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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전문가윤담헌 Jan 10. 2024

여(呂)씨의 난

한나라 유방의 아내, 여태후의 최후와 개기일식

 사마천이 사기 천관서에 '諸呂作亂, 日蝕, 晝晦', 즉, 여씨(呂氏, 여태후 일족)가 난을 일으켰을 때 일식이 발생하여 대낮에도 어두워졌다고 한다. 

한고조 유방 (드라마 대풍가)

 한 고조 유방은 명실 상부한 중국의 통일왕국의 기틀을 다졌으나, 그의 고민은 여후 (여치, 고조의 아내이자 한나라 최초의 황후)에게서 낳은 태자 유영이 나약하다는 데 있었다. 대부분의 개국 공신들이 패현 중양리에서 그가 궐기하던 시절  동지들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깡패 조직의 우두머리나 다름없던 유방은 그에 걸맞은 성격과 호방한 성품을 지녔으나, 자신과는 다르게 유약한 태자의 모습은 그에게 부족해 보였고, 과연 무뢰배 같은 신하들을 제대로 통제해 나갈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후에 얻은 척 씨 부인이 낳은 아들인 조왕 유여의를 태자로 삼고 싶어 하였다. 유여의는 비록 12살의 소년에 불과했으나 성격과 행실이 자신과 닮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특히 척부인이 그의 총애를 한참 받고 있을 때 그녀가 지속적으로 그를 종용하면서, 실제로 태자를 폐위하고자 하였지만, 장량(장자방) 등의 대신들이 장남을 태자로 세우지 않아 멸망한 진시황의 예를 들어 반대하자 결국 이를 포기하고 말았고, 이 일로 인해 태자의 어머니인 여후는 유여의 와 척부인을 원망하게 되었다.

드라마 초한전기의 여태후

 한 고조가 세상을 떠난 뒤 태자가 황제로 즉위하였는데 이가 곧 혜제이다. 여태후는 곧바로 척부인을 가둔 뒤 유여의를 수도 장안으로 소환했다. 하지만 아버지인 유방은 이렇게 되리라 믿고 강직한 신하인 주창을 조나라 재상으로 꽂아두었었고, 그의 완강한 거부로 소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여태후는 먼저 주창을 소환하여 질책하였고, 그 후에야 유여의를 소환할 수 있었다. 혜제는 동생인 여의를 어머니가 죽일 것임을 알고 자신의 처소에 그를 데려와 보호했으나, 결국 어느 날 새벽 사냥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독살당하고 만다.

여후와 척부인

 유여의가 죽고 난 뒤 여태후는 척부인의 수족을 자르고 두 눈과 귀를 멀게 하고 벙어리로 만들어 돼지우리에 던져 넣은 뒤 그녀를 사람 돼지라 칭하였는데, 그 모습을 혜제에게까지 보여주었다. 동생과 척부인을 보호하지 못한 혜제는 처참한 몰골의 척부인을 보고 충격을 받아 1년을 드러누웠고, 이후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병이 들게 된다. 그리고 혜제는 즉위 7년째 되던 기원전 188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석 달 전 일식이 있었는데, 해가 완전히 달에 가려지는 개기식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이때 장안에서는 해가 거의 가려진 부분 일식이었다. 여태후와 그 일가의 본격적인 세도정치를 알리는 시작점이었다. 혜제가 붕어한 뒤 즉위한 두 명의 소제(시호가 없음)는 여후가 혜제의 소생이라 하였지만, 실제로는 인정받지 못한 허수아비 황제들이었다. 이들이 어렸기 때문에 그녀가 섭정의 역할을 하면서 나라의 요직을 여씨 일가가 모두 차지하게 된다.

