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황후 허씨는 한나라 성제 유오의 첫번째 부인이다. 한 성제의 할아버지인 선제가 우여곡절 끝에 황제에 오르게 되고 그의 조강지처였던 공애황후 허씨가 황후에 오른 뒤 얼마 되지 않아 독살당하는 일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다음 황제 원제는 어머니를 잊지 않고 태자인 성제의 부인으로 허씨인 평은후 허가의 딸을 점찍었는데, 그녀가 바로 효성황후 허씨, 허아(許娥)이다. 처음 성제와 허황후는 사이가 좋아 태자비 시절에 이미 아들을 낳았으나 일찍 사망했고, 성제가 황제에 오른 뒤 딸을 낳았으나 역시 일찍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후사를 낳지 못하는 점에 대하여 근심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한서(漢書) 외척열전에 허황후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비(妃)가 되어 자리에 나간 이래로 늘 황제의 총애를 받아 후궁들은 황제를 만나 볼 기회가 드물었다'고 전한다. 신분상으로나 인격적으로 보았을 때 흠잡을 데가 거의 없어 보였던 인물이다. 그런데 이후에 전해지는 내용을 보면 둘 사이가 점차 멀어지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계기는 어이없게도 재이(災異) 때문이었다. 성제 시기에 빈번히 발생된 천문 현상들을 재앙으로 보았는데, 당시의 유학자였던 유향(劉向)과 곡영(谷永)이 그 책임이 허황후를 비롯한 후궁에 있다고 들었던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여러차례 재이에 대하여 유향과 곡영의 말을 듣고 성제는 황후와 후궁의 거처인 초방과 액정의 쓰임새를 줄였는데 허황후는 후궁들을 대표하여 이에 대한 부당함을 알린다.
"...초방의 의례 절차, 어복과 수레 및 가마, 관서에서 징발한 것과 관서에서 별도로 제작한 것, 외가와 여러 신첩들에게 하사한 것 등은 모두 경녕(竟寧 - 원제의 연호)이전의 옛 사례와 똑같이 하라는 조서를 받았습니다. 신첩이 엎드려 생각해보건데 초방에 들어온 이래로 친정에서 내려주는 바가 일찍이 옛 사례를 뛰어넘은 적이 없었고 매번 상(上)께 가부를 물어서 처리했습니다..." - [완역 한서 10, 이한우 譯)
허황후의 편지는 내용이 길지만 요약하자면 황후와 후궁들은 그동안 사치를 하지 않았고 관례를 어긋남이 없었는데 쓰임새를 줄이라 지시한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제는 유향, 곡영과 의논한 뒤 답장을 보낸다.
"황제가 묻겠소. 황후께서 그 일에 관해 말씀하신 바는 잘 들었소. 무릇 태양이란 모든 양(陽)들의 종주로 하늘에서 빛나는 것들 중에서 가장 귀하고, 임금다운 상징으로서 임금의 자리에 해당하오. 음(陰)이 양을 침범해 그 바른 모습을 이지러지게 하는 것, 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타고 넘고, 지어미가 지아비를 올라타고, 비천한 자가 귀한 자를 뛰어넘는 변고가 아닌가요?
