23세가 되던 기원전 135년 어느 날 저녁 한 커다란 혜성이 서쪽을 향해 지나가게 된다. 하늘을 보던 일관들은 크게 당혹하였고, 궁궐 안에서는 큰 난리가 났을 것이다. 한서와 자치통감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패성이 동방에서 나와 하늘을 길게 가로질렀다. (孛星出於東方, 長竟天)'


 그리고 어쩌면 이 기록은 앞으로 이야기할 비극의 서막일 지도 모른다.


한무제 유철의 콤플렉스 - 정통성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은 한무제는 진시황과 다를 바 없는 폭군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도 동의한다. 그는 할아버지(문제)와 아버지(경제)가 가득히 쌓아놓은 곳간을 일생에 걸쳐 바닥냈고, 사방의 오랑캐를 정벌한답시고 무리하게 병사를 일으켜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으며, 급암 같은 사부이자 직언을 하는 충신을 멀리하고 장탕과 같은 간신을 중용하였고, 신선을 만나보겠다고 사기나 당하면서 해마다 봉선 의식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쓸데없이 국력을 소모한 인간이다. 그것을 죽을 때가 되어서야 미련했다 뉘우치고 다시 되돌려놓으려 했던 철부지였다. 사마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무제 이후 한나라가 멸망하지 않아 진시황과는 다르다고 했지만 솔직히 그의 뒤를 이은 소제, 선제 등 후대 황제들이 그의 과오를 현명하게 수습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좋은 예를 따라가지 않고 왜 그토록 전쟁을 중요시하며, 자신의 눈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신하들을 멸족시켰던 것인지 그 이유를 찾지 않을 수 없다. 결과부터 말한다면, 유철은 자기가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 겪은 어른들의 싸움 그리고 원래 내 것이 아니었던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던 신하들과 지엄한 할머니(효문황후 두태후)에게 본인이 허수아비가 아닌 얼마나 뛰어난 군주인지 증명하겠다는 콤플렉스에 끊임없이 시달렸다고 볼 수 있다. 원래 경제의 뒤를 이을 태자는 율희라는 비가 낳은 이복형 유영이었고 유철은 열 번째 아들로 교동왕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인 율희의 거만함으로 인해 경제의 눈 밖에 난 태자는 폐위되고 얼마 후 작은 죄로 인해 자살하게 된다. 경제의 어머니인 두태후는 경제의 동생이었던 양왕 유무를 태제에 올리려 하였지만 충신 원앙의 반대로 끝내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태자의 자리는 유철에게 돌아간다.

 유철이 태자가 되고 황제에 오르게 된 사연은 아버지인 경제, 할아버지인 문제와는 크게 차이가 있다. 문제 같은 경우는 대나라 왕으로 처지가 비슷했지만, 전횡을 일삼은 여태후 일가를 몰아낸 황족과 신하들이 가장 정통성 있는 후계자로 인정한 사람이었고, 경제는 비록 5남이었지만 문제가 황제에 오를 당시 네 명의 형은 사망한 관계로 적자로서 정통성 있는 태자로 황위에 올랐다. 유철은 16세의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올랐지만 나이가 어린 관계로 가장 웃어른인 할머니 두태후의 섭정을 받았고, 그보다 나이 많은 황족의 어른들이 있었기에, 그의 자리가 언제든 위협받을까 항상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유철의 할머니 효문황후 두태후는 대나라왕 유항의 후궁이었다가 유항이 황제(경제)가 될 즈음 대왕후와 그의 네 아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 황후가 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인물이었다. 황로학을 따르던 그녀는 결과적으로 놓고 볼 때 황로학을 기반으로 했던 문제와 경제의 든든한 조력자였다. 유철이 태자가 되기 전, 폐태자가 된 유영의 사부가 위기후 두영이라는 인물로 두태후의 조카이자 오초칠국의 난을 평정한 대장군이었고, 두영은 태자가 폐위된 뒤 사직해 버린다.

 유철에게는 두 명의 사부가 임명이 되는데 나중에 승상이 되는 위관과 급암이 그들이다. 위관은 유학자이고 급암은 황로학자였다. 황로학은 기본적으로 황제가 겸손하고 근검절약하여 백성을 쉬게 하고, 관대하게 법을 집행하며 자연의 순리를 따르며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는 이론으로, 현대의 자유주의 경제학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고, 그것을 실천한 것이 문제와 경제이다.