기원전 188년 혜제 사망 당시 장안에서 본 일식의 모습

 조왕 유여의가 죽고, 동생인 회양왕 유우가 조왕이 되었다. 유우의 탄생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유여의 다음으로 조왕이 되어 14년을 지냈고, 그의 아들 유수가 이후에 조왕이 되었으며, 형인 문제 유항이 기원전 180년에 22세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그가 사망한 기원전 181년에 역시 20대 초반의 건장한 청년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여후의 오빠인 여산의 사위였는데, 여산의 딸과는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에 애정이 없었고 다른 희첩을 사랑하고 있었다. 이에 질투가 난 여 씨 부인이 장안으로 와 여후에게 밀고하는 데, 그가 말하길 "여 씨가 어떻게 왕이 될 수 있는가! 태후가 죽은 뒤엔 반드시 여 씨를 치리라!"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모르나, 한고조 유방의 아들로서 이미 세상을 떠난 제도혜왕 유비, 유여의 다음이 유우였고 혈기왕성한 청년으로 황족 일가의 중심에 그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여 씨를 몰살한 제왕 유양, 주허후 유장은 모두 그의 조카였는데 유우와는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청년들이었다. 화가 난 태후는 유우를 장안으로 소환하였고, 관저에 가두고 음식을 주지 못하게 하여 굶겨 죽였다. 일국의 왕자가, 그것도 수도에서 굶어서 죽었고, 게다가 평민의 예로 장사까지 치르게 한 것이다. 유 씨 황족 일가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사기 여태후본기에 굶어 죽어가는 유우가 슬퍼하며 부른 노래가 있다.

 

'여 씨들이 제멋대로 하니 유 씨가 위태롭다.

왕과 제후를 협박하여 강제로 내게 왕비를 주었네.

내 왕비가 질투하여 내게 죄가 있다고 모함했네.

모함하는 여자가 나라를 어지럽히거늘 주상은 알지 못하네.

내게는 충신이 없던가? 어찌 나를 버리는가?

들판에서 목숨을 끊어 하늘이 바로 알게 하리라!

아아! 후회스럽다, 진작 자결할 것을.

왕이 굶어 죽으니 누가 불쌍히 여길까?

여 씨가 천하의 이치를 끊으니 하늘이 대신 복수해 주리!'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사기: 본기(번역문), 2013. 5. 1., 사마천, 김영수))

 

 정축일에 유우가 죽었는데, 그로부터 12일 후인 기축일에 개기 일식이 일어나 장안 전체가 어둠에 휩싸이게 된다. 사기 또는 자치통감을 보면 여태후는 이를 매우 불길하게 여기며 "이것이 다 나 때문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일 년 후 재앙을 물리치는 제사를 지내고 오는 길에 검푸른 개와 같은 짐승이 나타나 그녀의 겨드랑이를 물었는데, 점을 쳐보니 자신이 죽인 유여의의 재앙이라 하였고, 결국 물린 상처로 인해 그녀는 병이 나 누웠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우유부단한 그녀의 오빠인 여산과 여록은 개국공신 진평과 주발의 계략에 군권을 잃었고, 여산은 주허후 유장에게 화장실까지 쫓겨가 죽임을 당한다.

 이후 여 씨 일가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잡혀 참수되었고, 번쾌의 아내이자 여후의 여동생 여수는 특히 진평과 사이가 안 좋았는데, 채찍질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우리야 일식이라는 것이 해와 달의 운동으로 발생하는 지극히 당연한, 예측 가능한 현상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자신의 아들이었던 혜제가 죽었을 때, 그리고 동생인 유여의와 유우까지 죽이자 일식이 생기는 것을 보면서 여태후는 하늘이 노하여 그녀에게 벌을 내리려 한다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이것은 거꾸로 유 씨 황족 일가에게 여 씨 일가를 처단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되었을 것이다. 주발이 여록을 속여 군권을 장악한 후 병사들에게  유 씨를 따른다면 왼쪽 어깨를 드러내라고 했을 때 모든 병사들이 그렇게 한 것은, 일식을 바라보았던 대부분의 백성들이 '하늘은 유 씨의 편이다'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은 천문 현상에 의하여 역사가 결정된 가장 드라마틱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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