'춘추'가 기록하고 있는 242년 사이에는 변고나 재이가 많았지만 일식만큼 큰 것은 없었소. 한나라가 일어난 이래 일식이 일어난 것 또한 여씨(呂氏, 한 고조 유방의 아내)나 곽씨(藿氏, 선제 시절 곽광의 딸) 때문이었소. 이제 와서 이번 일식을 잘 살펴보니 어찌 이런 유형의 일이 아니겠소?" - [완역 한서 10, 이한우 譯)
여기서 성제가 언급하는 일식이 바로 기원전 28년에 일어난 개기일식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기록되어 있는 있는 이 일식은 중국 대륙 전체와 한반도 중부지방까지 관통한 일식이었다. 동아시아의 모든 곳에서 높은 식분으로 관측할 수 있었던 일식이다. 이 일식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4월 기해일에 해가 동정 근처에 이르렀을 때 일식이 일어나 한동안은 해가 다 사라져 개기일식과 다르지 않았소. 기(己)는 술(戌)과 같고 해(亥)는 물에 해당하니, 이는 음이 성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요 그 허물은 안(황후)에 있는 것이오. 술기에서 임금의 몸(해)이 일그러졌고 황극에서는 후사가 끊어질 조짐이 드러났으며 재앙이 도읍에까지 미치는 조짐을 보였소..." - [완역 한서 10, 외척열전]
성제는 일식이 일어난 것이 음기(후궁)가 강한 것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며 그 책임을 허황후에게 돌린다. 지금같으면 말 같지도 않은 논리지만, 한 무제 시절 동중서에 의해 유학이 한나라의 정치 철학으로 도입된 뒤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천인감응론'이 대세인 시절엔 꽤나 진지하게 받아 들여졌다. 또한, 일식의 경고를 다른 데 원인을 두지 않고 허황후에게 돌린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지금의 제후들은 한나라의 제도에 속박돼 있고 군국에 나가 있는 재상들이 그들을 꽉 쥐고 있으니, 일곱 나라들의 난(칠국의 난)을 일으킬 수 있겠소? 대신들은 충심을 다하고 오직 바른 의리만을 따르고 있으니 상관걸이나 박륙후, 선성후의 모반 같은 일이 일어나겠소? 게다가 아무리 호걸이라 한들 진승이나, 항량의 무리는 없고, 수많은 오랑캐들이 복종하며... 결국 변고나 재이의 원인을 오랑캐에서 찾아보아도 없고, 신하들에게서 찾아보아도 없으니 후궁 말고 무엇이 이에 해당하겠소?" - [완역 한서 10]
아버지인 원제 때는 홍공과 석현이 혹세무민하고, 성제 본인 시절부터 향락에 빠져 외척인 왕씨에게 권력이 넘어가 결국 왕망이라는 인물이 등장해 전한이 멸망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남탓 돌리기가 아닐 수 없다.
결국 기원전 28년 일식의 원흉은 황후 허씨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일찍이 한 고조 유방의 아내인 여후가 죽기 1년 전에, 장안을 정확히 관통한 개기일식으로 보고 충격에 빠져 그녀 스스로 '모두 나의 탓이다'라고 한 것에 대한 학습 효과였다.
그렇게 허황후에 대한 황제의 관심이 줄고 다른 후궁들이 총애를 받자, 허아의 언니 허알(許謁)이 임신한 후궁 왕미인과 당시 실세였던 왕봉을 저주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결국 허알은 죽고 황후 허아는 폐위되고 만다. 이 후 복위를 꾀하기 위해 과부가 된 또 다른 언니 허미(許孊)가 사통하고 있던 정릉후(定陵侯) 순우장(淳于長)과 서신을 왕래하며 뇌물을 보냈는데, 일이 발각되어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하늘'의 뜻이라며 버림을 받고 희생당한 인물은 역사 속에 많이 있겠지만, 허아는 본인의 의중과는 상관 없이 주변 상황, 주변 인물들이 원인이 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이 이야기는 이후 자치통감에도 기록되고, 연산군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연산군일기 46권, 연산 8년 10월 19일 무오 1번째기사 - 장령 김천령이 하늘의 경계에 응하여 용도를 절약할 것을 아뢰다
'...옛날에 지진과 일식(日蝕)은 외척(外戚)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에 하루에 오후(五侯)를 책봉하니 누른 안개가 사방에 끼었다 합니다. 신 등이 이를 아뢰어 마지않는 것은 전하께서 실책(失策)이 없게 하도록 하자는 것뿐입니다'
온갖 재앙을 몰고 온 간악한 여인으로 낙인찍혔던 허아는 유학(儒學)을 중시해 온 2천년 가까운 역사 시대동안 불명예를 안아야 했다. 이제 그녀의 불명예가 조금은 덜 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