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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거 갖고 싶었지? 내가 샀어

삼성 무선 청소기 비스포크 제트

by 필명이오

고양이들이 어디에 머물든지 한동안 집에서 털이 풀풀 날릴 게 분명하다. 게다가 필명25는 한때 화려한 탈색 머리로 살았다. 염색약 조절에 따라서 무지개색 중에 초록색 빼고 다 한 번쯤은 거쳐간 정도랄까? 지금 검은색으로 덮어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머리카락이 후두두 떨어진다. 세 마리가 뿜어대는 털과 툭툭 끊어지는 내 머리카락의 환장 콜라보.


“하… 저 팔자 좋은 고새끼들 털에, 사람 새끼 머리털에, 내 집에 들어오기가 싫다.”


엄마를 끌어안으려 양팔을 벌렸다.

“에이, 엄마도 좋으면서.”


엄마는 본인 체구보다 살짝 큰 나를 있는 힘껏 밀어냈다.

“꺼져. 니 쟈들 때문에 유지비가 얼마나 깨지는지 아나? 내 밖에서 일하는 하루종일 쟈들은 누워서 밥값도 못하고, 어? 밥만 축내는 것들. 겨울에 즈그들은 집 안에 가만히 있는데, 춥다고 먹지도 못하는 식빵 구워대니 보일러 맨날 켜야 되제. 빨랫감은 뭐 그래 만드는지 물세가 5만 원이다. 이불 빨아놓으면 새 거에 똥오줌을 바르지 않나. 비싼 전기 쓰면서 청정기 세 대나 돌려도 털 풀풀 날리제. 세탁기랑 건조기까지 전기 먹고. 내가 내 돈 쓰면서 쟈들 집에서 냅두니 미쳤지.”


“크흠! 거, 고양이가 원래 일을 하나? 반려동물은 집에서 귀여우면 됐지.”


“귀엽기는 무슨. 주는 대로 다 받아먹어서 5킬로 넘는 돼지들 하나도 안 귀엽다. 애기들은 쪼끄만 하던 때나 잠깐 귀여웠지.”


“엄마는 말만 그르케 하고 지금도 예쁘다고 쓰다듬고 하잖아.”


“그것도 다 잠깐이지. 어후, 내가 퇴근할 때 현관문 앞에서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터진다.”



“엄마, 그래도 내가 청소기 열심히 돌려서 먼지가 이만큼이나 모였다. 너무 힘들어. 먼지통은 엄마가 좀 비워도.”


엄마가 무선청소기 먼지통을 탁탁- 치고, 면봉과 나무젓가락으로 긴 머리카락을 긁어냈다.


“켁켁, 아, 이거 먼지 되게 많이 날리네.”


“그러게. 먼지까지 자동으로 비워줬으면 좋을 텐데.”


“이거 초기에 사서 그렇다. 요즘은 충전기에 꽂으면 자동으로 비워준다더라.”


“진짜? 그게 된대? 나도 먼지통 열 때마다 너무 더럽더라.”


“이래서 가전은 초기에 사는 게 아닌데. 우리 집은 건조기랑 청소기랑 다 초기에 사서…”



그런 엄마를 위해서 준비했다! 삼성 비스포크 제트 220W. 솔직히 아빠의 고양이 알레르기가 심해진 후에 내가 청소를 더 많이 하다 보니 불편해서 장만했다. 대입 삼수붕어 개백수가 무려 799,000원이나 지출했다.



엄마한테 내 돈으로 주문해도 되냐고 물어보고, 엄마가 쓰고 싶은 색으로 고르라고 했다. 기본 모델보다 엄마가 고른 저 색상이 10만 원 비싼데, 공식 홈에서 쿠폰 받기를 했더니 10만 원 할인됐다.


알바 한 번 안 한 경제력에 비하면 엄청난 자금의 출처가 의심스럽지 않은가? 아, 그것은 바로. 미국 ETF 매도 후 한참 있다가 달러를 환전해서 생긴 원화다.


필명25는 학생 때부터 여러 방면으로 투자를 시작했다. 사고 싶은 게 생기면 마트 바닥에 드러눕지 않고, 혼자서 자금운용 후에 사는 재미가 있다. 가끔 이런 깜짝 선물까지 살 수 있고.


설치기사님이 다녀가신 직후, 엄마한테 영상통화가 왔다.


“엄마, 왜?”


“아니… 청소기 색깔이 매트랑 똑같은 거 같아서.”


“좀 보여줄까? 자, 이렇게 생겼다. 이제 먼지통 자동으로 비워준다.”


“어, 잘 샀네.”


“애들은 다 커튼 뒤로 숨었어.”


“응. 고새끼들은 안 비춰줘도 된다.”


“칫.”



어쩌다 보니 우리 고양이들 관절 보호를 위해 깔아 둔 매트와 잘 어울린다.



청소기를 받고 얼마 안 있어서 나만 수도권에 다녀왔다. 그동안 엄마가 일도 하고 청소도 했다.


“엄마, 그래도 ㅇㅇ(필명25 본명)이 있어야 집안일이 잘 돌아가지요?”


“하나도 도움 안 된다.”


“그런 딸이 청소기를 사주나?”


“어이, 말은 똑바로 해라. 니가 저 세 마리나 되는 고새끼들 때문에 억지로 청소하니 불편해서 산 거 아이가. 그러니 나한테 사준 게 아니지. 니가 그냥 니 좋자고 산 거다.”


“그렇게 따지면 엄마도 내 청소기 썼잖아. 새 거라서 편하게.”


“니는 그거 써라. 나는 내가 산 구형 쓰면 된다.”


“새 거 사줘도 투덜투덜 하나.”



비닐 감정평가사 첫째냥은 물걸레 여분이 담긴 비닐을 보자마자 입술에 대고 와구와구 했다. 침을 발라 놓을 뿐 먹지는 않는다.


그래. 너라도 청소기를 감싼 비닐을 마음에 들어 하니 됐다.


청소기에 쓴 내 돈을 (0에 수렴할 정도로 작겠지만) 배당금으로 환급받을 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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