 그러나 유약한 어린 유철의 눈에는 그저 자기는 허수아비가 되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처럼 들렸을 것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강한 왕권을 가진 군주에게 충성하는 국가를 선호하는 유학 쪽이 유철은 더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황제에 오른 유철은 널리 인재를 모으는 데 동중서와 같은 유학자들을 대거 등용시켰다.

두태후와 한무제 (출처 : 드라마 위황후전)

 그러나 유학을 장려하는 유철의 모습을 두태후가 달가워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대로한 두태후는 유철이 등용한 유학자들을 죽이기까지 한다. 이렇게 한무제 유철의 초기 시절은 두태후와 급암 같은 황로학파의 견제로 자신의 뜻을 펼치기 힘들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건원 6년이던 기원전 135년. 드디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두태후가 세상을 떠난다. 이것은 그동안 그녀에게 줄곧 견제를 받아오던 한무제 유철이 자신의 뜻대로 날개를 펼치는 시작을 의미했다. 이제 23살의 패기 넘치고 열정적인 나이의 유철은 이제는 내 세상이니 얼마나 위대한 황제인지 보여주리라 마음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저녁 하늘을 뒤덮는 커다란 혜성이 지나간 것이다. '패성이 동방에서 나왔다'에서 동방은 지상에서의 동쪽이 아니라 지구에서 볼 때 태양의 동쪽에 위치한 경우를 나타내므로, 혜성은  저녁 서쪽 하늘에 지고 있는 태양을 향해 하늘을 가로질러 지나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혜성의 등장은 당시 한나라에서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19년 전, 아버지 경제 시절이었던 기원전 154년에 혜성이 지나간 사건을 천명으로 받아들인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유철이 공포감에 부들부들 떨면서 혜성을 바라보았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저 혜성의 의미는 무엇일까. 유철은 자신의 자리를 가장 위협할 수 있는 제후로 회남국의 왕 유안을 생각했다.


유안, 회남자

회남왕 유안

 회남왕 유안은 유철의 할아버지인 문제의 동생 회남여왕 유장의 장남이다. 따라서 유안은 경제와는 사촌 지간이고 유철과는 오촌 지간이 되는 사이였다. 유장은 문제가 황제에 오른 뒤 무도하다는 모함을 받다가 모반의 죄로 호송 중에 주는 밥을 먹지 않고 결국 굶어 죽은 비운의 인물이다. 그가 정말 역적이었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진짜 역적이었다면 일족을 멸했을 텐데, 문제는 오히려 유장에게 미안해하였고 유안을 포함한 네 아들을 제후로 세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다시 회남국을 세우고 유안을 회남왕의 자리에 앉힌다. 그는 특별히 권세에 욕심이 없이 학문에 열중하여 박학다식한 인물로 당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뛰어난 학자들이 그의 빈객이 되어 함께 지식을 교류하였다. 그렇게 빈객들과 함께 당시 동양의 사상과 과학을 집대성한 '회남자'라는 책을 저술하였고, 이 중 일부는 현재까지 남아있다.

 유안은 대표적인 황로학자였기 때문에 두태후가 매우 좋아한 인물이다. 남편(문제)의 동생인 그의 아버지 유장이 정말로 모반하였다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어린 유철이 황위에 오른 얼마 뒤 장안에 도착한 유안이 회남자를 바쳐 왔을 때, 그녀는 매우 기뻐하며 무제 유철에게 잘 소장하라고 당부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어린 유철도 처음에 입조한 유안을 존경하고 따른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문장이 뛰어났기 때문에 사마상여와 함께 문서 작성을 부탁할 정도였고, 그가 쓴 책을 잘 간직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철은 성장할수록 황로학을 멀리하였고,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박학다식하여 황족 중에서도 가장 존경받고 있는 유안이 어느새 존경스러운 어른이 아닌 두려운 라이벌로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기원전 135년 혜성이 지나간 후, 유안은 오초칠국의 난처럼 나라에 큰 변란이 있을 것을 대비하여 병장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시킨다. 수춘 지역은 농사가 잘 되는 곳이었고, 황로학파인 유안이 오초칠국의 난도 피하며 30년 가까이 통치하면서 회남국은 매우 부강한 국가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철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자신이 절대적인 군주가 되는데 가장 큰 눈엣가시는 북쪽의 오랑캐, 흉노였다. 두태후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기원전 134년부터 흉노를 정벌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키는 데 엄청난 비용에 비하여 아무런 소득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전쟁의 비용을 감당하기 위하여 곳간을 털었고, 매우 중요한 품목인 소금, 철, 술의 민간인 판매를 독점하여 그로써 얻는 이문으로 비용을 감당했다. 이러한 흉노와의 전쟁은 오래 이어져 기원전 127년이 되어서야 승전보를 올릴 수 있었다.

