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가장 엄마
아빠는 화요일에 내과에 다녀왔지만, 회복이 안 되어 수요일도 출근을 못했다. 엄마는 혼자 출근하면서 아빠에게 당부했다.
“ㅇㅇ아빠, 오늘 몸이 괜찮은 것 같아도 꼭 병원 가서 링거 맞고 오소. 그래야 내일이라도 나가지.”
“으응.”
“아빠 출근 안 한대?”
“어, 아직 많이 아프대. 에휴, 이제 내가 우리 집 가장이가.”
“하하하, 엄마가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백수 아니네.”
“지겹다. 팔자 좋은 ㅇ씨들이랑 고새끼들.”
엄마는 이제 아빠와 나의 성씨만 봐도 질린다고 말한다. 하필이면 직원 한 분이 오전 중에 행정업무 보신다고 원래부터 빠지기로 한 날이었다.
“엄마, 아빠까지 둘이나 빠져서 어떡해.”
“뭐 어쩔 수 있나. 하는 데까지 해봐야지. 걱정이다.”
회사일은 내가 대신해줄 수 없으니 집안일이라도 해놔야 엄마가 퇴근해서 바로 쉬지 않겠는가. 엄마를 배웅하고 또 대청소를 했다.
‘어? 그러고 보니 오늘이 1월 4일. 작심삼일이 깨졌네?’
어쩌다 보니 습관 하나 잘 들였다. 환기시키려 창문을 여는데… 음, 빨래 바구니가 미어터진다. 이제는 나도 빨랫감 구분정도는 잘한다.
속옷, 양말, 딱 한 벌 나온 내 외출복은 후드끈 묶어서 넣고, 이거 저거 다 때려 넣었다. 거기다 고양이 털을 책임지는 세탁볼 6개를 옷 사이사이 넣고, 세제는 한 컵, 표준 모드로 띠링-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리는 것은 하루를 시작하는 일종의 의식이랄까? 세탁물이 돌아가는 한 사이클만큼 뭔가를 집중하고, 이어나가는 게 루틴이 되었다. 어제가 오늘, 오늘이 어제인 삶을 살다 보니. 세탁기가 끝나고 나오는 알림이 내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지표인 셈이다.
새해 들어 구체화된 집안일 루틴은 다음과 같다.
1. 세탁기/건조기 눌러 놓기
세탁기에 뜨는 시간만큼 혼자서 미션임파서블 찍는다.
2. 설거지
결벽증이라 물 많이 쓴다고 엄마가 뭐라 한다. 당연하지. 내 설거지에 오류는 없으니까.
3. 커튼과 블라인드를 다 걷기
어마마마의 명령에 따라 자는 방에 고양이를 들이지 못하니 내가 거실로 나와버렸다. 이부자리와 고양이용 목재 가구에 햇볕이 들어 자연 소독되도록 한다.
4. 빗자루로 큰 쓰레기부터 걷어 내기
고양이들이 물어뜯은 박스 쪼가리, 막 흘려 놓은 화장실 모래가 청소기에 막혀서 삑사리 나기 때문
5. 폼 롤러 헤드를 청소기에 꽂고 전체적으로 밀기
6. 좁은 헤드로 바꿔서 모서리까지 다 닦기
7. 밀대에 걸레를 붙이고 묽은 손소독제로 닦기
필명25는 키가 작아서 밀대랑 거의 비슷하다ㅠㅠ 손잡이 잡고 낑낑거리면서 거의 끌려 다닌다.
8. 아기용 매트는 물티슈에 손소독제를 묻혀 걸레질하기
애들이 여기 누워 자면서 침이 묻기 때문에 앉으면 알레르기 반응이 온다. 그래서 잘 닦아야 한다.
9. 물걸레 빨기
화장실 바닥이 까끌까끌해서 빨래판 대신 문지른다.
