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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oldenuit Oct 20. 2022

비행기에는 후진이 없다(No Back)

떨리지만 직진하려고요.

아는 분들은 압니다. 비행기에는 후진이 없다는 사실을요. 말 그대로’ 노빠꾸(No Back)'. 백미러도 없을뿐더러 제 아무리 뒤돌아본다 해도 보이는 건 없습니다.


'아니, 최신식의 비행기가 이게 말이 되는가요?'라고 물어도 소용없습니다.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으니까요. 뭔가 비행기 제작사의 의미심장한 뜻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Chamonix-France, Aug 2022


아무튼 이래저래 한번 출발한 비행기는 ‘뭐가 돼도 직진’입니다. 백미러라도 있다면야 내 뒤에 동료 비행기가 잘 따라오나 볼 수 있을 텐데요. 앞서거니 뒤서거니 있고 해서 망망대해 외롭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 ‘노빠꾸’ 비행기에 무작정 짐 싸서 올랐던 기억이 납니다. 다니던 전자회사에 무턱대고 사표를 쓰고,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홀로 유럽으로 훌쩍 떠났던 때가 있었습니다. 막상 용기 내어 나왔지만, 집 나온 아이 마냥 두렵고 떨렸습니다. 뒤 돌아본다고 한들, 갈만한 회사도 없고 가고 싶은 회사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Paris, May 2022


그렇게 막 따끈따끈하게 회사를 관둔 말 못 할 심난한 심정으로, 파리행 KE901편 비행기의 창가 쪽 좌석에 올랐습니다. 어깨너머에 심심하지 않게 손바닥 만한 비행기 창문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치, 오늘 살아갈 이유를 한번 찾아보라며 비행기 제작사가 주고 간 조그만 선물 같았습니다.


그 비행기는 인천을 뒤고 하고는 구름을 뚫고 날아오르더니 찬찬히 항로 고도에 도달하더군요. 그리고는 그 선물 같은 창문 너머로 그림물감 짜내듯 한 폭의 해 질 녘 슬로모션을 그려 넣었습니다. 마치 모네의 황금빛 베니스 풍경처럼 한 폭의 캔버스에 마음을 뺏겨버렸습니다. 덕분에 불안했던 마음도 차분해지고 집 생각도 하나둘씩 내려갔습니다.


창가에 기대어 졸다가 덜컹 잠이 깼습니다. 눈만 잠깐 감았다가 떴는데, 금세 밤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깨 쪽 창가에는 아까 봤던 황금빛 찬란하던 선셋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아니, 이제는 가도 가도 깜깜한 밤하늘 사막 한가운데 더군요. 러시아 한복판이라고 비디오 스크린이 말해주는데, 너무도 똑같은 그림이라 그런지 어디가 어딘지 당최 모르겠습니다. 마치, 시커먼 필름들이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는 모양의 하늘이라고 할까요. 러시아가 그렇게 큰지는 그때까지 미처 몰랐습니다.


깜깜한 한밤중에 장시간 비행은 막막하고 불안이 밀려와서 무척 싫었습니다. 불투명한 앞날에 고뇌하던 제게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내풀에 지쳐, 옆 사람에게 왜 빨리 안 가냐고 보채고 싶고, 제대로 가는 게 맞냐고 확인하고도 싶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이런 깜깜하기만 한 흑백 창문 뷰가 아니라고요. 안 그래도 뒤숭숭한 마음인데, 윈도우 바탕화면 같은 들푸른 컬러 뷰를 보여달라고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제겐 그럴만한 용기도 그럴만한 권한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멍하니 바라보던 밤하늘 그 창문 사이로 매직아이 초점이 맞춰지듯 별자리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깜깜한 하늘 와중에 그 별 덕분에 오랜 친구 만난 듯 눈이 휘둥그레 해지고 정신이 번쩍 듭니다. 별을 찾아주는 앱으로 찾아보았더니 ‘시라우스’ 별이라고 합니다. 그 친구는 적막하고 그토록 고독한 하늘에서 꿋꿋이 누군가의 나침반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습니다. 꼭 나보고 따라오라고, 맞게 가고 있으니 걱정 붙들어 매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Lyon-France, Aug 2022


어느새 기장님의 기내 도착 방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처음에 약속한 목적지 그대로 안전하게 데려다준다 고요. 내심 불안해하는 저를 안심시키는 듯한 저음 특유의 목소리로 말입니다. 그리고 40 정도가 흘렀을까요. 이내 비행기가 제게 ‘정신 차려하는 듯이 철컹하고  무거웠던 랜딩기어를 땅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길게 고부라진 코끼리 코를 연결하더니, 난생처음 보는 세상 한가운데 내려줄 채비를 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뻐꾸기 둥지에서 아기새 밀어내듯 생지 공항 한가운데 저를 내동댕이친다고 해야 할까요. 이제 창문 밖으로 세상 볼 거 다 보여줬으니 배낭 하나 던져주며 하산할 그때가 되었다고요. 참 냉혹한 세상처럼 느껴지더군요.


추측항법(Dead Reckoning)이란 항법이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뜯어보면 죽느냐 사느냐(Dead)의 문제가 달린 배의 항로방향을 추측(Reckoning) 해가는 그 당시만의 고전적 항법이었죠. 대항해 시절 깜깜한 망망 바다에서 밝게 빛나는 별자리가 지도 역할을 해주면, 현재 나의 위치와 방향을 가늠했던 것이죠. 마음속으로는 온갖 두려움을 간직한 채, 내가 보물섬을 찾을지 식인종이 득실대는 식인 섬에 걸려 생을 마감할지는 오로지 그 별자리와 별자리를 의지하는 나의 믿음에 달려 있었습니다.


공항 브리지가 연결되고 마침내 항공기 도어가 열렸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승무원들의 인사와 함께 드디어 새로운 세상 밖으로 첫걸음 내디뎠습니다. 순간, 손바닥 만한 창문 틈으로 보았던 그 별자리가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쳐갔습니다. 그 별자리를 나침반 삼아서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를 찾아서 떠났습니다. 떨리지만 뭐가 되든 직진하려고요. 말 그대로 ‘노빠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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