 유철의 오랑캐 원정에 반대하던 인물이 바로 유안이었다. 혜성이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남방의 민월이 남월을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민월을 치려던 황제에게 반대 상소문을 올린 것도 그였다. 이렇게 눈엣가시 같던 인물이었던 유안을 유철은 제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황로학의 중심에 서있는 황족 내 라이벌임과 동시에, 그를 제거함으로써 회남국의 군사력과 물자를 몰수하고자 함 때문이다.

 마침내 기원전 123년 겨울, 유철은 유안에게 모반의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게 된다. 사마천의 사기 '회남형산열전'에는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있지만 후대의 역사학자는 이 글의 내용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다. 요컨대, 아버지의 죽음에 원한을 오랫동안 가졌던 회남왕이 몰래 군사를 키워 왔고, 거병을 하려 했으나 책사인 오피의 만류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오피의 밀고로 탄로가 나 일족을 멸했다는 것이다.

 만약 유안이 모반을 하고 싶었다면 이미 경제 시절 오초칠국의 난에 동참할 수도 있었고, 태자 유영이 폐위되었을 때 자신을 총애하는 두태후가 살아있을 때 중상모략으로 황위를 빼앗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납득이 되지 않는 장면은 박학다식한 유안에게 오피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이 강론을 하고 그것을 경청하는 유안의 모습이다. 장안에서 돌아오는 사자에게 돌아가는 형국을 물어보면서 불안하다고 하면 좋아하고, 안정되어 있다고 하면 화를 내었다는 말도 있다. 과연 회남자의 저자 유안이 이러한 소인배였다는 사마천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회남자를 역적으로 몰아 일족을 모두 죽인 장본인이 바로 장탕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회남뿐만 아니라, 형제였던 형산왕, 강도왕도 한데 묶어 일족을 멸한다. 이로 인해 회남국 일대 수만 명의 피가 흘러내렸다. 그렇게 회남을 멸한 장탕 등 신하들이 전리품들을 수레에 가득 싣고 장안에 돌아온 이듬해 또 한 번의 변고가 일어난다. 바로 일식이다.

기원전 122년 7월 9일 일식의 본그림자 진행도 (출처 : Eclipsewise.com)
기원전 122년 7월 9일 개기일식 (출처 : Starry Night Pro 8)

 기원전 122년 7월 9일 금환일식이 발생하는데, 수도 장안에서는 0.99에 가까운 부분일식으로 보였고,

드라마틱하게도, 당시 일식의 본그림자는 장안과 수춘의 정 가운데를 뚫고 지나간다. 유철은 아마도 또 한 번 하늘을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렸을 것이다. 어두워진 태양의 바로 옆에 적시기 (M44)가 보이고, 그 가운데에 밝은 별 (목성)이 보인 것이다. 적시기는 말 그대로 시체가 쌓여있다는 말로 하늘에서 죽음을 관장하는 이곳에 보이는 밝은 별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유철의 눈에는 억울하게 죽음을 맞은 수만의 회남인을 이끌고 승천하는 유안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후한의 갈홍이라는 사람이 쓴 신선전에는 회남자가 모함을 당하자 여덟 선인과 함께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도 말한다. 바로 이 모습을 뜻하는 것이었다면 이후 한무제가 그토록 미친 듯이 신선을 찾았던 기행이 언뜻 이해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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