10. 손 씻고 침구류 청소기로 털기
이게 밀대 못지않게 힘이 많이 들어간다. 넓은 이불에 이불 전용 헤드를 대고 와리가리… 청소기가 그렇게 무거운 줄 처음 알았다.
11. 마침 빨래가 다 되었으니 건조기 물통 비우고 필터 청소하기
LG 건조기를 사면서 펫케어 필터(건조볼 6개와 세트)까지 추가 구매 했다. 필터 꺼내는 순간 환장한다. 필터 겉에도 십자수처럼 털이 막 박혀 있는 게 보인다.
참고로 이건 고양이들이 절대 출입할 수 없는 안방에서 나온 세탁물이다. 저기 박힌 털은 완벽히 제거할 방법이 없다. 테이프클리너로 밀어버리고 싶은데… 필터가 먼저 찢어지겠지? 어떻게 방법 없나.
12. 펫케어 건조볼과 세탁볼에 묻은 털을 손으로 물세척
귤껍질 까듯이 먼지를 긁어낸다. 어, 그러면, 물미역이 둥둥 떠다닌다. 물론 원재료는 우리 고양이 털.
이상하다. 분명 저만큼 빗어줬는데.
공으로 뭉쳐주면 어떤 장난감보다도 반응이 좋다. 특히 막내와 항상 기싸움을 하는 첫째는 이 털공에 환장한다. 막내의 분신이라 생각하는 건가?
언니의 일거리를 만들어주는 첫째. 언니 추울까 봐 이불에 털을 보태줬다. (첫째는 몸통에 하트 무늬가 있다. 둘째와 똑같이 목덜미 점 3개가 있기도 하다. 유전의 힘!)
아빠가 10시쯤 밖에 한참 나가있길래 병원에 다녀온 줄 알았다. 그런데 아빠 손에 들린 봉투는 병원 옆 김밥집 것이었다. 병원이 바로 옆인데 겸사겸사 다녀온 것도 아니었다. 엄마가 그렇게 병원에 다녀오라 했음에도 아빠는 안 갔다 왔다. 정말 말 안 듣는 환자다.
우리 집은 엄마가 있어서 잘 돌아간다.
평소보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한 엄마가 안방에 가서 외투를 걸었다. 아빠는 안방에서 엎드리고 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나 이제부터 출근 아예 하지 말까?”
“XXXXXX. 으이그, ㅇ씨들은 백수 기질이 좀 있어. 그제? 집에 있으니까 편하던 갑제?”
“흐흐흐흐. 어.”
“엄마, 그것은 우리 ㅇㅇ ㅇ씨 20+n대손 ㅇㅇㅇ선생님 혈통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오.”
“할아버지가 20+n대손이가? 니는 20+n+2대손이고?”
“그럼, 그럼. 아주 유서 깊지.”
“별 걸 다 물려받는다.”
“엄마, 그래도 ㅇㅇ 오늘 엄마를 위해 집안일을 다 해놨어요.”
“어, 니 이제 가정부로 살 거가?”
“뭘 해놔도 뭐라 하고 그르나. ㅇㅇ 슬퍼요.”
“해보니까 엄마는 저게 뭐라고 쌔빠지게 왔다 갔다 했나 싶제? 별 거 아니제?”
“엄마, ㅇㅇ. 오늘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았어요. 왜 집안일 대신 해주는 사람이 있는지. 엄마가 ㅇㅇ 낳기 전날까지 맞벌이에 집안일까지 진심이었다니…”
“발연기하고 있네. 느그 ㅇ씨들은 발연기를 잘해.”
“아이, 내가 오늘 삼성에서 ~~~도 주문했는데 왜 그래.”
“내가 유세 떨 거면 사지 말랬지? 니가 저 고새끼들 때문에 집안일 잠깐 해 보이 불편하니까 시킨 거면서.”
필명25가 펜트하우스에 물려 있는 삼성전자에서 주문한 제품이 무엇이었는지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